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스탈리니즘

이 세계의 문제

 

  전체주의와 후기전체주의의 도식을 갈파함으로써 스탈린주의의 기조를 비판하려 했던 바츨라프 하벨의 노력은 오늘날 아이러니하게도 스탈린주의와 현 자본주의의 형식적 차이에 관한 명료한 인식을 제공한다. 하벨의 주장대로라면 후기전체주의 체제는 특정 집단의 선도적인 정치적 노선이 아니라 복잡하고 장기간에 걸친, 아주 교묘해진 ‘사회의 자기 침해’인데, 다음 다섯 테제가 사회적 자기 침해로서의 후기전체주의적 스탈린주의 비판을 위해 그가 주장한 도식이다.

 

첫째, 구식 독재의 권력은 국지적이나 후기 전체주의는 광범위한 영역에 걸치기 때문에 무소부재한 듯 보인다.
둘째, 후기 전체주의의 역사성은 그것에 저항하는 운동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나타난다.
셋째, 세속화된 종교처럼 매우 융통성 있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유지된다.
넷째, 후기 전체주의의 권력 행사 기술에는 빈틈이 없다.
다섯째, 구식 독재정권에선 영웅주의, 혁명의 기운, 압제자와 피압제자 사이에서의 가시적이고 드라마틱한 투쟁이 구현되었지만 후기 전체주의 아래에선 그런 것들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다.

 

  체코의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고 최초의 민선대통령으로 선출된 하벨의 기여가 정치의 미학화, 그리고 정치의 도덕화라는 점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이는 민주주의가 정치를 추방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닥치게 만들기 위해 동원된 포스트 정치의 당근이 아닌가. 모든 운동과 이념이 이 기류 안에서 용해되었으며, 이미지를 정치화하는 흐름 안에서의 투쟁은 동시대적 투쟁의 추상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을 도태시키거나 변절시켰다. 도덕의 정치화는 사이비 모럴리스트를 대거 양산하고 어떠한 정치적인 목소리도 위반적인 제스처로 모함할 수 있는 비법적인 장치를 완성했다. 그럼으로써 세계는 과거에서 쏘아졌던 탄환의 궤도를 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벨의 올가미는 공산주의에겐 헐렁해졌고 비대해진 자본주의에 철컹 들어맞는다.

 

  후기전체주의가 자본주의의 커플이라는 스캔들은 하벨의 명제를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기에 별 신통한 사고를 요하지 않는다. 역사상 공산주의 권력은 절대추상으로 접어들지 못했다. 권력은 스탈린이라는 철인의 신체 속에 일부 내장되고 그를 통해 구현되었으며, 치안은 경찰과 굴락에 의존해야 했다. 권력은 프로크루스테스 타입으로 작동했다. 집행자가 필요했고 침대가 필요했으며 칼이 필요했고 들쭉날쭉한 신체가 필요했다. 적어도 그 경제는 스탈린, 굴락, 경찰, 인민 모두를 등장인물로 요한다는 점에서 민주적이었다. 반면 오늘날의 지배는 신용등급, 채무, 연간 소득, 자율적인 관리와 반복되는 평가로 대체되었다. 국지적인 권력은 묘지에 안치됐다. 들쭉날쭉한 개인이 제 스스로 침대에 올라가 발목을 자르거나 여남은 신체를 거열하도록 자기 검열을 추동하는 절대추상적 후기전체주의가 신의 권력을 승계한다.

 

  후기 전체주의의 반문화적 전유는 말할 것도 없으며, 표면적으로 알고 있던 모든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의 악세서리가 되었다. 좌파가 의식 수준에서 각성을 촉구하는 동안 자본주의는 무의식을 잠식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테면 그것은 형식화된 지배를 구성했고, 이데올로기적 표면은 아지랑이처럼 갈라졌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와도 결합할 수 있는 체제가 완성되었다. 페미니즘을 슬쩍 꼬셔 이미 해체되어 있던 원-이미지를 새삼 재해체하는 시늉을 부리고 돈을 쓸어 담는 자본주의. 순진한 민족주의자들보다 더욱 민족주의자라는 듯 의뭉을 떨어 애국자들의 지갑을 통째로 건네받는 자본주의. 구식 이데올로기는 대출과 다를 바 없이 언제든 융통될 수 있는 가변 자산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자본주의에 대한 우파 헤겔주의자들의 변증법적 긍정 속에서 세계가 위기를 탄력적으로 받아내고 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신체 없는 권력의 지배 속에서 익히 알고 있던 투쟁의 드라마는 임사에 이르렀다.

