여성이라는 난제 : 얄팍한 성기를 넘어선 범주를 상상하기

  지난 6월 3일에서 13일까지의 아주 짧은 기간, 김현주의 <프레임>이라는 전시는 여성과 사회인으로서 느낀 곤란을 점묘 드로잉을 통해 그려내고 있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한 작업 당 6개월에서 2년까지도 소요되는 각고의 소산이다.)

 

 

출처: https://nl-nl.facebook.com/BPLATFORM/videos/frame

 

  나는 마침 더현대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앤디워홀의 전시를 보고 났던 터라 당혹감이 꽤나 컸는데, 작가의 노력이 주류 미술사가 일궈온 개념들에 관한 개인적 반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앤디워홀에 관해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바라면 다음 몇 가지가 있을 것이다. 미국의 공업생산이 이룩한 포디즘 모델을 미학적으로 반영하여 개별 작업들의 아우라를 파괴하고 기존 미술사를 갱신했다는 점. 차연적인 작품을 생산하면서 미술, 상품, 반복, 우연 등의 주제를 복합적으로 발화해 작품을 다른 작품들과의 관계 안에서 사유하도록 지시했다는 점. 예술이 스스로의 순수한 세계 속으로 격리되려는 충동을 묵과하지 않고 ‘사회 내’에 있는 여러 분과 중 하나의 지위로 고착시켰다는 점. 등등.

 

  그런 미술사를 복습한 뒤에 만난 <프레임> 전은 관습적으로 대했을 때 무용한 듯 보였다. 미적 생산물은 당대의 사회적 생산의 반영이라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전시는 시대착오적 키치에 가까웠다.(작업은 리싸이클링도, 커스터마이징도, 취향이나 수공‘예’적 생산에도, 경험의 총체를 집속한 개별 사물의 위상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다수가 동의하는 ‘미술사의 소멸’의 관점에서라면 워홀 이후 핸드메이드 스타일의 작업이 전시장 안에서 등장하는 일은 문제될 게 없다. 게다가 ‘재현’이라는 문제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될 때 김현주의 종교적 고행과도 같은 작업은 미학적 설득력을 갖는다.

 

  점묘 드로잉의 형식과 여성으로서의 삶에 입각한다면 점이라는 최소 단위로 여성의 신체를 구현한 시도는 통일된 상처럼 보이나 입자 단위까지 조각나 있는 여성 지위에 관한 형식적 말하기이며, 무형의 프레임에 의해 끼인 신체 ‘전체’를 그린 초기작에서 갈수록 부분적 신체로 갈라지더니 종래엔 회음부로 집중되는 프레임의 확대는 일반적인 남성 거장들의 클리셰와 같은 성장구도의 역전처럼 보였다. 즉 자아, 감정, 내면에서 시작해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까지 나아가는 남성-거장서사의 확장과 달리 사회적인 문제로부터 시작해 점차 특수한 문제로 집중된 계통 발생적 서사의 개체 발생적 감응이자 심지어는 항문기적인 퇴행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 부상하는 신본질주의와는 다른 판본 같았다.

 

 

출처: https://nl-nl.facebook.com/BPLATFORM/videos/frame

 

  (잠깐 길을 새자면) 문제되는 신본질주의는 여성의 신체가 남성과 근본적으로 다른 조건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이때 사회적 제물로 등장하는 직업군은 여경이나 여자 소방관으로 취업, 공정, 젠더 영역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남성들의 저항감을 높인다. 남녀의 다른 체력시험 기준은 불공정 논의를 영원히 타오르게 하는 불씨이다. 더불어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담지해온 사회적 역할, 즉 공동체의 치안은 남성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는 관념을 강화하는데. 신자유주의의 ‘능력주의’와 결합해 기울어진 운동장의 논의를 오히려 남성들이 전유하게끔 하는 기제가 된다.

