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먹고 기도하라, 때늦은 보수적-낭만적 편지로서 비평

  매우 고통스러운 꿈을 떠올려보자. 나는 출구가 없는 곳에서 뛰고, 또 뛰다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휘말려 끊임없이 가라앉는다. 그 꿈이란 우리 삶에서 우리를 추락시키는 일련의 사건 속에 틀어박혀 있는 것에 가깝다. 그러한 문제적인 삶이란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로 빼곡한 악몽이다. 검은 개들은 꼬리를 흔들며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우울은 퇴치되지 않는다. 온갖 증오 어린 말들이 나를 가격하고, 나는 인생에 배신감을 느낀다. 종국에는 나는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최종 해결책인 것처럼, 냉정히 말하자면, 행정적인 문제들의 연속을 해결하지 못한 채 연거푸 미끄러지는 인생은 현실의 냉혹함을, 즉 나의 외부에서 나를 압박하는 일종의 운명을 증거 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실재의 폭력을 증명하는 작고 하찮은 사례다. 내가 던지는 수천수만 번의 주사위는 그러한 운명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게임이다. ‘4,9,5,3,2’ 무작위적인 숫자가 몇 번이나 겹쳐서 나온다고 해서, 그러한 우연의 배열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살아있다. 죽지 않는다. 세계가 무의미하다 해도, 내가 어떤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역겨운 말들이, 무수한 치욕과 수치심이 나를 향해 있다 해도, 끝끝내 나는 죽음을 선택하지 못한 채로, 아둔하게 서 있다. 벤야민이 말한 대로 정확하지 않지만, 나는 이제 정확하게 인용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아마 삶이 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파괴할 가치가 없기 때문일 터다. 많은 이들이 평균적 인생에서 벗어난 궤적을 그리는 것을 낭만적인 모습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정규분포에서 벗어난 삶이 모두 기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텐데 내가 한때 영화관에서 본 독신 기계들은, 혹은 다네가 자기 비하적인 멸칭으로 불렀듯, 영화관의 쥐새끼들은 정규분포의 바깥에 있지만, 기적이라기보다는 어떤 퇴행에 가까운 증거였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어디든지 쌓여있다. 우회하거나 해결하지 못하지, 그들은 나약하므로.

 

 

모두들 각자의 꿈을 꾸지만 꿈은 문제를 만들 뿐이다.

 

  그들, 영화관에서 기어 나오곤 하는 우리들은 정규분포에 걸맞는 평균적 삶을 살기보다는, 그보다는 좀 이르게, 조금은 늦게 삶의 통과의례를 수행하곤 했다. 스핑크스의 퀴즈처럼, 아침에 네발로 저녁에 두발로 걷는 짐승? 사람. 하지만 그들은 사람보다 늦게까지 네발로 걸었고, 아침이 오래 지속됐다. 그들은 생애에서 한 명의 성인으로서 수행해야 하는 보통의 통과의례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신발끈도 제대로 못 묶거나 바느질에도 미숙했고, 걷는 것도 기우뚱했다. 통과의례에 너무 늦게 참여한, 그들은 여느 실패자들이 그렇듯, 사랑하는 것보다 증오하는 것들이 많았다. 멋지려고 안달 난 사람들, 정말이지 치장과 성공에 집착하는 이들, 예쁘지만 쓰레기 같은 말들, 성찰이라는 착각, 소비주의 문화. 이 모든 것이 실패의 증표였다. 실패란 실재가 가하는 폭력과 우연처럼 배열되는 인생의 결과였고, 이곳에서 쓰러지면 보이는 무저갱이었다.

 

  그럼 우리는 이러한 고통과 어떻게 싸워야 할까? 죽음이라는 무한에 자신을 내던질 수 없는 노릇이니, 이에 대한 대항책을 만들게 된다. 야콥 타우베스는 로렌츠바이크의 말을 빌려 종교적 의례가 죽음을 밀어낼 수 있다고, 그것이 무한에 맞먹는 영원성을 우리 삶에 도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인용한 로렌츠바이크의 글은 아래와 같다.

 

“그러므로 한갓 유대교적 현존이 영혼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개개인의 삶 속에서 치러지는 결혼을 통해서이다. 유대인의 마음의 방은 집과 같다. 그리고 죽음만큼 강한 무언가를 창조 안에서 일깨우는 계시가 죽음에 대해서, 창조 전체에 대해서 새로운 창조를, 영혼을, 삶 속에 있는 초현세적인 것을 맞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랑은 신부 휘장 아래에서 결혼 예복으로서의 수의를 입고서 죽음에 전쟁을 선포한다. 영원한 민족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에,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즉 뿌리. 뿌리내리는 것.

