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은 왜 실종됐을까?

너를 닮은 사람(2021) 3화, 임현욱 연출, 유보라 극본, 일부 장면.

 

  다 아는 이야기를 해보자. 여기에 전업 미술비평가가 있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해서 먹고살까? 운 좋으면 대학 강의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교수도 아니고 강사법이 개정된 이후 계속 주어지던 강의도 이제 하나만 남았다—달랑달랑한다. 간간이 미술잡지란 곳에서 원고 청탁이 오는데 그런 곳의 원고료라고 해봤자 뻔할 뻔자다. 미술 매체에서 들어오는 청탁은 대다수 값싼 원고료에 짧은 지면이 주어진다. 비평계의 발전을 위해서라는 대의로 원고를 써내지만, 사실은,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잊혀지기 때문이라는 긴요함이 의무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또한 여기에 에너지를 많이 투여하기엔 힘든데, (적당히 하게 되기 마련인데) 다른 일도 많이 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요원하기 때문이다.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최근 공공기관에서 비평가의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공기관에서 청탁하는 원고량은 A4 한 페이지 가량에 불과해 돈도 되지 않을뿐더러 거기서 사용하는 원고료 지급 기준이란 인간문화재라도 되지 않는 이상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1] 그렇다면 남은 동아줄은 작가다. 문예지원사업으로부터 시작되는 작가로부터의 원고 청탁은 요즘 관례화되는 분위기다. 이것이 사실은 비평가가 비평을 할 수 있는 토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평가는 이들을 붙잡아야 한다.

  언젠부터인진 모른다. 비평가와 작가 사이에는 갑을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혹자는 비평가가 갑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그 반대다. 키를 쥐고 있는 쪽은 작가다. 왜냐면 이들은 지원금-기반-예산을 가지고 비평가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기 때문이다—선택은 뒤샹 이후 가장 강력한 미술의 방법이다.[2] 한 예로, 비평가가 많이들 활동하는 레지던시 같은 곳에서 담당자는 ‘어떤 비평가가 좋을까요’라고 작가에게 묻는다. 작가의 한 마디가 비평가에겐 곧 기회가 된다. 초대된 비평가가 스튜디오 비지팅에서 혹여나 엄한 소릴 한다면 작가 사이에서 소문이 삽시간에 퍼질 것이다. ‘그 평론가 성의 없고 별로다.’ 물론 작가도 비평을 할 수 있고 비평에 대한 반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무대 뒤에서 소문을 통해서 행해지는 것은 대개 인물 품평이다. 비평가는 표면에선 떵떵거리면서 선생님 소리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종류의 소문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걸 내심 두려워한다. 작가는 비평가가 먹고살기 위한 중요한 고객이다. 그래서 그런 프로그램에서, 비평에 있어서, 비평가는 항상 CS 교육이라도 받은 양 작가를 대한다.

  혹시나 비평가가 제대로 된 비평을 한다면 곧바로 민원 처리를 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여기서 제대로 된 비평이란 비판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비판적이지 않은 비평은 비평이 아니다.[3] 가장 많은 것은 ‘내 작품을 잘못 읽었다’ 류의 민원이다. 대부분 평범한 비평가는 작가의 의견을 반영해준다. 그건 비평가가 작가의 말에 수긍해서가 아니다. 그냥 그 돈 받고 글을 쓰는데 문제까지 생겨 품평의 대상이 되는 것이 귀찮고 싫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물게 수정 요청에 이의를 가진 비평가가 있다면 실로 문제가 된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 작가는 아마 수정 원고를 받기 전까지 돈을 입금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돈을 줬다면 돌려달라고 할 것이다. 돈 없는 예술가가 다른 비평가에게 원고를 청탁하려고 한다고. 그래서 그 돈과 기회를 포기할 수 없다고 약자성을 드러낼 것이다. 한편, 공공기관이 중간에 있다면, 곧장 가장 곤란해지는 건 담당자다. 담당자는 여기서 선택해야 하는데, 대개 누가 문제를 더욱 크게 일으키지 않을지에 따라 ‘원래 그런 거니 좀 참아주세요’를 말해야 하는 대상이 정해진다는 이야기로 흐른다. 대개 작가의 입장은 자신은 말도 안 되는 모욕을 당한 선량한 피해자다. 반면에 비평은 자신의 작업을 의미화하고 계속 남아 참고와 인용될 강력한 것이다. 작가 입장에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이므로 수정밖에 답이 없다. 비평가는 두 가지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한다. 비평의 본임이 작가의 의도를 진실되게 밝혀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수정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담당자가 죽을 때까지 들들 볶여 다시는 나를 찾지 않을 것이다. 싼값에 쓴 글 하나쯤은, 그리고 이 글로 인해 관련된 사람이 모두 불행해진다면, 더불어 내 상황까지 악화된다면, 그런 글 수정 하나쯤은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마 이 경우 비평가는 글을 고쳐줄 것이다. 일은 이렇게 진행된다.

  작가들은 비평의 실종을 말한다.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숨어 있다: 비평이 없기 때문에 작업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비평이란 무슨 뜻일까? 실제로 그런 비평은 곧장 작가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작업을 가장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이 작가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작업의 진짜 의미를 가장 잘 안다고 추정되는 사람은 작가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가는 비평의 실종을 말한다. 자신의 말을 그대로 갖다 붙인 그런 비평은 비평이 절대로 아니라고. 아무 의미나 통찰이 없다고. 이 경우, 비평은 사라진다. 한편, 비평이 자율적인 주장을 담았을 때 결과는 모 아니면 도다. 가장 성공적인 경우에, 작품에 대한 평가가 작가에게 수긍 가능하면서도 어떤 종류의 통찰까지 줬다면, 그런 비평가는 작가에게 최고의 비평가가 아닐 수 없다. 모두가 해피한 아이디얼이다. 하지만 작가 자신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때 사정은 달라진다. 이때 비평은 작가의 작업을 왜곡하거나, 비평가 자신의 개인 주장을 위해 작업을 멋대로 사용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 경우 작가의 입장에서 굳이 이런 비평은 있을 필요가 없다. 내 작업에 대해 좋게 써 줄 비평가가 얼마든지 있을 텐데, 굳이 내 돈과 기회를 써서 그런 것이 세상에 있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작가는 아마 이 글은 청탁의 요점에서 벗어났으며, 자신에 대한 적절한 비평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이 경우도 비평은 사라진다.