 

  그러나 더욱 교묘한 신본질주의는 신체가 아닌 젠더에서 ‘매너 있는 남성’들에 의해 발휘된다. 전통적으로 여자는 차별받았으며, 억압되었었다고 기꺼이 말하는 남성들. 그들이 말하는 ‘목소리’ 안에 이미 그들의 경험적 확신이 들어있다. 문제를 인식하고 분별한 뒤 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낼 때 여성과의 사전 논의란 불필요하며(내가 느낀 바를 이야기할 뿐이니까), 그들이 받아들인 만큼의 문제만 문제가 된다. 그들이 보기에 세계의 문제는 문제로 여겨진 그만큼만 해결된다면 전부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머니 세대의 차별을 잘 알고 있는 ‘매너 있는 남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어머니 시절에는 겸상도 못했고, 제사도 전담했으며 가사 노동에 시달리고 너무 힘드셨겠지... 지금은 그런 거 없잖아?” 이때 차별은 은닉되고 현재의 조건이 산출하고 내재화하는 젠더 속성은 자연화된다.

 

  한편 신본질주의는 여성들의 측면에서도 끊임없이 제기된다. 특히 터프(TERF, 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들이 주장하는 왜곡된 급진성은(급진성은 너무 자주 오용된다.), 생물학적 여성만이 여성이라는 무근거한 본질을 정체성과 합치시키며, 트랜스 여성 또는 다양한 성차를 가진 성적 존재들의 차이를 외면한다. 이는 퀴어이론의 여러 주장과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성적 차이와 젠더의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는 이 지점에서 ‘터프’와 ‘한남’은 신본질주의의 데칼코마니로 만난다.

 

  다시 작업으로 돌아오면, 신체 전체에서 여성기로 이행하는 작업들의 진행과정은 신본질주의적 문제라기 보단 여성 투쟁사의 요약된 변천사처럼 다가온다. 마치 역사의 과정에서 인간으로 인정받으려던 여성들의 운동, 참정권 투쟁, 동일임금, 낙태할 권리에 이르기까지 여성 처우에 대한 진보적 요구에서 시작해 현대에 이르러 성희롱, 성추행, 강간 등 성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자율권 논쟁들에까지 와닿는 시간적 아카이브처럼. 이 기록에서 우리가 중요히 다룰 부분은 어디일까. 나는 바로 프레임 그 자체, 성기로 축소된 프레임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다.

 

  여성의 문제가 여성기의 스펙트럼에서만 다뤄지는 일은 지나치게 가볍다. 그동안 많은 페미니즘 이슈들, 그러니까 자유주의, 사회주의, 급진주의, 사회구성주의 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섹스/젠더의 관점에서 문제를 대해왔다. 그 중에서도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성과는 여성이 남성에 의한 성적 대상화를 통해 존재하게 된다는 논의를 만들어냄으로써 보편적 시각의 주체를 식별하고 여성 신체/이미지에 관한 진전된 이야기를 가능하게끔 기여한 데 있다. 하지만 도나 해러웨이가 말하듯, “여성은 남성 욕망의 산물이라는 점을 제하면 실존하지 않는다는 페미니스트 의식을 생산한다.”* 여성기로 수렴/발산되는 모든 젠더적(이라고 주장하는) 논의들은 이와 같은 불순한 가부장제의 인정을 은폐한 채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작가의 확대경, 성기로 완전히 확대된 프레임을 적용하는 통에 프레임 외부로 떨어져나가는 것들을 인지하려고 한다. 여기서 프레임은 삼중의 허위를 둘러메는데, 첫 번째는 프레임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러한 프레임이 선형적 시간성에 따른, 자연적인 ‘이동’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작가 개인의 고민이 깊어지는 결과에 따른 ‘자율적인’ 결정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세 겹으로 씐 베일에 의해 여성은 다시금 불투명한 외관을 갖게 됨에도 그것이 자연스러운 외관처럼 보이게 한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잘 먹은 화장에나 쓰이는 찬사기에 자연이 아니다. 따라서 작가의 집중은 ‘본질’로 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작업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읽는 일은 회화를 영화처럼 읽는 일에 가깝다. 회화에 전기적인 시간을 부여하고 작가성을 도야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타당하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작가의 시간이며 회화의 시간이 아니다. 회화는 여성 문제에 대한 복잡한 인식들로 연결시킬 때 보다 선명해진다.

