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서점 고요서사에서 진행하는 월간 워크숍 《들뢰즈에 대한 것은 아닌》(제5회, E for Enfance)에서 발표한 글을 개정한 것입니다. 또한 본문의 일부 문장은 문예지 『문학과사회 하이픈』 가을호에 게재한「아마추어리즘의 사회, 그리고 예술」과 공유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완결된 목록은 아니다. 엄마, 아빠는 샤워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계속 연습하면 나는 이 목록이나 엄마, 아빠의 도움이 필요 없을 수 있다. 나는 혼자서 샤워하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 (사회성 이야기 158, 캐롤 그레이)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에서 토머스 드 퀸시는 당신의 이해를 벗어나는 지각을 느꼈을 때, 절대로 지각을 쫓으라 권고한다. 『맥베스』에서 왕이 시해당한 뒤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살인에 강렬한 의미를 부여함을 느꼈지만, 그 소리가 왜 그러한 효과를 발휘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권고는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바깥의 것을 긍정하기 위한 태도로 읽히지만, 윗글에서 제시된 또 다른 사례는 내게 ‘문 두드리는 소리’ 같은 기이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원근법이라는 시각 법칙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 원근법을 사용한 그림을 보면, 집들이 전부 가운데로 기울어져 쓰러지고 있다고 지각할 것이고 결국 “바보는 자기 눈에 그런 증거가 보인다는 것조차"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전자에서 지각을 긍정하는 까닭이 그것을 해석해 줄 이해 자체가 없기 때문이라면(비–이해), 후자에서 지각을 부정하는 까닭은 그것이 잘못된 해석을 거치기 때문이다(반–이해). 이 두 가지 사례를 지각과 이해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동일한 판본으로 여기는 퀸시의 입장은, 철학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지겨운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가령 물속에 집어넣은 막대의 휘어짐(플라톤)이나 멀리 보이는 물체가 원형으로 보이는(칸트) 현상을 오류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진리 체계. 퀸시의 사례에서도 우리는 적합하지 못한 이해를 축출하거나 올바른 이해가 도달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무엇이 이해이고 무엇이 지각인가? 지각은 해석을 기다리는 재료 정도로 취급된다. 그리고 지각을 해석한 결과물을 이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나아가 그 해석이 어떤 기준을 벗어나 ‘틀렸을’ 때에는, 잘못된 이해라고 부르기보다 이해가 아닌 것이라고 범주적으로 구분하기도 한다(가령 플라톤은 의견과 억견doxa을 그렇게 구분한다). 이러한 관습적 이해를 반대로 이용해보자. ‘해석의 재료’를 지각이라고 부른다면, 이해는 문자를 통해 이루어지고 지각은 감각에 할당된다는 실체적 정의를 뒤집어 포괄할 수 있다. 즉 감각을 간접적으로 유발할지언정 직접 표상하지 않는 지금 이 문장들 또한, 그것을 해석의 재료로 사용하는 순간 지각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의식에 떠오르는 모든 것은 지각이 될 수 있고, 이렇게 문자 언어가 종속된 담론에서 거리를 갖는 지각은, 그 자체로는 맞거나 틀리다고 말할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지각이 ‘무엇’이라고 판단하는 순간부터 이해의 영역에 들어선다. 이는 문자 언어로 한정할 필요는 없으며, 시각예술을 포함한 창작 활동 일반에 적용할 법하다. A — 이를 안무에서의 몸짓이라 부를 수도 있고 영화의 쇼트, 그림책의 페이지, 혹은 그것 내부의 디테일들로 이해할 수 있다. 에이젠슈테인이 쿨레쇼프식의 물질적 단위인 쇼트를 거부하고 “어트랙션(볼거리)”과 같은 인지적 단위를 영화의 최소 단위로 상정한 것과 같이[1] 이러한 ‘요소에 대한 의식’은 유동적일 수 있다 — 다음에 B가, 즉 의식에 다른 의식이 덧붙는 순간, 소극적으로 말하면 단지 이전의 의식이 기억으로 지속되는 동안, 그 이전의 의식은 (‘판단하지 않음’을 포함하여) 판단된다.