 

  알고 있던 모든 방식의 좌파적 무구를 갈고 닦아봤자 무엇도 벨 수 없는 세계가 되었다는 사실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파악 가능한 사실이 되었다. 세계가 전적으로 추상화되었기에 등가를 좇아 경험과 체험에 몰두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그런 점에서 참이다. 한편, 물 샐 틈 없는 지배에 관한 인식은 직관적으로 체득될 수 있는 것이었고 이는 대중문화 속에서 적극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한다. 인간과 사물이 맺는 관계의 조절자가 더 이상 이쪽이 아니라는 비관은 백일몽으로 대체된다. 존 버거의 말대로 세계가 제시하는 이상적 주체와 자기의 불일치가 맺는 긴장은 이상을 적극적으로 구현하도록 종용하거나 백일몽으로 대치하는 방식으로 해소하도록 몰아세운다.

 

  일찍이 프로이트는 죽을 때까지 욕망하는 것을 인간의 속성으로 보았는데, 그것의 반명제는 죽은 인간은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지 못하는 인간은 죽게 된다는 사실이다. 한 세계의 유지가 판타지를 어떤 방식으로 구현하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면, 지루하게 읽고 들은 바대로 자본주의가 그것의 판타지를 제시하는데 실패했고, 무한한 현재만 계속될 뿐이라면. 불완전한 현재가 끊임없이 재구축된다면. 사회구성체 안에서 습득할 수 있는 판타지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면. 그래서 시민을 집단적 백일몽 사태로 빠뜨리는 것으로 해결책을 삼는다면?

 

  스탈린주의는 언제나 판타지를 제공했다. 그것은 유토피아라는 항거불능의 매력을 갖춘 심상이자 영원히 타오르는 횃불, 아득한 지저에서부터 무한히 샘솟는 우물이다. 유토피아가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않는 장소였기에 가능했던 조건, 즉 부재하는 것에 이상을 복각하는 그 능력은 절대 추상을 이룬 자본주의가 다루지 못할 리가 없는 권능이다. 보리스 그로이스의 주장대로 공산주의 혁명이 돈의 매개로부터 언어의 매개로 사회를 번역하는 것이었다면, 자본주의 스탈리니즘은 만족할만한 돈을 쥐어주는 대신 적당한 백일몽적 이미지를 쥐어준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숭배할 만한 이미지가 아니고, 적당히 즐길 수 있는 정도라는 것이다.) 시민에게 돈과 판타지를 쥐어줄 생각이 없는 자본주의는 스탈린의 가죽을 뒤집어쓴다.

 

  그것의 작동 형식은 정치의 이미지화에서, 나아가 세계의 이미지화에서 이미 예증되어 있던 것이다. 예로부터 어떤 조류를 감지하기 시작한 명민한 이들이 이미지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이미지는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가장 질박한 곳까지 유포되었다. 로우컬처에서 증상을 읽어내는 일이 가능해진 지가 오래이며, 엉덩이 무거운 아카데미 또한 그러한 가능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그러나 머리 좀 쓴다고 젠체하는 이들은 확실한 영역 아니면 성급하게 뛰어들지 않는다. 방탄이 그래미를 먹어치우지 않았다면 케이 팝이 한국에서 증상이 될 일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 위에서 말한 대로 후기전체주의를 통해 보호되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스탈린의 윤곽으로 배회하는 인두겁-이미지를 밝혀내려고 한다.

 

  경험과 체험에 관한 바닥 모를 물신화가 추상이 지배하는 사회에 관한 동물적 반동이듯이, 후기전체주의를 등에 업은 채 가속되는 자본주의의 불균형 속에서 메시아적 주체의 형상을 세계 한가운데 강림시키려는 욕망 역시 한껏 달아오른다. 과거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이 일으킨 추상적인 재난은 유대인이라는 구체적인 제물과 히틀러라는 초인적 증상을 잉태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치체에서 초법적 권력자는 하벨 이후의 정치 토양에선 출현 불가능한 캐릭터이다. 정치의 도덕화와 미학화는 어떠한 방식의 폭력적 소요도, 그것을 자임할 초법적 권력자도 등록될 수 없도록 제조된 Y자 멜빵이다. 만약 대상 없는 재난을 퇴치할 신적 주체를 소망하는 일이 사회적 필연이라면 오늘날 초주체의 역할을 자임할 인물은 누구인가.