 

  프레임에 끼여 틀지어진 존재에 관한 작품들은 서문을 읽기 전엔 대상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불분명하게 그려져 있었으며 심지어 회음부조차 여성의 것인지 즉각적으로 식별해내기 어려워서 성차의 문제는 ‘지워져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다시 말해서 회화는 여성이라는 범주의 불분명함과, 그렇기에 여성의 범주를 가늠하라는 복합적인 주장을 위해서 불분명하게 그려진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대체 여성은 무엇이고 누구일까? 개인이라는 공고한 개념이 뿌리내린 사회에서 인간을 개인 미만으로까지 해체시키고 틀 짓는 문제가 존재한다고 하면 사회는 스스로를 배반하는 부조리를 행사하고 있다.(물론 이는 예술이 진실을 폭로하는 기능을 여전히 실천한다고 믿을 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퀴어이론에 따르면 게이와 레즈비언은 태초부터 역사 이면에 있다기보다는 역사의 산물이며, 특정 역사에 존재하는 정체성이다. 존 데밀리오에 의하면 영원한 동성애자란 하나의 허구이자 신화이다. 그는 자본주의적 발전이 중심 생산을 농업에서 상공업으로 이행시키면서 가족은 노동력의 근본단위에서 정서적 만족감을 갖는 자족적 형태를 띠게 되었고, 따라서 가족이 노동의 공동체에서 사적 생활의 기초단위로 변모했다고 한다. 즉, 개인이 고립된 경제적 행위자로 사회 안에서 기능하기 시작했을 때, 한 사람의 고유한 섹스에 대한 끌림을 바탕으로 사생활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풍경’은 그것을 바라보기 위한 근대적 주체의 ‘내면’이 먼저 구성되어야 가능하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말처럼, 젠더 역시 몇몇 페미니스트들이 결별하고자 했던 생산의 문제와 무관할 수 없다. 2030 여성의 자살률은 최근 눈에 띄게 증가해 ‘조용한 학살’이라는 낱말로 명시되기에 이르렀다. 코로나19 시기의 여성과 남성의 고용지표는 여전히 남성이 가정을 책임지는 주체라는 기조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여성이 상대적으로 해고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2020년 기준 전년도 대비 자살자 증감 추이에서는 여성이 사회적 위기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함을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지표에는 드러나지 않는 다른 코드가 있다. 자살자의 수에서 남성 자살자의 수는 여성의 두 배에 이른다.****

 

 

출처: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00910/102875737/1
출처: <그림 3>과 동일

 

  자본주의 산업 체계가 남성도 여성도 ‘노동자’라는 범주 안에서 취급하는 이상 남성도, 여성도 비정규직/플랫폼 경제 안에서 동일하고 필연적인 취약함을 드러낸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 자살자의 수적 차이 내지는 증감률을 통해 다투는 일이 전적으로 옳은 방식의 준거 틀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런 주장은 어떨까. 오늘날 기술이 남성이고 인간은 여성이다. 이 명제는 단순한 사변에 그치지 않고 실생활에서 나타난다. 러브돌과 섹스토이 산업 규모는 나날이 증가하면서 각종 광고를 통해 우리 ‘곁’을 차지하려고 든다. 이성이 우리에게 대시하는 경험에 비하면 성인용품과 포르노 사이트가 우리를 유혹하는 횟수가 아찔하게 많다. 오늘날 여성에게서 딜도는 반려기구라는 칭호를 얻었고, 러브돌은 스스로 도태되었다고 느끼는 남성들의 대안이다. 이제 기술만큼 성적인 것은 없다. 포르노 제작 테크놀러지와 섹스토이 테크놀러지가 종적으로 승리했다.*****

