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 Sorry But I Love You

* 글은 영화 <소년시절의 > 강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극장에서 영화 <소년시절의 너>를 보던 중이었다.

 

<소년시절의 너>(2020), 증국상, 일부 장면.

 

  뜬금없이 빅뱅의 <거짓말> 뮤직비디오가[1] 떠올랐다.

 

  <거짓말> 뮤직비디오는 그야말로 한 편의 영화 같다. 이 작품은 주인공(권지용)이 도망치다가 어느 여자와 전화를 한 뒤 체포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 여자가 일상적인 일을 하는 중간중간 흑백 장면이 교차되며 사건의 내막이 드러난다. 여자는 어떤 남자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반격하다가 그를 죽이고 마는데, 주인공이 여자를 찾아왔을 때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다. 주인공은 여자를 밖으로 내보내고 제 몸에 피를 묻혀서 대신 범죄를 뒤집어쓴다.

 

  <소년시절의 너>의 서사는 <거짓말>보다 길고 복잡하지만 핵심적인 인물과 사건 구도는 비슷하다. 가난한 집안의 똑똑한 첸니엔(주동우)는 학교에서 웨이라이(주이) 무리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한다. 대학 입시만 생각하며 버티던 첸니엔은 하굣길에 양아치 소년 샤오베이(이양천새)를 구해주는데, 샤오베이는 무능한 경찰과 다르게 첸니엔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준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에서 둘은 상처를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마침내 대학입학시험 당일, 웨이라이의 시신이 발견된다. 웨이라이는 첸니엔에게 자기가 저지른 폭력을 신고하지 말라고 매달리다가 과실치사로 죽은 것이었다. 첸니엔이 유력 용의자가 된 상황에서 샤오베이는 자기가 대신 체포당하여 사건을 수습하기로 한다. 그는 예전에 경찰로부터 잘못된 강간 혐의로 조사받은 적도 있었으니, 이참에 자신이 웨이라이를 강간하려다 죽였다고 거짓 자백을 할 작정이다. 이 계획을 첸니엔에게 모두 밝히는 샤오베이는 사랑하는 여자가 문제의 죽음뿐 아니라 범죄자인 자신과도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경찰 앞에서 첸니엔을 덮친다.

 

  <거짓말>과 <소년시절의 너>의 주인공은 겉보기에 ‘양아치’일지 몰라도 알고 보면 사랑에 삶을 바치는 순정파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자를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세상은 사랑꾼의 외양이나 사건의 표면만 읽고서 사실을 판단하겠지만, 둘의 이야기를 쫓아온 관객은 더 고귀한 진실을 알고 있다. 사회의 무정과 비극적 운명을 감내하는 연인의 사연은 비밀스러워 더욱 아름답다.[2]

 

  십여 년 전 <거짓말>이 나왔을 때 친구는 연신 내게 뮤직비디오를 보여주었다. 그는 이 영상을 볼 때마다 감동하여 운다고 했다. 나도 울고 싶었다. 눈물이 고여 시야가 흐렸더라면 빅뱅이 영어를 섞은 힙합 버전 세레나데를 부르며 그래피티가 그려진 할렘가 풍의 거리를 달뜨게 걷고 가격을 달러로 표기하는 마트 안을 활보하는 걸 보다가 약 2분 4초경 왼쪽 첫 번째 마트 기둥에 부착된 한국어 ‘건어물’ 코너 간판을 발견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거짓말>(2007), 빅뱅, 한 장면.

 

  건어물. <거짓말>을 회상하는 사이, 극장 스크린에선 샤오베이가 억지로 첸니엔을 때리고, “살고 싶으면 닥쳐”라고 외치고 있었다. 건어물.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한 관객이 우는 듯했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절절한 이야기에 울기는커녕 몰입도 못 하고 있다. 건어물. <거짓말>에서 구석에 잠시 등장한 세 글자처럼 나를 튕겨내는 것들은 별 게 아니다. <소년시절의 너>가 <거짓말>과 겹쳐진 순간 또한 아주 짧은 인서트 숏이었다. 그것은 샤오베이가 첸니엔을 덮친 후 경찰이 샤오베이를 잡으러 오는 순간 아주 잠깐 지나가는 물웅덩이의 풍경이다.

 

<소년시절의 너>(2020), 증국상, 한 장면.