  그래서 비평가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비평은 분명히 작가의 의도를 넘어서야 하지만, 그리고 그런 비평은 작가의 의도보다 비평가 자신의 고유한 주장을 담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그 비평은 비판보다는 작품의 가치를 고양시키는 종류의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작가는 비평가 고유의 예술관을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자신의 작품에 찬사를 매우 괜찮은 모양새로 붙여 줄 비평가라는 아이디얼을 꿈꾼다. 그것이 가능할까? 얼굴도 작업도 모르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에게서 ‘지원을 받았는데요’하면서 연락해오는 관계에서, 기관 담당자가 올해도 무탈하게 진행할 연례 행사에 매칭 비평가로 모시고 싶다고 천진난만하게 연락 오는 제도적 상황에서 가능한 일일까? 지금의 관계에서 비평가는 작가의 동료인가? 적인가? 실로 적도 동료도 아니다. 비평가는 마치 진열대에 디스플레이된 다채로운 상품처럼 쇼핑의 기회비용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 그런 관계 속에서 한편에서 아이디얼한 모델을 전제하고, 또 한편에서 비평의 실종을 냉소적으로 되뇌고 있다—여기서 가장 흔한 비평 모델이 주례사가 아닐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이런 교착 상태에서도, 만약 작업과 세상에 대한 비판적 통찰이 비평이고, 여전히 그것이 필요하다면, 그리고 그것이 모종의 자율성을 긴급하게 요청한다면, 내가 지금까지 설명한 이런 관계적 배치에서 작가는 어쩌면 썩은 동아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 내가 이런 관계를 이야기하는 건 저런 관계도 있다고 주장하기 위함이다. 미술의 역사에서 작가와 함께한 비평가가 수도 없이 많다: 각자가 떠오르는 인물을 열거해 보자. 이들은 어떤 작가와 이웃해 있거나 어떤 작가와 적대적이었다.

 



[1] 생생한 경험담에 관해서는 미술비평가 안소연의 글을 참고할 것. 안소연, "나의 글쓰기와 원고료", 예술경영 웹진, 2021.10.28. (접근: 2021년 11월 1일, https://www.gokams.or.kr/webzine/wNew/column/column_view.asp?idx=2505&page=1&c_idx=90&searchString&c_idx_2&fbclid=IwAR2EzDOi_mR4dvBK4H90LXXssyMZZaDxr5YnTMS73VnAhKsGV_awHkeQsiM) 하지만 안소연 자신도 시사했듯이, 공공기관을 향한 인건비 상향의 우선적 요구는, 비평 그 자체의 문제에 관해선 부분적이거나 간접적인 해결책이다.

 

[2] 최근 몇 년간 전시나 창작 지원에서는 사례비를 쓸 수 있는 폭이 넓어졌다. 과거에는 인건비 지출이 더욱 제한적이었다. 이제 문화재단 지원에서 기획자나 비평가를 작가 자신의 전시에 채용할 수 있고, 사례비도 지급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비평은 전문가 리뷰라는 명목으로 작가 지원 '혜택'에 동원되는 것이 현실이다. 작가를 위한 비평 지원에 대해서는 다음의 링크에서 특히 유망예술가 지원 참고. "2019 서울문화재단 예술지원사업 정기공모 안내", 서울문화재단 웹사이트, 2018년 12월 19일 (접근: 2021년 11월 1일, https://www.sfac.or.kr/opensquare/notice/support_list.do?cbIdx=992&bcIdx=57533&type=). 한편, 아르코는 비평가나 기타 전문가를 섭외할 경우 계약서를 쓰도록 명시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아르코, 예술경영지원센터 등을 통해 표준계약서 만들기를 추진했으나, 여기서 비평가와 의뢰자 사이의 계약서는 어느 곳에서도 고려되고 있지 않다. 자주 비평가와 의뢰자는 기관제출용 형식적인 용역 계약서를 작성하곤 하는데, 글의 사용 범위와 기한의 고려 없이 을(비평가)이 갑(의뢰자)에게 어떤 경우에든 피해주는 것에 대한 엄격한 손해배상을 명문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비평가와 작가 사이에 글을 '준다/(못)받는다'라는 일반적인 통념과 공명한다. 아르코 표준계약서는 다음을 참고할 것. "(문체부)시각예술분야 표준계약서 11종 고시(2019.3.12)",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웹사이트, 2019년 3월 12일, (접근: 2021년 11월 1일, https://www.arko.or.kr/board/view/4008?bid=639&cid=1601718).

 

[3] 내가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할 포스터(Hal Foster)의 어느 인터뷰다. "비판적(critical)이지 않다면 그것은 비평(criticism)이 아니라, 단지 부연설명이나 의견에 불과하다. ... 또한 부정성의 해명이란 긍정적일 수도 있다." Christopher Bollen, "Hal Foster", Interview Magazine, December 5, 2014, (acceced: Nov 1, 2021, https://www.interviewmagazine.com/art/hal-foster-the-insid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