문제는 위 사례의 “원근법”처럼, 지각을 판단하는 방법으로 주어진 하나의 틀이 옳은 이해의 유일한 기준처럼 사용된다는 것이다. “집들이 전부 가운데로 기울어져 쓰러지고 있다”는 지각을 이해로 만들 방법은 없을까. 이 글에서는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이해와 지각이라는 두 계열이 작품이라는 하나의 궤적에서 뒤섞이며 그 자체의 실재성을 획득하고 전개할 가능성을 살핀다. 특정한 지각을 결함이나 오류, 가상이 아니라 별개의 실재로 이해하기 위한 조건들을 나는 ‘아이-되기’에서 참조하고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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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한 사례를 덧붙여보자.
대추야자와 바나나들 아래에서, 라자는 거대한 코끼리를 타고 있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거대하게 자라나고, 피부 가죽이 거대한 바나나를 벗겨내고, 그의 거대한 입술 사이로 과일이 미끄러진다.
이 구절은 1910년 세르게이 고로데츠키Sergei Gorodetsky의 단편 소설 속에서 영화 공연을 다소 풍자적이고 과장되게 묘사한 것이지만, 몽타주 언어의 상태와 그 언어의 문화적 수용 양자를 모두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2]
이 장면을 동시대의 언어로 기술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코끼리를 타고 있는 인물을 미디엄 쇼트로 잡는다.
2. 1번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이는 영화 제작 현장이라는 스크린 바깥의 환경과 지식을 포함하고, 스크린은 시야 자체의 단일하고 실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조작된 시야들이 반영되는 공간임을 전제한다. 이는 원근법으로 그려진 회화에서 작은 사물은 멀리 있다고 이해하는 것, 크기와 거리에 따른 시각의 관계를 지식을 통해 선행적으로 판단하는 것과 같고, 실제로 집들은 나란히 직각으로 이어져 있는데 화면에 보이는 선은 왜 약간 기울어져 있어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과 같다.
이 글의 목적은 그의 얼굴이 진짜 “거대하게 자라나며” 집들이 진짜 “가운데로 무너져 내린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진짜 그렇다"는 일상적 표현의 정동적 힘은 지각을 ‘잘못된 이해’로 분류하기를 막고 순수한 사건으로 잠시동안 존재케 하지만, 그렇게 순간적으로 성립된 지각으로부터 새로운 이해를 만들지는 못한다. 지각은 현실에서 자신을 입증하고 유지할 힘이 없다. “프로그램과 체계가 없다면(gkd)”, 지각의 리얼리티는 주관성이라는 범주로 추락하거나 어떠한 인과나 연결도 없어진 채 ‘보이는 것'의 스펙터클이나 ‘사적인 것’으로 부정당한다. 우리는 최소한 그 지각을 이름할 개념이나 관념, 보존하고 재생산할 형식이나 체계를 필요로 한다. 반대로 이해는 지각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볼 힘이 없다. 보편적 리얼리티로 과잉 대표되어 그것의 바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는 ‘볼 수 있는 것만을 본다’는 유아론이나, ‘옳은 것만을 본다’ 혹은 ‘본 것은 옳다’는 폐쇄적인 순환 논리에 갇힌다. 그렇기에 우리의 이해가 만들어 낸 체계 전체를 하나의 지각으로 다시 국소화할 때, 주체의 경험의 차원을 정당한 시작의 자리로 인정할 때에야 체계 자신은 다시금 재생산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상상적인 풍경을 현실적인 것에 진입시키고, 두 용어가 서로 교환되는 회로를 따라 가상이나 오류라고 이름 붙는 판단의 과정을 해체할 것인가?[3] 여기서 예술 생산물을 대상으로 삼는 까닭은 ‘작품’이라는 단위에서 자기 자신에 준거한 체계나 규칙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고, 그렇기에 분석의 범위가 좁고 관찰에 용이하다는 이점이 있다(레비–스트로스의 말처럼, ‘모든’ 예술 작품은 이러한 점에서 하나의 미니어쳐다). 또한 아동을 독자로 포함하는 그림책, 동화, 애니메이션 등을 세부 대상으로 잡은 까닭은, 이 독자군에서는 국소한 문화 집단에서만 통용되는 사적 규칙이 거부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동–독자군은 순수함의 레퍼런스라기보다 그 자신의 특수성을 갖는다. 그렇기에 성인–독자군이 자신에게 결여된 아동의 특수성을 다시 지각하기 위해선 동심과 같은 심미적 투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이해를 거쳐야 한다. 이 글은 글쓴이의 선입견과 결여를 하나의 이해로 놓고, 이로부터 지각을 창출할 것이다. 그리고 지각을 다시 이해로 만들어나감으로써 양방향을 점유한다. 