 

  갑자기 작품에서 멀리 떨어져 멀미라도 난 것일까. 어지럽다 못해 메스꺼웠다. 신체적인 거부 반응를 진단하고 싶어 무작정 건어물과 물웅덩이 장면을 분석해 보았다. 모두 작품의 핵심적인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미지였다. 그럼에도 두 화면은 내가 픽션에 몰입하는 걸 방해하는 수준을 넘어 작품의 바깥으로 끌어냈다. 사소해 보이는 이미지에 부여된 힘의 출처를 알려거든, 장면이 포함된 작품 전체를 살피는 수밖에 없었다.

 

사랑해서 행하는 거짓말

 

  <거짓말>과 <소년시절의 너>의 로맨스는 어쩐지 들어본 것 같다. 몹시 익숙한 한편 현실에서 흔한 사연이라고는 믿기 어렵다. 이미 비슷한 이야기가 실화가 아니라 영화와 소설을 비롯한 다수의 픽션으로 알려졌고 기억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진가를 몰라주는 비극적 애정담은 전래 동화에서 현대의 웹소설에 이르기까지 끊인 적이 없었다. 공주가 저주에 걸린 왕자를 알아보듯이, 현대의 모범생은 싸움짱 일진의 순수한 마음을 알아본다. 사랑 밖엔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는 듯이 죽음을 택하는 로미오와 베르테르, 사랑에 온갖 부를 바치고 누명마저 쓰는 개츠비가 있다. <거짓말>의 “이것밖에 안 되는” 주인공과 <소년시절의 너>에서 “아무것도 없고, 멍청하고, 돈도 없고, 미래도 없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결말”을 주겠다는 샤오베이 또한 자기희생에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아마 <거짓말>, <소년시절의 너>와 유사한 픽션이 앞으로도 셀 수 없이 나올지언정 헌신적 사랑의 가치가 식을 일은 없을 것이다. 표현의 독창성에서 차이가 날 수는 있어도, 어느 이야기나 인물의 원형적 구도가 특정 시대와 관계없이 보편적인 것을 두고 상투적이라 하기는 어렵다.

 

  로맨스의 판타지스러운 면이 비위에 거슬렸던 걸까. 두 작품의 사랑은 한 폭의 그림처럼 모든 것이 아귀가 맞도록 짜여 있는 만큼 한편으로는 그저 꿈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공상적인 면을 비난한다 한들 픽션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비현실성이 픽션의 연료이기도 하니까. 현실을 괄호 안에 넣었을 때 더 잘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현실을 잊는다거나 탈출한다는 표현이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의 홍보 문구와 자주 어울리듯이 지어낸 이야기, 즉 픽션은 현실을 일시적 유보 상태에 놓는 데 능하다. 픽션의 감상자는 대개 그것이 인공적 결과물임을 아는 채로 서사에 진입한다. 이야기 속 인물들의 삶은 그야말로 현실이 아닌 딴 세상에 사는 남의 일일진대, 관객은 그 안으로 실컷 빠져들어 최악과 최상을 상상하고 간접 경험할 수 있다. 이로써 픽션은 평소엔 느끼기 어려운 극적인 감정이나 감상을 취하기에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살인마, 귀신, 바이러스가 인류 전체를 몰살하여도 픽션은 보는 이를 안전하게 지킬 것이다. 관객 자신은 낡아가는 몸과 병원비에 시달리면서도, 불멸의 존재가 수천 년 동안 지키는 사랑 이야기에 마음껏 감동할 수 있을 테다.

 

  요컨대 픽션은 이야기로 빚어진 테마파크인 셈이다. 픽션 속 세상과 인물은 각 작품에 걸맞게 제작되고 가공된다. 어차피 진짜가 아닌 것을 지어내는 김에 기왕이면 보기 좋게 만드는 게 낫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무시무시한 자연 재난이 절경처럼 스펙타클하게 나오거나 평범하다는 주인공이 절세미인으로 묘사되어도 허용을 받곤 한다.

 