 

이세계라는 대안

 

  인간에게 집은 물리적인 평방미터 이상,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는 상징이다. 그러한 상징 작용의 불가능은 그 전에도 신기루와 같았던 중산층 모델의 판타지를 몸소 아작 내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연일 벌어지는 노동소득과 자산소득 간의 격차는 시민의 세속적이고 집합적인 희망을 종양처럼 다루고 적출했다. 그렇다면 ‘내집마련’의 좌절과 맞물려 대안적으로 착복되는 백일몽은 무엇인가. 여기서 한국의 대응은 일본의 현상을 뒤따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남한의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하면서 네이버 웹툰 상에는 이세계와 판타지 장르의 황금기가 시작된다.

 

  1985년 환율을 조정하는 플라자합의 이후, 일본의 버블 경제는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인해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1991년에는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즉, 신규대출 전면 금지)를 시행하는 동시에, 기존 대출도 LTV(Loan-to-value, 부동산 감정가 대비 대출액)를 200%에서 70%로 제한하게 되면서 일본의 경제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 당시 버블의 공백을 메우고 일본을 지탱한 상상종과 상징종은 각각 이세계물과 옴 진리교이다. 양자는 버블이 터지면서 마찬가지로 효력을 잃은 전후 일본의 역사적 내러티브를 보완하기 위한 대안적 내러티브들이다. 옴 진리교는 상징계를 지켜내려는 카미카제적 헌신을 보여주는 배다른 애국인데, 그들은 진리국을 세우고 이시하라 쇼코를 신성법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초주체의 형상을 일궈내려 했다.

 

  옴 진리교가 상징계의 공백을 틀어막으려 했다면, 상상계에서는 이세계물이 충격을 막아내려 했다. 1990년대 일본은 본격적인 1세대 이세계물의 창세기이다. 이세계물의 등장은 상징계에서 작동할 수 없는 판타지가 상상계로 도피하는 과정처럼 보인다.(그러나 이세계물에서 도피는 ‘모험’의 외양으로 나타난다.) 90년대 중반 일본은 엄청난 판타지 붐이 일어난다. 이 시기는 이세계물의 1세대로 구분된다. 2세대는 1세대가 정립한 세계관을 그대로 차용하고, 몇 가지의 설정을 뒤트는 방식이 전형을 이룬다. 1세대 이세계물은 이전까지 그와 같은 명찰을 달고 있지 않다가, 2세대 이세계물의 차용으로 인해 사후적으로 이세계물로 규정된다. 이는 2세대 이세계물이 애초에 세계관에 큰 비중을 두고 있지 않다는 증거 중 하나이며, 최근 잇따른 만화들의 일반적인 상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2세대 이세계물의 출현 조건은 여전히 경제 문제에 달려 있을까. 2010년대의 일본 경제는 지표상 잃어버린 30년을 극복하지만, 임노동자의 실질임금은 1980년대에 수렴하며, 도쿄를 비롯한 중심지의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현 일본이 잃어버린 30년과 일별하지 못했음을 알리는 전언이라도 되는 냥 시기적으로 맞물려 유행하게 된 2세대 이세계물은 <나로우계>라고 불린다. 나로우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소설가가 되자’는 뜻으로, 주로 라이트 노벨을 양산하는 대중적인 모바일 텍스트 투고 플랫폼의 이름이기도 하다. 당시 여기서 순위에 오른 작품 중 하나인 <소드 아트 온라인>이 2012년에 애니화 되면서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되고 향후 2세대 이세계물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된다.

 

  여기서 자본주의는 항상 잉여의 이익을 누려야 하기 때문에 점차로 투자에 보수적인 속성을 갖게 되고, 안전하고 검증된 장르에 천착한다는 주장은 식상하다. 그건 인간 심리 안에 이미 음각되어 있다. 보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도 몇 년의 시차를 두고 정확히 동일한 흐름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2016년 <카카오페이지> 플랫폼을 통해 히트 친 <나 혼자만 레벨업>은 2018년 웹툰화되고 해외에까지 수출되며 막대한 호응을 얻는다. 이후 네이버 웹툰은 각종 판타지, 무협, 이세계물을 마구잡이로 웹툰화한다. 현재 네이버의 무협, 판타지, 게임 요소를 혼합한 창작물은 계속해서 비중을 늘려가고 있으며 출시되는 족족 상위권에 랭크된다. 대중 수준에서 본격적인 백일몽은 바로 이 웹툰 매체를 통해서 산포되고 있다.