이러한 이해와 지각의 상호–되기 과정으로서, 다음 장에서는 최민지의 그림책, 미하엘 엔데의 동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그 교환의 회로라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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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이 성인용 극화에 빠져 있다가 동화로 돌아선 이유를 "좋은 건 좋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낫다"고 요약한다.[4] 이것은 복잡성의 삭제처럼 들리지만, 스스로 학습한 단순성을 창조성의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5] 단순성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때, 그러한 단순성의 상호작용은 분명히 풍부함으로 이어진다. 오직 아동서에서 "세 번째 사람"을 볼 수 있었다던 평론가 김지은의 말처럼[6], 나또한 넓은 의미의 아동서에서 어떤 축소, 배제, 단순화를 발견하고 싶다.[7] 그래서 이 글은 지각과 이해의 상호–되기를 스스로 수행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앞 문장은 아이들의 인식이 복수적이기보다 단수적이고, 다양하기보다 단순하다고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보는 내 인식의 제한됨을 그 자체로 이용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화적 문법에 숙달된 자가 겹겹이 쌓여 올라간 결과물로부터 다시 하나의 획까지 거슬러 내려가며 한 폭의 회화가 갖는 구성과 표현, 동시에 미술 공동체의 기억까지 지각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자는 거기에서 재현된 사물을 찾거나 다소 사적인 이해만을 이용해야 한다.[8] 마찬가지로 나는 최민지의 그림책에서 무언가를 보지 못한다. 역설적인 사실은 최민지의 그림책이 요구하는 문화적 문법이 거의 없다는 것인데, 그것을 아동을 독자로 포함하는 작업의 전제 조건이라고 해보자.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할 때, 나의 결함이 가장 크게 느껴진 곳은 최민지의 초도작인 『문어목욕탕』(노란상상, 2018)이었다. 반대로 『코끼리 이발소』, 『마법의 방방』에서 즉각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디테일한 관찰을 통해서 지각과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과정을 생략하고 곧장 ‘의미’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는 지표들, 유튜브 영상을 직접 보지도 않고 스마트폰 스크린 속 스크린으로 3x2cm 수준의 초소형 썸네일을 통해서도 훑어볼 수 있는 그러한 의미의 제스쳐들에 나는 절여져있다. 웹툰과 출판 만화 중간에 걸쳐 있던 만화가들이 “어차피 잘 그려도 안 보는데…”라며 콘티 상태로 연재해도 그게 뭐 어떻냐고 말했던 인터뷰들이 기억나지만, 이러한 감상자의 태도나 습관은 단지 대중문화에 혐의를 씌울 부정적 특질은 아니다. 가령 ‘통제하는 부모와 따라야 하는 아이’라는 대립항, 아무도 타려들지 않는 놀이기구 등, 나는 예술 작품을 읽는 방법이라고, 의미는 무엇이라고 학습받은 관념적 틀(A=B) 속에서 즉각적으로 내 시선의 구조, 사건의 형식을 투시도법처럼 해당 작품들에 투사하여 극히 단순한 구조적, 지시적 기호들을 얻어 내고 그것을 기술하는 것을 감상이나 비평이라 이해한다. 이러한 기호들은 지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혹은 지각의 구체성이 요구되지 않는다. 이해를 물신화하기 위해서 나는, 상이한 구체성들이 깃들 수 있는 진정한 추상이 아니라, ‘개별적인 존재들을 지시한다’는 추상의 특성이 물화된 기호적 존재자만을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웹툰이나 《귀멸의 칼날》과 같은 동시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두드러지는 특징도 이러한 지각의 구체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개별 장면 또한 독립적인 사태로 존재하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이는 지브리 스튜디오와 같은 제작사에서 어떤 장면을 ‘캡쳐’해도 일러스트나 회화 작품처럼 자립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인데, 이러한 과잉 해상도는 가령 아키라 제작 시기의 버블 경제를 언급하는 식으로 당대의 재정 상태나 완성도에 대한 개인의 집착으로만 설명되지 않고 본다는 것과 실재와의 관계에 관한 다층적 맥락이 겹쳐져 있다) 전투 씬을 제외한 다수의 장면이 다음 전투 씬까지 이어가는 기능으로 환원됨으로써 내가 보는 것이 사물이며 이전의 인물과 같다고 판단할 최소한의 조건만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지각하는 것이 ‘작붕’이라 불릴 정도로 어색한 형상이거나 화면 구성일지라도 상관이 없다.