  <거짓말>의 픽션에서 주인공-빅뱅은 마땅히 멋있어야 한다. 영상이 뮤직비디오라는 점을 알고 보기 시작하면 빅뱅의 튀는 차림새가 그 안에서 무척 자연스럽게 보일 것이다. 뜬금없이 스포츠카에 뛰어들거나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다녀도 괜찮은 것은 그게 폼나기 때문이다. 무능력한 경찰 또한 빅뱅을 빛내 줄 아군이 된다. 경찰이 살인 사건을 허술하게 수사함으로써, 주인공은 근사하게 자발적으로 체포당할 수 있다. 빅뱅이 거니는 공간 역시 이미지 형성에서 핵심적인 임무를 맡는다. 이 뮤직비디오가 특별히 택한 공간의 멋스러움은 국내에서 영미권의 영화, 드라마와 같은 매체를 통해 외국 같다고 인식되는 이미지였던 것 같다. 처음에 주인공이 잡았던 공중전화에는 한국어로 된 버튼이 있었건만 어느새 벽돌과 콘크리트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거리에 영어로 된 표지판이 세워진 게 보인다. 어느 국가에서나 비슷한 구조인 대형 마트 또한 달러로 된 가격표를 크게 달아놓았다. 뮤직비디오의 주 감상자는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었을 테지만, 빅뱅의 로맨스는 그들이 사는 현실에서 멀어지길 택한다. 특별한 것만 모아놓은 꿈처럼 고결해지기 위해서다.

 

  <소년시절의 너>도 미감이 야심 찬 픽션이다. 이 작품 또한 풍부한 화면과 소리를 통해 주인공 커플을 이상적인 선남선녀로 그린다. 얕은 심도로 찍혀 더욱 집중되는 배우의 얼굴, 어두운 도로의 화려한 불빛 등 눈을 떼기 어려운 이미지가 동적인 카메라와 편집으로 쏟아진다. 영화 속에서 중요하게 제시되는 ‘시궁창 안에서도 별을 볼 수 있다’라는 격언처럼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첸니엔과 샤오베이는 빛이 난다.

 

  다만 현실에서 멀어지려는 <거짓말>과 달리 <소년시절의 너>는 현실에 가까워지려 한다. 영화는 검은 화면에 뜨는 텍스트로 시작한다. “학교 폭력은 바로 여러분 곁에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가 그 고통을 이겨내는 사람에게 힘이 되길,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을 주기 바랍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주인공들의 뒷이야기와 중국 정부의 학교 폭력 관련 정책이 텍스트로 설명된다. 텍스트를 출입문처럼 쓰는 방식이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며 들어가는 논픽션이나 실화 기반 영화를 연상케 하지만, <소년시절의 너>는 사실 전달보다도 픽션의 의도를 짚기 위해 텍스트를 쓰고 있다. 이마저도 충분하지 않았는지 영화는 학생들의 사진을 포함한 엔딩크레딧이 끝난 이후 학교 폭력을 함께 근절하자는 배우의 영상 편지를 넣어 한 번 더 주제를 강조한다. 얼핏 공익 광고로 보이기까지 하는 시도들에 어디까지 감독의 동의가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3] 어찌 되었건 이러한 형식 때문인지, 비슷한 학구열을 앓는 사회 때문인지는 몰라도 국내에서는 이 영화가 실화 기반이라는 말이 돌았다. 그러나 증국상 감독은 구월희(Jiu Yuexi)의 소설 <소년적니, 여차미려(少年的你,如此美丽)>을 영화화했다고 분명히 밝혔다. 2010년대 중국에서 학교 폭력 사건이 많았다는 것 외에 첸니엔과 샤오베이의 이야기가 실재한다는 공식 보도는 찾을 수 없었다.[4]

 

  첸니엔과 샤오베이의 ‘영화 같은' 사랑이 ‘감동 실화’가 아니라서 실망스러운가? 그렇지만 <소년시절의 너>는 현실에 큰 파동을 일으켰다. 영화는 중국 정부의 압박을 무릅쓰고 개봉한 지 5일 만에 흥행 수익으로 1400억을 벌더니 홍콩 금상장에서 8개 부문을 수상하며 그해의 독보적인 영화가 되었다. 영화의 성공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중국 사회 문제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실질적인 개선의 움직임을 끌어내고 있다고 한다.[5] 영화의 영향력이 픽션의 경계를 넘은 셈이다. 비슷한 사례는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2011년 개봉한 <도가니>는 광주인화학교의 성폭행 사건을 다룬 공지영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가 개봉한 뒤 경찰이 사건을 전면 재수사를 시작하였고, 장애인 성폭력 처벌 조항이 개정되었다. 관련법이 ‘도가니법’이라 널리 알려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영화가 일으킨 국민적 공분은 대단하였다. <도가니>는 소설과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실화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소년시절의 너>와 다르지만,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어느 경우든 간에 언론이 해내지 못했던 일을 픽션이 성취했다는 것이다. 픽션은 현실에서 보고 싶은 것 외에도 보기 싫지만 봐야 하는 것까지 제시할 수 있다. <거짓말>과 <소년시절의 너>의 결정적인 차이는 여기서 나온다. 두 로맨스 모두 낭만적인 윤색을 거쳤음에도, 전자에 비하면 후자의 로맨스는 학교 폭력 문제를 지적하기 위한 지름길처럼 보일만큼 현실에 가까워지려 한다.