 

  우리를 뿌리내리게 하는 영원의 깃발은, 공동체에, 공동체 성원임을 표시하는 의례에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민족주의의 형식을 사랑한다. 적어도 민족은 나를 뿌리내리게 한다. 내가 맞닥트린 온갖 불안과 공포를 달래준다. 그러면 세계주의자들이 입을 삐쭉거리며 ‘자유!’의 형식을 수호하려 하겠지만, 시장과 법은 몽둥이와 죽창을 든 민족주의자를 막지 못할 것이다. 나는 항상 자유지상주의자를 꿈꿨지만, 한국에서 내가 그들에게 다가갈 때마다 미제스와 하이에크는 눈 감은 시체로 변했다. 공동체와 역사, 전통이라는 과거가 나를 뿌리내리게 할 때, 자유는 나를 끝없이 펼쳐지는 선택들의 난장 속으로 표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무엇보다 무한으로부터 나를 구해줄 수 있는 공동체는 간절했다. 하지만 사회의 변두리에서 이미지에 매혹된 채로 영화라는 이미지의 연속체를 방황된 이들은 어떤 의례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유년기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된 영화관의 쥐새끼들은 이러한 공동체에 속하기는커녕, 사회의 변경, 변두리, 가장자리를 돌아다녔다. 다만, 그들이 스크린에 투영하는 정념과 정념이 현상되는 스크린의 장소성은 그들이 숨어들 공간을 제공했다. 이제 극장이라는 공동체가 있으니, 스크린이라는 장소를 통해 그들 자신 나름대로의 통과의례를 창조해야만 했다. ‘그들은 반쯤 죽었다.’ 반쯤 죽은, 절반 정도는 죽어버린 이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방식.

 

 

죽음에서 도피하는 생명의 궤적 자체를 삶이라 한다면…

 

  나는 리스트에 중독되다시피 했다. 매년 매체에서 발표되는 모든 리스트를 살펴보고, 리스트에 담긴 고유명사들을 강박적으로 확인했다. 리스트는 거울의 일종이다.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얼굴을 확인하고, 치장하고. 물론 여기서 거울은 언제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아감벤이 <내용 없는 인간>에서 말하듯, 타자로서, 타자의 창조물로 자신의 내면을 채우는 취향의 인간. 영화관의 쥐새끼들에겐 내 얼굴과 내 생각을, 내 마음을 구성하는 행위이므로 리스트를 만드는 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들이 영화에 내기를 건다고 떠들면서, “이 영화는 다음 10년을 책임질 걸작이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기해보자. 이는 어느 정도 과장과 허풍이 섞여 있긴 하지만, 얼마간은 진실이기도 하다. 공허한 내면을 채우는 폭력으로서 미적 체험에 그들은 중독됐으므로. 이를테면 러브크래프트를 다루는 우엘벡의 말처럼, “인생을 사랑하면 책을 읽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관에 가는 사람도 거의 없다. 즉, 예술 세계에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다. 러브크래프트는 다소 문제적인 인간이었다.”

 

  그러한 문제적 삶은 오롯이 도피처로서 예술적 체험에 관심 있었다. 도피처에 옹기종기 모인 쥐새끼들은, 어떤 영화가 더 훌륭한 영화인지, 어떤 영화는 쓰레기인지를 따지며, 자신의 내면을 구성했다. 리스트 이후의 삶이란 불가능했는데, 그들에게 정상적 삶과 현실의 냉혹함으로 돌아가든지, 혹은 영원한 유년기 속에서 휴가를 즐기든지, 양자택일의 선택지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과 영원한 휴가의 간극은 오로지 그의 사적인 삶에 존재하는 연약한 임시 칸막이로써만 기능할 뿐이지, 전체 인생의 비율로 보자면, 이 둘은 칵테일처럼 뒤섞여 있었다. 이 둘은 혼합된 화학적 관계지, 물리적으로 양분된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이 둘을 나누려 애썼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이러한 현실과 휴가 간의 연금술적 관계는 취향의 인간을 고통으로 밀어 넣고는 했다. 현실은 휴가이며, 휴가는 현실이므로. 이 양자 사이에 있는 분할보다 중요한 건 이들을 오가는 취향의 인간의 마음이었다. 어떤 예술을 통과하면, 어떤 리스트를 써 내려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가? 그러한 순간이 냉혹한 현실에서 발생하는 사건만큼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좌파라면 아니요.

 

  우파라면 그럴 수도.

 

  다만 그들은 예술작품이 인생에서 가져다 오는 단절이 그만큼 고통스럽고 폭력적이라 말해야 했다. 그들이 이루는 공동체는 예술작품이 인생에 초래하는 폭력적인 단절로 이뤄지는 것이니 말이다.

 

  다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로 산적한 악몽 속에 갇혀 있는 그들은, 현실 바깥으로 달아나려고 노력한다. 요점은 여기서 현실의 바깥이란 무엇인가?다. 이는 종교의 초월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 더 복잡한 양상, 현실의 바깥이지만, 언제나 현실을 질료로 삼은 예술. 그것은 추상적 모더니즘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추레한 현실과 추잡한 상상을 제재로 삼은 종교였다. 즉 여기서 초월성이란 없고, 온전히 내재성의 파편들로 이뤄져 있다. 그들은 초월성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은 성당 내의 배석자는 아니다. 살덩이와 욕망, 피, 농담, 공포, 불안한 의식, 전율, 혼돈, 거짓말로 이뤄진 이미지의 정념들로 자신을 방어한다. 그들이 죽음과 싸우는 방식. 죽음에 반대하는 방식이란 눈으로 이미지를 먹고, 의식으로 이미지를 소화하고, 이미지를 배설하는 것이다. 추잡한 영혼이 소멸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