 

  무협, 판타지, 게임, 현대, 이세계, 회귀물, 환생물, 귀환물, SF의 요소들이 입맛에 따라 조합되면서 무궁무진한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대-판타지-게임의 요소를 배합하면 <나 혼자만 네크로맨서>, 현대-판타지-회귀물을 배합하면 <전지적 독자 시점>(이 경우엔 완주한 소설이 현실이 된다. 비슷하게는 다 깬 게임이 현실이 되는 <나 혼자 만렙 뉴비>가 있다.)과 <용사가 돌아왔다>, 무협-판타지-환생물을 섞은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 무협-환생물을 섞은 <화산귀환>, SF-무협을 섞은 나노마신(기술 보모를 볼 수 있다), 무협-게임-회귀물을 섞은 <천마육성>, 무협-회귀물을 섞은 <광마회귀>, 무협-환생물을 섞은 <망나니 소교주로 환생했다>, 판타지-회귀물을 섞은 <투신전생기>, 게임-판타지-현대를 섞은 <최강부캐> 등등 염가의 레서피로 주조된 장르의 칵테일이 웹툰을 잠식한다. 장르들의 난교는 새로운 세계관을 낳기는커녕, 그것의 소멸을 형식 안에서 증명한다.

 

  상상은 시간(회귀물)과 공간(이세계물)을 기준으로 구체화된다. 이세계물의 경우 공간은 새로운 도화지이다. 부실한 세계관은 사실상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두며 추후 삼류 작가들이 직면할 설정 붕괴를 사전 예방하기도 한다. 법칙이 포화되었거나 무너지는 세계로부터 도피했기에 세계관이 부재하는 상태가 위장된 모험의 조건이기도 하고, 이를 통해 저속한 해방감을 주기도 한다. 반면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은 초능력자나 몬스터의 출현 등 어떠한 분기를 통해 자본주의로 밀폐된 지구를 유아적으로 망가뜨리고 폐허 위에서 새로운 법칙으로 작동하는 서사를 구축하려 한다. 따라서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픽션들이 대체된 법칙으로 작동하는 세계를 그린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이세계물이다. 현실과 반대로 공간의 여백이 넘쳐남에도 톨킨이나 러브크래프트 같은 방대하고 통일된 줄거리와 세계관 구축은 중요하지 않다. 이세계물의 핵심은 어떤 주체를 만들어내느냐다. 객체는 없는 채로 있다.

 

  시간 역시 스탈린적 주체를 위한 장식으로 전락한다. 이를 위해서는 타임슬립물과 회귀물이라는 장르를 구별해야 한다. 전통적인 타임슬립물의 경우 과거로 가서 대안적 서사를 구성해내거나, 미래를 보고 온 뒤 미래를 사수하거나 비틀기 위한 선택들을 해나간다. 그러나 과거로 가는 경우 대부분은 대안 역사물의 하위범주적 장치 일부로 국한되는 경향을 보이고, 명백한 과거로 이동했기에 세계관의 엄격함이 요구되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과거 이동은 <백 투 더 퓨처>처럼 원래의 서사를 지켜야 하는 보수성이 있었다. 타임 패러독스로 인한 원시간의 변동을 ‘막는’ 것이 타임슬립물의 주요한 문제이며, 시간에 대한 최소개입이 일종의 불문율처럼 여겨졌다. <터미네이터>는 스카이넷이 서사를 비틀기 위해 사라 코너를 암살하려고 T-800을 과거로 보내지만, 역시 이 경우에도 역사의 변동으로 인한 심판의 날 실행을 막아야 한다.