 

  <거짓말>의 픽션은 환상적인 로맨스를 만들기 위해 현실로부터 먼 이미지를 유지한다. 그런데 건어물이 속된 말로 ‘깼다.’ 건어물은 멋있지 않을뿐더러 현실의 시공간과 지나치게 가까웠다. 달러 마크를 으스대던 대형 마트는 건어물 때문에 순식간에 흔하디흔한 일반적인 장소로 격하되고 말았다. 영상 속 마트의 위치를 여전히 답할 수 없을지라도, 건어물 때문에 빅뱅이 있는 세상이 어디인지 새삼 의아했다면 이미 모종의 소격효과가 일어난 결과다. 속계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건어물은 <거짓말>의 픽션이 쫓던 고상함과 부조화를 일으킨다.

 

  <거짓말>의 건어물을 떠올리게 했던 <소년시절의 너>의 물웅덩이 숏으로 돌아가 보자. 연인이 비참하게 이별을 맞이하기 직전, 카메라는 관객의 시야에서 둘을 지워내고 잠깐 공간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 숏이 그들의 운명에 대한 궁금증과 불안감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삽입된 것이었다면 꼭 물웅덩이를 비추지 않았어도 같은 효과가 났을 거다. 물웅덩이는 추가적인 정보를 주지 않고 사건 진행에 필수적이지도 않다. 다만 아름다울 뿐이다. 급박한 순간에 잉여적인 이미지가 들어가는 게 웬 말인가 싶지만, 아른거리는 빛을 품은 물웅덩이는 격정적으로 움직이는 카메라와 극적인 상황의 맥락 안에서 서정적인 느낌을 획득한다. <거짓말>에서 빅뱅의 로맨스에 몽상적인 빛을 더한 이국적인 공간의 분위기처럼. 이 숏의 소격 효과는 현실 비판적 주제나 형식과의 부조화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과한 조화로움이 원인이 됐다. 물웅덩이는 연인의 파국마저 예쁘게 표현하려는 정성의 결정적인 증거로 보였다.

 

  꾸밈음은 반드시 꾸밈의 대상을 갖기 마련이다. 건어물과 물웅덩이는 두 작품이 픽션이라는 사실, 픽션이기에 어떤 장식을 쓰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 과연 무엇이 장식을 받아 미화되느냐는 물음이 따라왔다. <거짓말> 뮤직비디오가 남긴 건 감동보다도 사회 통념에 관한 인지였다. 건어물의 부적절함은 역으로 뮤직비디오가 빅뱅을 광내기 위해 어떤 기술을 써왔는지, 일반적으로 어떠한 스타일이 멋있다고 여겨지는지 내비쳤다. 마찬가지로 <소년시절의 너>의 물웅덩이는 영화 전체 주제에 맞춰 주인공의 사랑을 찬미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샤오베이의 헌신, 강간범을 모방하여 첸니엔을 범하려는 흉내를 긍정하였다.

 

  샤오베이의 거짓말이 면죄부를 받을 만한 것이냐 하면, 그렇다! 라고 픽션은 단언하는 것 같다. 물웅덩이 이전에 픽션이 내린 핵심적인 결정들이 이미 샤오베이의 행동을 범죄가 아니라 연극으로만 보게끔 한다. 카메라는 샤오베이에게 깔린 첸니엔의 얼굴을 화면 상 하단에 두지 않고 화면 상 옆을 보게 각도를 맞추었다. 여기에 샤오베이의 어깨까지 걸쳐 찍으니 두 사람이 마치 서거나 앉아서 수평적인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 반해 샤오베이를 비추는 숏은 첸니엔의 어깨가 화면에 나오지 않게 하고 샤오베이의 얼굴이 첸니엔보다 가득 담기도록 했다. 샤오베이가 단독 연설을 하는 사람처럼 묘사되니 그의 주장에는 시각적 힘이 실린다. 나아가 물웅덩이가 장식이라는 걸 한 번 더 짚고 싶다. 샤오베이의 설득과 첸니엔의 마지못한 끄덕임에서 그치지 않고, 영화는 풍경 이미지를 가져와 연인에게 두른다. 욕지기는 여기서 일어났다. 작품이 로맨스에 뿌리는 슈거 파우더 중에 풍경은 물론이고 폭력과 강간 사건이 포함된 것은 아닌가. 영화가 강조하는 것이 학교 폭력 문제보다도 학교 폭력을 배경으로 피어난 말초적인 로맨스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불쾌한 의심과 함께 <소년시절의 너>가 이룬 성취가 생각났다. 사회 고발적 픽션이 현실에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고자 한다면, 자극적인 이야기를 미끼로 삼아 주목을 얻는 편이 되려 윤리적인 전략일지 모른다. 선의와 결과가 항상 일치하지만은 않으니까. 이런 합리화는 극장에서 문제의 물웅덩이 장면을 보았을 때 진작에 떠올렸던 것이다.