 

  그렇다. 섹스토이는 성병의 우려로부터 자유롭고, 몰카와 관련된 불안을 안겨주지도 않는다. 데이트강간에 처할 일도 없고 임신의 가능성도 없으며 전적인 성적 자율성을 보장한다. 우리는 쾌감의 취향에 따라 원하는 부위를 자극하는 다종의 기구를 꼭 맞는 사이즈에 이르기까지 ‘원하는 대로’ 쇼핑하고 수집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사회적,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면제된 쾌락을 한껏 누리면서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리트는 무척 편리하다. 포르노는 매일 새로운 얼굴과 성기를 노출하며 유혹을 일삼는다. 여기서는 고정된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줄어가는 성적 쾌감의 역치를 견뎌가며 살아갈 이유 또한 없다. 기술은 우리에게 꾸준히 강도 높은 쾌락을 선사할 것이라며 호객한다.

 

  반면, 기술의 야만성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커져간다. 딥 페이크에 의한 영상 조작 및 배포, 릴스나 틱톡을 경유한 유쾌하고 문제 ‘없는’ 포르노의 확산, 피싱을 통해 수렵한 이미지를 이용한 협박과 폭로, 조리돌림과 영원한 박제가 문제시된다. 특히 n번방 사건은 이미지의 포획을 실제 신체와 삶의 포획으로까지 연결함으로써 오늘날 인간 실존이 그가 생산한 이미지의 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을 가장 추악한 형태로 증명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술 없이는 살 수 없는 매우 위태로운 상태가 되었다. 가학적인 기술에 무분별하게 노출된다 하더라도 이는 ‘일부의 문제’처럼 다뤄진다.

 

  그렇다고 해서 유기체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철부지의 글이라 여기지 않기를. 통제 불가라는 점에서 기술도 자연이 된 지 오래이다. 스마트폰은 신체와 24시간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외부-장기이고, 고절한 스님의 진신사리는 플라스틱 스텐트로 대체되었다. 간단한 치과 시술을 통해 보철했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인류는 이미 사이보그이며, 인공장기를 이식받아 살아가는 삶이 시작된 이상 장기는 장비이다. 무엇보다 별의 운명은 버튼 조작으로 판가름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미래는 메카닉 오퍼레이터가 난무하는 사이버펑크와 각종 에콜로지스트들의 타협과 투쟁을 통한 어딘가에 좌초하게 되는 걸까? 정확히는 모르지만, 끝장이 나던가 끝내야 하는 때가 올 것만 같다.

 

  한편 저 위의 가정은 여전히 남성성을 유혹의 주체, 여성성을 유혹의 대상으로 가정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는 생태계에서 수컷이 구애의 주체이며 암컷은 수컷을 ‘선택’할 뿐이라는 관점의 인간적 오류가 맞다. 암컷이 가진 배우자 선택의 ‘자율성’은 남성이 여성에 대해 상상하고 있는 전적인 편견에 대한 자연과의 동일시이다. 자연은 훨씬 풍부한 성차를 가지고 있다. 해마는 수컷이 알을 낳고, 갈매기는 레즈비언 부부로 살아가며, 먼저 성기를 찌르는 녀석이 수컷이 되는 종도 있다. 어떤 물고기는 자라면서 수컷이 되며 아침엔 수컷이 되어 꽃가루를 만들다가 밤엔 성별이 변하는 꽃도 있다. 그렇기에 여성이란 상상적인 범주이다.