웹툰이 부흥하던 2010년 초에, 한국의 만화가 허영만이 “만화를 그리려고 자신이 그렇게 그림을 연습했던 것에 너무나 화가 난다”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9] 이 말은 중의적으로 두 가지 방향을 모두 품고 있는데, 이 글에서 개별 이미지를 조악함이라 관찰하고 비난하는 방향으로 가지는 말자. 허영만이 이어서 “이런 만화도 있을 수 있구나”라고 말한 것처럼 웹툰은 ‘만화’라는 장르가 성립되는 요건들을 매체적 변화와 함께 개방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위에 언급한 기호화된 존재자라는 것이, 단순함을 부정의 방식 혹은 결여의 방식으로 품고 있다면, 이해를 창출하고 배치를 유도하는 그러한 단순함을 내가 보는 것에서 다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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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그림책계는 강력한 중앙 집중적 환경을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에세이나 웹툰, 웹소설 등이 그러하듯 크고 작은 교육센터나 프로그램, 커뮤니티 등이 접근 장치로 운영되지만 대학 및 학계, 언론, 하이 파이낸스 시장, 공기관 등의 물적, 상징적 권력들의 배치와 게이트 키핑 속에서 닫혀 있는 몇몇 예술장들의 재생산 체계보다는 탄력적이다. 그렇기에 그림책이 놓인 환경은, 제도적 전문성이 요구되는 환경이었다면 시작할 수 없었을, 영원히 잠재성으로만 남기 쉬웠을 사건이 현실화되기도 한다. 나는 「아마추어리즘의 사회, 그리고 예술」(문학과지성사 하이픈, 2021)이라는 글에서 최민지 작가의 그림책과 게임 디자이너 베넷 포디의 웹 플래시 게임을, 최소한의 기술적 요구 사항만을 갖고 자기 체계를 만들어 낸 사례로 꼽았다. 첫 책인 『문어목욕탕』이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처음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었던 최민지의 상황에서, 유의미하게 관찰되는 것은 그것이 개별 이미지를 조탁하는 회화나 일러스트와 달리 ‘책’이라는 구조물이었다는 점이다. 『문어 목욕탕』과 『코끼리 미용실』이 밀도나 깊이라고 은유하는 개념적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창조성이나 완성도라 불리는 미학적 판단의 유일한 기준이 아니다(또 다른 예시로, 한국문학계의 담론틀에서 파악되고 있지 않은 정지돈 소설가의 소설에 대하여, 한국문학 심사자들이 ‘심연(깊이)가 없다’라는 언어적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했던 것을 유의해보자). 하지만 동시에, ‘그것만은 아니다’라는 거부의 언명에 만족하지 말고, 이 책이 만들어낸 긍정의 내재적 기준을 살펴야 한다. 들뢰즈의 인터뷰 내용을 차용해본다면, 중앙 집중적 욕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환경적으로 강제되는 단순함은, 우리의 욕망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배치적으로 흩어지게 만들고 집합적인 방식으로 존재케 만든다. 이는 창작을 둘러싼 계기, 과정, 결과에서 유의미한 방법론적 비유가 될 것이다.