 

<소년시절의 너>(2020), 증국상, 일부 장면.

 

  마침내 경찰이 쳐들어온 순간, 궁지에 몰린 둘은 각 인물의 일인칭 시점숏으로 찍혀있다. 그러다 보니 서로를 향하는 시선은 관객에게 호소하는 듯 스크린 밖을 향한다. 자신들이 겪는 참사를 이해해 보라는 듯이, 사변에만 빠져있지 말고 픽션 안으로 돌아오라 재촉하듯이. 나는 얼른 의심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픽션의 선택을 정당화하고 이들의 이야기에 얼른 동참하고 싶었다. 객석에 편히 앉아 첸니엔과 샤오베이의 얼굴을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사랑해서 밝히는 거짓말

 

  증국상 감독은 얼굴에서 드문 에너지를 끌어내는 귀재다. 그의 감독 데뷔작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만 봐도 얼굴을 활용하는 연출력이 돋보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게 남은 이미지는 주인공 안생(주동우)과 가명(이정빈)의 눈만 비추는 익스트림 클로즈업 숏이었다. 조용히 상대를 바라보는 눈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이미 큰 사건이 되어 인물들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음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차기작 <소년시절의 너>에서도 인물들이 얼굴로 대화하는 순간이 있다. 첸니엔과 샤오베이가 면회를 할 때 둘은 대사 없이 웃기만 한다. 그런데도 풍부한 표정이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이때 유리창에는 두 사람의 얼굴이 겹쳐져 있다. 감독은 <소년시절의 너> 인터뷰에서 클로즈업을 자주 쓰는 게 자신의 “영화적 스타일”이라고 밝혔다. 또 유년기의 미묘한 감정을 포착하기 위해 주인공 이외에 단역들의 얼굴까지 클로즈업으로 잡았다고 한다.[6]

 

  과연, <소년시절의 너>에서 잊히지 않는 얼굴은 주인공뿐만이 아니다. 유리창에 반사되는 얼굴이 또 있다.

 

<소년시절의 너>(2020), 증국상, 일부 장면.

 

  강간 (미수) 사건 피해자의 얼굴이다. 위기에 처한 첸니엔과 샤오베이의 얼굴은 내가 다시 이야기에 몰입하도록 했지만, 이 단역들처럼 뚜렷하게 남아 글까지 쓰게 만들지는 못했다. 주인공 커플이 면회할 때 카메라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비추는 유리의 양면을 넘나든다. 반면에 강간범을 찾으려는 학생들은 유리의 한 쪽에서 비친 모습으로 나타나 유리 너머를 속절없이 살피다가 이내 사라지고 만다. 어떤 무대 장식도 받지 못하고 스스로 배경이 되는 얼굴들. 이 학생들 또한 주제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극적인 효과를 위해 소개된 것인가? 이들의 얼굴은 물웅덩이처럼 스치는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한가?

 

  하지만 픽션이 현실에게 제시하는 것은 언제나 한 줄의 명대사, 한 장의 스틸컷 이상이다. 비극적 로맨스의 고전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출간 당시 많은 청년이 주인공과 같이 파란 연미복과 노란 조끼를 입게 했다고 한다. 이 현상은 단지 특정 색깔의 복장이 유행했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훗날 이 소설로부터 모방 자살을 가리키는 ‘베르테르 효과’의 이름이 비롯되었다. 픽션은 힘이 세다. 당장 샤오베이를 보라. 샤오베이는 사회가 그에게 씌웠던 강간범의 서사를 학습하고서 그것을 재현하고 있지 않나. 샤오베이의 모방 범죄는 곧 이미지를 이용한 심리전이 된다. 그가 첸니엔과 함께 찍은 사진을 지우고 강간범으로서 얼굴을 노출했을 때만 해도 거짓말이 성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샤오베이가 첸니엔과 자신이 함께 찍힌 CCTV 화면 기록은 삭제할 수 없었던 탓에 그의 계획은 무산된다.