 

  반면 회귀물에서 1회차의 인생은 근본적으로 망해있다. 그 덕에 주인공은 과거로 회귀하고 동일한 세계를 반복한다. N회차의 주인공은 그러한 시간이 반복되는 것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즉 주인공은 일반적인 타임 슬립물과 달리 원래의 역사를 바꿔야 한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원래 역사에서 다른 이들이 차지했던 기연이나 아이템을 독식한다. 이때 시간은 역사라기 보단 주인공의 기억이다.(그러나 타임루프물과는 상실의 기간에 의해 다시 구별된다. 타임루프물은 단기기억 상실, 회귀물은 장기기억 상실이 주를 이룬다.) 반복된 세상에선 도둑질이란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 타임 슬립을 경험한 주인공만이 파국(파국의 스케일은 주인공의 죽음부터 아포칼립스까지 다양하다)을 막을 수 있는 유일자이며,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파국은 예정대로 다가올 것이기에 주인공의 강도짓에 관한 도덕적인 논쟁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

 

  시간과 공간에 이어 주체의 문제와 대질해야 한다. 이고깽(이세계 고딩 깽판물)물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세계물이 대중적인 호응을 얻기 전, 몇몇 철없는 남성들을 위한 오락으로서의 이고깽물과 지금의 이세계물은 때로 동일하게 취급되나 실상 전혀 다른 위상을 갖는다. 이고깽물은 다른 차원으로 용사 소환당한 주인공이 막대한 능력을 얻고, 맘에 안 드는 이들을 죄다 죽이고 할렘을 이루는 풋내기 남근 서사였으며, 유통 범위에 따라 남성중에서도 협소한 범주의 남성들의 욕망만을 충족시켰다. 특히 이고깽에서의 주된 무력행사는 주인공의 개똥철학을 강변하기 위한 도구였다. 언변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그것에 밀린 상대방이 무력으로 도발해오면 더 강한 무력으로 짓밟고, 재차 자신의 가치판단만을 일방적으로 관철하는 자의식의 배설이자 분출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고깽의 주인공이 고등학생으로 상정되는 이유는 간명했다. 자위에 미친 시기와 일치하니까.

 

  그렇다면 영웅 서사의 주인공들은 어떠한가. 정통적인 시리즈물이나 영웅 서사 안에서의 주인공들도 물론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영웅 서사는 영웅을 헌신과 희생의 드라마나, 현실의 왕과 귀족을 추앙하기 위한 개념적 장치로 소비한다는 점에서 이세계물의 주체와는 구별된다. 즉, 영웅은 진정으로 칭송받는 위치에 있지 않다. 영웅 서사는 특정한 숭고나 교훈을 위해 이용당한다. 그들은 서사 내에서도 바깥에서도 ‘남들을 위한 삶’을 산다. 그러나 이세계물의 주인공에겐 세계를 위한 비장미적 헌신이 없다. 그들은 철저한 사익을 추구하며, 세계 전체가 주인공의 사익을 위해 재배열된다. 주된 목표는 1인자의 자리에 올라 자기 의지의 관철이 세계 의지의 관철이 되는 상태를 구현하는 것이다.

 

  정통 무협이나 판타지 물들은 주인공이 갖는 힘이 양적으로 달랐지, 질적으로 다르진 않았다.(있다고 해도 양질전화의 성격을 띠었다.) 상태창 이전의 이세계물에서는 존재의 격은 차등적으로 나눠졌을지언정 그들의 지각과 체험을 이루는 근본적 지평은 다르지 않았고, 이후 각종 퓨전물들의 등장 이후에도 주조연간에는 동일한 인식론적 지반이 있었다. 달리 말해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었고, 객체에 관해선 동등했으며, 플레이어와 NPC 식의 존재론적 심연과 그로 인한 세계를 대하는 방식의 구별을 갖진 않았다. 시나리오 내에서 주조연간의 차이는 악어와 파라노말 액티비티가 다르듯, 관세음보살과 개구리가 다르듯, 정치인이 시리우스 항성계와 다르듯 완벽히 이질적이다. 주인공만 상태창을 다룰 수 있는 세계관에선 존재의 가름 정도가 아니라 인식의 전제 조건이 근본부터 구별된다. 주인공의 특성으로 인해 객관적으로 상관할 수 있는 세계가 무너진다.