부정의 어법으로 시작해보자. 『코끼리 미용실』(노란상상, 2019)에서 공간은, 회화적 방식에서 공간적 통일체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다. 종이 위에 보이는 모든 개별 사물들이, 어떤 공간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반대로 이 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부여받거나, 이 공간에서 분리된다면 개별적 의미는 얻을 수 없는, 그러한 공간은 아니다. 공간적 통일체가 네거티브 스페이스(여백)까지 의미화한다면, 위의 장면은 확실히 ‘그 위에’ 개별 사물이 소묘적으로든 형체적으로든 그려져 있다고 여겨지는 그러한 물질로서의 표면이나 배경이다. 즉 ‘하나’와의 관계가 없다. 그러나 이 부정형을 이끌어내는 이해를 뒤집으면? 개별 사물들 각각의 위치는 고유한 성질과 고유한 값을 갖는다. 극히 작은 동식물부터 벽에 붙은 안내문까지 의미값을 갖는 이 개체들은 하나에 복무하기보다 조직화된 군의 형태로 모여 있기에 의미론적 개별성을 유지한다.[10] 이러한 성격은 내러티브의 흐름 속에서(즉 이 그림책에는 분명한 ‘이야기 공간’이 존재한다) 개체들이 각자의 사건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으로 발현된다. 최민지 그림책은 이러한 사물 개개에 대한 광범위한 집착에서 비롯되는데, 이러한 경향성은 최민지라는 ‘작가의 특이성’으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최민지가 놓였던 환경과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나아가 이것은 몇몇 그림책에서 관찰되는 무책임한 낭만성과 인격화를 정당화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보여준다. 최민지의 그림에서 인격성은 동물들이 ‘어떤 착한 인간적 심상’을 투여 받아 머리를 자르고 말하고 웃는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넓은 피사계 심도로 찍은 딥포커스 촬영에서 모든 사물들이 동일한 초점을 할당받듯이, 물리적이든 내러티브적이든 그 크기가 다를지라도 사건을 일으키는 동일한 규모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무엇에 부속되지 않는 독립적 존재가 된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실제로 딥포커스 촬영술을 정식화한 영화감독 오손 웰즈는 “관객이 보고 싶은 것만 보면 된다”고 말하며 이러한 기법에서 관객의 능동적 선택이 가능한 해방적 성격을 강조하기도 했다. 아동발달학에 관해 아는 것은 없지만 최민지 그림책을 분명히 ‘읽고 보는’ 아이들과 함께한 경험에서 내가 관찰한 것은, 어른–독자인 내가 지각을 구조에 집어넣으려는 의도를 갖고 ‘훑어보는’ 경향 속에서는 관찰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종류의 지각의 디테일을 아이들은 수월하게 관찰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사물을 기호나 상징, 즉 A가 아니라 다른 무엇을 이해하고 그 다른 무엇들의 구조를 짜는 것은 익숙지 않을지언정 광범위하고 집착적인 ‘보기’를 통해 분명히 그림책을 본다. 최민지의 첫 그림책 연작이 이례적인 호응을 얻은 것은 이와 같은 특성에 호응한 결과가 아닐까.
이러한 배치와 배열의 성격에 대해서 더 생각해보자. 이는 극작술이나 근대문학에서 주로 언급하는 ‘서브 텍스트’와도 다른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당신은 원하는 바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갈망하거나 욕망하는 것은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입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적절치 않은 것을 원하거나 너무 많이 원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불일치는 많은 훌륭한 이야기와 신화의 핵심이다. 저 유명한 오이디푸스를 보라. 잘못된 것을 원하고, 또 갖게 되는 것을.[11]
서브 텍스트는 보고 있는 것에 안 보이는 무엇을 암시하고 기입한다. 오쓰카 에이지가 근대문학을 “무언가 응어리와도 같은 애매하고 언어화할 수 없는 잔여물”[12]을 만들어내고 이에 의존한다고 언급한 것처럼, 정지돈의 심사평에서 언급한대로 이러한 것들이 ‘심연’을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최민지의 그림책에서 나는 보이는 것을 본다. ‘깊이’나 ‘비밀’이 안 보이는 것을 보게끔 이끈다면, 최민지가 의미값들을 ‘배치’하는 방식은 보이는 것을 보게끔 이끈다. 둘은 이중보기라는 점에서 동일한 성찰적 행위 같지만, 그 운동의 방향은 정반대이다. 전자는 숨겨진 대본이나 진실, 진실한 의도, 진정한 자아 등을 전제하고, 닫힌 관점의 공간을 강화한다. 반대로 바깥을 암시, 은유하고 이에 의존하지 않을 때, 모든 사건은 보이는 것들 간의 주고받음에서 발생하고 해결되기 때문이지, 왜 그런지를 소급해서 묻지 않는다.