 

  픽션을 완성하는 과정은 필시 수많은 강조와 은폐를 동반한다. 선택된 형식 안에서 무엇인가 은밀하게 권해지는 한편 어떤 것은 환영처럼 스러진다. 샤오베이와 첸니엔의 범죄는 후에 처벌받긴 하지만, 픽션은 사회의 법과는 별개로 샤오베이의 행동을 긍정하고 있다. 적어도 시각적으로는 말이다. 샤오베이가 기사, 순교자, 의적과 같은 영웅으로 거듭나는 동안, 한때 그의 장애물이었던 강간 사건은 샤오베이의 무기이자 플롯 진행을 위한 도구로 승화된다. 강간 사건은 이 이상 설명되지 않는 서브 텍스트로 묻힌다. 첸니엔을 구속했던 학교 폭력 문제에 대해 엔딩 크레딧에서까지 힘주어 비판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접근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수고에도 불구하고 학교 폭력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인 첸니엔은 정작 피해자 이미지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모자를 푹 눌러쓴 샤오베이의 실루엣은 스토커에서 보디가드가 되었건만, 첸니엔은 다른 아이를 보호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누군가의 보호를 받는 수준에 그친다. 어쩌면 이 픽션에서 가장 판타지로 남은 것은 첸니엔의 소망이다. 첸니엔은 샤오베이와 함께 대낮에 당당하게 걷고 싶다고 했었다.

 

<소년시절의 너>(2020), 증국상, 한 장면.

 

  새삼 <거짓말>을 처음 보여준 친구의 안부가 궁금하다. 오랜 친구를 다시 보게 된다면 이번엔 내가 그에게 뮤직비디오를 보여주리라. 친구는 지금 영상을 봐도 울 테지만 예전과는 다른 이유로 눈물을 흘릴 것 같다. <거짓말>이 나온 이후 그룹과 관련하여 차마 픽션으로도 보기 어려운 사건들이 많았으니. 어쨌든 나는 건어물을 통해 이 뮤직비디오를 픽션에 관한 픽션으로 즐길 수 있게 됐다. <거짓말>은 거창한 주제로 현실을 흔들겠다는 욕심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마저도 허술한 기교로 인해 스스로 무너진다. 건어물을 무시하고서 진지하게 영상을 보아도 마지막을 장식하는 블루퍼(NG 모음)가 또 분위기를 깬다. 로맨스의 무거움은 픽션 제작 과정의 가벼움 앞에서 자꾸만 무화된다.

 

  어쩌면 건어물이 고도로 계획된 장치일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 본다. 픽션이 의도와 어긋난 윤색을 하느니, 차라리 제 발로 허구성을 드러내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 투입된 씬 스틸러. 건어물은 얼굴 없이도 고백한다. 다 거짓말이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당신을 사랑해서 말하는 거예요.

 


 

[1] https://www.youtube.com/watch?v=2Cv3phvP8Ro 

[2] <소년시절의 > 비밀스러운 사랑은 분리된 공간에 있는 첸니엔과 샤오베이가 마치 함께 있는 것처럼 편집된 장면에서 드러난다. 둘은 공개적으로 말을 해야 하는 취조실에서는 상대를 모른다고 거짓말하는데, 비슷한 화면 구도와 편집으로 인해 마치 같은 공간에서 짜고 말하는 팀처럼 보인다. 결말 부의 교도소로 향하는 안에서는 둘이 다른 버스에 타고 있는데도 밀어를 주고받는다. 편집이 재구성하는 공간 안에서 연인의 신뢰를 알아보고, 보이스오버를 통해 연인의 밀어를 엿들을 있는 관객이 이야기 바깥이라는 특별석에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3] “Inside the Censorship Battle Over Oscar Nominee ‘Better Days’: “It Was a Tug-of-War”,” The Hollywood Reporter, last modified April 18, 2021, https://www.hollywoodreporter.com/movies/movie-news/inside-the-censorship-battle-over-oscar-nominee-better-days-it-was-a-tug-of-war-4165587/.

 

[4] Ibid.

 

[5] "Tears as hit film 'Better Days' shines rare light on China's school bullying problem,” Rappler, last modified Nov 15, 2019, https://www.rappler.com/entertainment/movies/better-days-shines-light-school-bullying-problem-china.

 

[6] “'소년시절의' 증국상감독 - 유년의 본질적인 면을 포착했다,”, 씨네21, 2020 07 08 수정,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57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