 

  초주체를 위한 이세계물의 안배 중 하나가 이 상태창이다. 세계 인식의 게이머적 모드전환은 현실을 게임처럼 여기게 되는 당대적인 감각의 알레고리 그 이상이다. 상태창을 갖는 주인공은 세계 내에서 오직 그만이 주체라는 메시지를 함의한다. 이때 이야기 내부의 타인은 인격으로 나타나지 않고 주인공의 감식안을 통해 수치화된다. 주인공이 상대하는 것은 타인이 아닌 상태창 뿐이다. 다른 이들이 세계-내-존재라면 주인공은 세계-존재이며, 세계는 상태창을 통해 굴절된 채 현상한다. 현실은 외부보다 주체의 편에 있는 것처럼 현상하며, 삶의 지속은 타인과의 상징작용 보다는 내적 관리와 효용의 분배를 통해서 가능한 것처럼 나타난다. 이는 현실에서 몽땅 제거당한 주체성의(동시에 객관성의) 전도된 알리바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무협, 판타지 장르는 오타쿠 취급을 받는 매체였다. 그러나 이제 오타쿠의 대우주가 실시간으로 구축되고 있다.

 

무한 복사되는 좀비 스탈린

 

  상술한대로 오늘날 정치의 영역에서 슈퍼맨이 나타날 순 없다. 모순의 격화 이후로 출현하는 증상으로서의 정치인이라면 허경영이다. 그를 믿는 자들의 컬트적인 신봉과, 믿지 않는 자들의 패러디적 숭배를 보라. 오늘날 정치는 이런 방식으로 숭배될 수밖에 없다. 버블 이후의 상상종과 상징종이 이세계물과 이시하라 쇼코였다면 ‘내집마련 상상의 파산’ 이후 한국을 지탱하는 상상종과 상징종은 이세계물과 허경영이다. 그중 이세계물은 위와 같은 키메라 장르물의 급속한 유포를 통해서 소멸 직전 주체에게 판타지를 한 모금 떠먹인다.

 

  시작은 2018년 3월에 웹툰으로 번안된 <나 혼자만 레벨업>을 통해서이다. <달빛조각사>의 주인공 위드가 게임 내에서 노동만을 반복하고 재화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캐릭터의 전형이라면, <나 혼자만 레벨업>의 주인공 성진우는 자본주의적 스탈린의 온상이자 담지자이다. 성진우는 밑바닥 출신이었지만 그 고유의 능력으로 인해 우뚝 서는 타입의 캐릭터로, 여기까지는 다른 일반적인 서사와 차이가 없다. 그가 갖는 가장 큰 특징은 성장 없는 인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성장 가능한(다시 말하면 미래가 있는) 캐릭터라는 점이다.

 

  엄청난 수의 아류작들이 이 웹툰을 추종함으로써 원작의 성공을 증명하고 있다. 차원이동 레벨업, 허세로 레벨업, 혼자만 레벨업, 현질해서 최강으로 레벨업, 혼자 레벨업 합니다, 밥만 먹고 레벨업, 이세계에서 레벨업, 신과 함께 레벨업 등의 <레벨업> 아류작들과 나 혼자 소설 속 망나니, 나 혼자 만렙 뉴비, 나 혼자 네크로맨서, 나 혼자 천재 DNA, 나 혼자 만렙 귀환자, 나 혼자 자동사냥 등의 <나 혼자> 시리즈가 넷 상을 부유한다. 성진우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캐릭터는 한 번 죽거나, 상태창을 열람할 수 있는 캐릭터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 스탈린적 시리즈물의 주인공들은 남보다 초월적으로 잘난 정도가 아니라, 남과는 종자 자체가 다른 설정의 세례를 받는다.

 

  만화를 통해 온갖 종류의 문화적 보상들이 흘러든다. 현실에서 멈춘 성장은 스탯창을 켜고 스킬 트리를 개방해나가는 주인공에 이입하는 것으로 해결된다. 맹준규의 말대로 스탯 분배는 자산 포트폴리오와 대응하며, 각종 스킬은 자격증의 문화적 대응쌍이란 것은 간단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대개의 이세계물은 20대가 넘는 남성들이 주인공이다.(이고깽물은 남성의 저급한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대변자를 요했기에 고등학생이 주였다.) 회귀 후 각 시나리오마다 최대치의 효율만을 골라잡는 주인공은 유능한 주식 투자자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보다 후기전체주의적 증상에 가까운 포커스는 소실된 전체주의의 망령을 매력적인 주체로 구현하고 그와 같은 유기성을 통해 과거에 적대적이던 것들의 속성이 융합된다는 것이다. 회귀물 주인공의 능력은 시점 단타의 최대 효율적 퍼포먼스이기도 하지만, 세계 전체의 인과를 조망할 수 있는 그 권한은 도래할 사회주의와 유토피아를 유일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여겨져야 했)던 스탈린의 권능이다.