이것의 한 가지 의미론적 파생은, 최민지 작업 속 ‘어린이’들에게 ‘용기’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이 말은 어린이에게 선악이라는 도덕적 범주를 덧씌우는 것만큼이나 이상하다). 최민지의 그림책들에서 아이는 한 부모 가정이라 혼자 목욕탕을 찾고, 부모에게 착한 어린이를 강요받던 중에 혼자 미용실에 오고, ‘하지 않는’ 온갖 이유가 있는 심심해 마을에서 유일하게 마법의 방방을 탄다. 그러나 이는 가령 에반게리온의 신지가 에바에 타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감정과 의무 같은 심리, 사회적 범주 속에서 내면적으로 길항하며 윤리적 주체로 서는, 그러한 근대적 주체 의식과는 무관하다. 여기서 아이들의 능력은 어떻게 보면 ‘그냥’ 하는 것처럼 보인다. 최민지 그림책이 적지 않은 어른–독자들을 갖는 까닭은, 그림책을 통해 동심 같은 것을 엿보거나 회귀하거나 투사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자아의 성찰이나 성장과 같은 서사를 벗어난 ‘그냥’의 해방적 성격에 있고 이 ‘그냥’을 정당화하는 구조적 성격에 있다.
이런 체계의 성격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공간과의 관계로 돌아가 보면, 이는 다른 방식으로 책의 편집술 상에서 구현된다. 즉 “모든 언어가 어휘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화법과 구문을 필수적인 수단으로 사용하듯이”[13], 그림책에서는 개별 이미지의 강화나 내러티브적 나열뿐만 아니라 편집에 대한 의식이 체계화의 동등한 요인 중 하나이다. 가령 아래 장면에서 머리카락이 우면으로 넘어가면서, 다만 텍스트가 놓일 빈 공간 정도로 이용되었을 여백이 ‘벽’이나 ‘면’의 표상과 연결됨으로써 의미화된다. 위에서 개별 이미지의 배열이나 생산으로 공간적 통일체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하단의 그림처럼 비틀린 조형이 무한하게 수용될 수 있는 가능성과 개별 사건들의 자립으로 이어졌다면, 공간과의 관계는 완전히 방치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즉 그림책에서 중간이 분할되는 접지를 ‘벽’과 ‘면’이라는 요소와 연결 지어 책이라는 구조물의 차원에서 틀을 짓는다.[14]
최민지가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는 것이 사회적 환경에서는 어떤 모델로 기능할 수 있을까? 「아마추어리즘의 사회, 그리고 예술」에서 나는 아마추어리즘이 수평적 확산에 기여하면서도 그것이 휴머니즘적 옹호나 공허한 권리 주장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창조적이고 지적인 활동의 기초 단위로 되돌아가는 행위의 철학에 기반하는 것이라 말했다. 중앙 집중화된 예술에 가까이 갈수록 당사자는 “현행하는 언어 체계에서 스스로를 구별 지으려는 기호들”(롤랑 바르트)을 생산하도록 이끌리며, 그러한 영역에서는 일종의 비–표준화가 당위적 표준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영향에 대한 불안”에 빠져 있는 자의식 과잉의 승계자도, 마찬가지로 거부의 제스쳐를 보이는 반–영웅도 아니라, 새로운 표준들의 창발이 필요하지 않을까[15]. 유운성이 〈마틴 에덴〉 등을 감독한 시네아스트 피에트로 마르첼로를 두고 "그는 새롭고 참신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심약한 정신의 소유자들과는 완전히 결을 달리하는 인물"이라고 평한 것처럼 말이다(워크숍을 통해 만난 최민지 작가도 그렇게 보였다. 특별한 장치 없이 언급되는 이러한 말들이 갑작스럽고 ‘사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역사를 가진 동시대의 몇몇 예술들조차 시작은 아마추어적이다. 가령 오쓰카 에이지는 위의 책에서 “종래와 같은 문체를 쓰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언문일치의 아마추어적 문체”를 쓸 수 있게 만든 장르가 근대문학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뛰어난 창작자 한 명을 부각하거나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린다고 해결되거나 수행될 일이 아니고 그랬던 적도 없다. 