 

  따라서 남성기와 여성기를 단 모두를 ‘수용적’이라는 측면에서 여성으로 놓는 일은 수동성과는 다르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인종도, 계급도, 동성애자도 역사의 산물이라면 기술이 남성으로, 기존의 남성과 여성이 여성으로 재구성되는 일에 어떤 모순이 있을까? 다른 방식의 상상도 가능하다. 보드리야르의 주장대로 사회가 전적으로 코드화 되었고, 그중에서 화폐가 모든 상품을 연결하는 마스터코드라면 화폐(를 소유한 자)를 남성이라 부를 수도 있다. 소비를 통해서 자신을 재현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라면 재현의 여부는 화폐에 달려 있고, 빈곤한 자는 모두 여성이라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술과 자본이 꾸준한 공모 관계에 있는 만큼, 우리는 여성의 범주에 관한 폭넓은 상상을 통해서 더 급진적으로 연대할 수 있다.

 

  ‘기술’이라는 문화적 측면뿐 아니라 ‘기계’라는 경제의 측면에서도 문제는 두드러진다. 노동자가 먹고살기 위해 만든 기계가 노동자의 일자리를 뺏어간다는 역설은 아직까지 철폐되지 못했다. 여성 또한 산업예비군이 되고 맞벌이가 보편화되면서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감소하기 시작했다.(사실 무엇이 먼저인지는 잘 모르겠다.) 좁다란 취업문, 적은 임금, 실직의 위험, 사회안전망의 불안은 남녀를 막론하고 마주하게 되는 현실이다. 그렇기에 성기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여성적 문제의 조명을 요구한다. 꽤나 도발적인 제목을 여기서 해명할까 싶다. 성기를 통해 일어나는 문제들과 그것에 관한 논의들의 중요성은 결코 얄팍하지 않다. 그러나 여성 범주가 여성기에 한정된다면, 가능한 다른 모든 여성성의 논의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낸다는 점에서 그것은 얄팍해진다.

 

  아마 도나 해러웨이를 비롯해 포스트모더니즘에 동조하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분류에 공을 들이는 내가 여전히 서구-백인-로고스-부르주아-팔루스중심주의적 문제설정 안에서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도나 해러웨이를 비롯해 모두가 범하는 실수 역시 바로 이 부분이다. 왜? 왜 문제를 명료하게 식별하는 역능을 서구, 백인, 로고스, 부르주아, 팔루스적인 것이라고 윽박지르면서 넘겨주는가? 도나 해러웨이가 네트워킹 대신 주요한 전략으로 강조한 엮기weaving는 그러한 식별 없이 가능한 실천의 형태일까? 이분이 되었던 삼분이 되었던 식별은 투쟁에 있어 꾸준히 요구되는 능력이다. 하다못해 그런 식별의 부재로 인해 생물학적 남성만을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하는 오류만은 피하고 싶다.

 

  작업노트에서 작가는 여성이자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문제에 대해서 사유하며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여성이라는 문제는 단순히 여성의 측면에서, 아니면 노동자의 측면에서 고민되는 걸론 부족하다. 여성 더하기 노동자로도 부족하다. 존 데밀리오처럼 젠더를 역사와 사회 안에서 고민하고 극복하려면 여성에 노동자를 곱해서 고민해야 한다. 여성이라는 난제를 풀기 위한 단서는 바로 이 곱셈의 사유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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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황희선 옮김, 책세상(2019), 4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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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milio, J. Capitalism and gay identity.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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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00910/1028757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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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자살사망자자살 사망자 수는 13,799명으로 전년 대비 129명(0.9%) 증가하였고, 1일 평균 자살 사망자 수는 37.8명입니다. 자살률(인구 10만 명당)은 26.9명으로 전년 대비 0.2명(0.9%) 증가하였습니다. 성별 자살률을 살펴보면 남자는 38.0명(-1.4%)으로 전년도 보다전년도보다 감소하였고, 여자는 15.8명(6.7%)으로 전년도 보다 증가하였습니다. 남녀 간 자살률 성비는 10대가 0.9배로 가장 낮았으며, 60대가 3.9배로 가장 높게 나타났습니다. (출처 : https://spckorea-stat.or.kr/korea01.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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