 

  자크 라캉의 너무 늦거나 이르게 도착하는 편지는 웹툰 안에서 완벽한 타이밍에 수신된다. 주인공은 정크로 알려진 아이템들을 엮어 이스터 에그를 창출하거나, 죽기 직전의 순간에 깨달음을 얻어 위기를 돌파한다. 하지만 편지가 항상 수신인에게 도착하지는 않는다. 그런 요소 역시 백일몽적 문화에 중독될 수 있는 마약의 일종이다. 편지는 아즈마 히로키가 주장한 ‘오배’의 개념처럼 종종 주인공에게 도착하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시니피앙이 분절된다.(그러나 아즈마 히로키의 오배에서 분절되는 시니피앙이 공간에 따른 종별성을 갖는다면, 웹툰 상의 오배는 주인공의 시차상 오배인 경우가 잦다. 사이다 서사는 이 구조에 의해 막힘없이 풀려 나간다.)

 

  즉 주인공에게 당장 도달해야 했으나 그러지 않았던 무언가가 언젠가 주인공에게 긴요한 기표로 재작용하는 그런 순간이 만화 안에서 ‘우연’처럼 나타난다. 현실엔 소실된 이 우연이 백일몽의 베이스를 다진다. 쪽박인 줄 알았던 아이템이 알고 보니 대박이고, 허접인 줄 알았던 스킬이 알고 보니 최강이며, 쓸모를 몰라 인벤토리에 처박아 뒀던 쓰레기가 절체절명의 상황에 주인공을 돕는 등, 모든 인과가 철저히 주인공을 위해 적절히 분산되고 안배된다. 바로 그 안배가 주인공을 스탈린적 주인공으로 만들어준다. 회귀를 통해 도덕적 과녁에서 벗어나고 인과를 보게 되었으며, 주인공이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축지처럼 세계가 주인공에게 도달하기에, 카프카의 <법 앞에서>가 무색하게 주인공이 도착하는 때에 맞춰 문이 열린다. 시공간과 서사 전체가 주인공의 자전 운동이다.

 

  자본주의 스탈리니즘의 진정한 변증법은 주인공과 최종보스가 아니라 주인공과 시스템의 항에서 발생한다. 주인공은 시스템을 전적으로 무화할 수 있는 인격으로 나타난다. 이는 현실 원칙을 넘어서는 쾌락의 구현. 알림말로 나타나는 시스템은 언제나 주인공 주위를 공전하며 이런저런 경고를 남발하지만, 주인공은 그러한 ‘법칙’을 아랑곳 않고 원칙망에 구멍을 낸다. 주인공의 초기 성장은 시스템에 전적으로 기대어있으나, 종래에는 시스템의 경고를 위반하고 시스템 자체를 시해하거나, 시스템이 주관하는 범위 바깥을 오가면서 그것의 무능을 들춰올린다. 이런 류에서 주인공이 대질하는 대상은 결국 세계가 아닌 세계관(시스템)이며, 시스템 안에서 질식된 현실 속 개인의 역능은 스탈린의 이상적인 가죽을 덧댐으로써 일부 기워진다.

 

  이세계물은 여태까지 열거한 부분적인 요소들의 일부를 저질적으로 흡수하고 뒤섞어서 대중에게 처먹으라고 내민다. 법정화폐에 찍혀 유통되는 인물화처럼, 자본주의 스탈리니즘에 물든 웹툰 주인공의 인격엔 무늬만 다른 스탈린의 초상이 찍혀 있다. 노동 가치가 마멸되어 희망의 등가가 제거된 세계에서 우리는 돈 대신 적당한 스탈린의 이미지를 얻게 되며, 무한 복사되는 좀비 스탈린의 초주체적 백일몽 경제는 무료로 배포되는 웹툰에 깃들어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공산주의 이념 일부를 구현한다.

 

 

출처 : https://www.greelane.com/ko/%ec%9d%b8%eb%ac%b8%ed%95%99/%ec%97%ad%ec%82%ac%ec%99%80-%eb%ac%b8%ed%99%94/body-of-stalin-lenins-tomb-1779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