하지만 개인적 차원에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비평가나 읽고 있는 사람들이 각자가 생산하는 지각을 믿고 그것을 보존할 내적 형식과 체계를 의식적이든 아니든 쌓아가는 것이 그러한 수행이라면 (최민지의 작업에서 받았던 첫인상은 ‘이게 그림인가?’였는데 반대로 이것은 ‘그림이라는 게 여기에 처음 있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겉보기로 정당화되거나 겉보기로 힐난 받을 것이 아니다. 최민지는 작가로서 판단의 기준을 스스로 정립하고 제시했다.) 이에 상응하는 문화적, 제도적, 경제적 장치들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그리 거창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이 업로드된 매체도 ‘있는 것’의 몫을 요구하는 내부투쟁으로 환원되지 않고 그러한 방향성에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1] 영화 평론가 유운성이 대전아트시네마에서 진행했던 〈에이젠슈테인을 다시 읽는다〉(21.07.08–08.12) 참조.
[2] 유리 치비얀, Sthene(mumberrymountain) 역, 「쿨레쇼프 실험에 대한 몇 가지 역사적 주석들」,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mumberrymountain/222394143007), 2021.
[3] 질 들뢰즈, 김현수 역, 「아이들이 말하는 것」–『비평과 진단』, 인간사랑, 2000.
[4] 수전 네이피어, 하인해 역, 『미야자키 월드』, 비잉, 2021. 2장 참조
[5] 매튜 프레더릭, 장택수 역, 『건축학교에서 배운 101가지』, 동녘, 2008, 46장.
[6] 김지은, 『어린이, 세 번째 사람』, 창비, 2017. 서문 참조.
[7] 이는 평소의 내 문제의식과도 관련된 것 같다. 창조성의 최소 단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문화’나 '문화적 생산'의 인지적 문턱을 낮추는 것이 된다. 이 글과 연동되는 「아마추어리즘의 사회, 그리고 예술」에서 주장하는 것도 이와 같은데, 아마추어리즘은 만들어진 것의 특정한 상태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관점을 조명하는 것이며, 잘 만들어진 것들의 상태에서조차 그러한 최소 단위를 뽑아내고 이해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8] 피에르 부르디외, 「문화와 정치」–『사회학의 문제들』, 동문선, 2004. 참조
[9] KBS 수요기획 '또 하나의 한류, 한국만화의 힘', 2012년 4월 4일 방영.
[10] 에르빈 파노프스키, 심철민 역, 『상징형식으로서의 원근법』, 비(도서출판b), 2014. 1장 참조.
[11] 찰스 백스터, 김영지 역, 『서브텍스트 읽기』, xbooks, 2016, 45쪽.
[12] 오쓰카 에이지, 선정우 역, 『감정화하는 사회』, 리시올, 2020, 205쪽.
[13] 레비–스트로스, 안정남 역, 『야생의 사고』, 한길사, 1996, 50쪽.
[14] 슬라이드 화면으로 보고 있는 것과 달리 실제 그림책에서는 접지로 유실되는 정보량이 커, 180도 이상 돌아간 채 반대 방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그린 것처럼 보인다.
[15] 판단의 기준을 자기 자신이 만든다는 것은 ‘상관 없다’고 중얼거리는 자기 세뇌이거나 기존의 모든 담론이나 제도를 거부하는 순진함도 아니다. 자신이 반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환경적 집단 속에서 그러한 외부를 자기 체계화에 이용할 때 발생하는 주체성, 이러한 주체성으로 체계를 만들기 시작하는 순간에 주어지는 자족적인 정당성만을 나는 ‘상관 없음’이라고 여기고 옹호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