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리얼리즘 운동, 혹은 아시아의 가능성: 수조요노(S. Soedjojono)의 작업 세계에 대한 간략한 일별」

  아시아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본, 인도,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등으로 나열될 수 있는 영토의 집합인가, 동북반구에 위치한 대륙인가, 유럽과 아메리카의 반대 항에 놓이는 위상학적 공간인가? 혹은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를 비롯한 제3세계의 기획들에서 보이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장소인가?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제안이 가능하겠지만, 근본적인 의미에서 아시아적인 것이란 결국 공허한 보편 속에서 특수자의 자리를 찾는 기획과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 아시아성을 찾는 기획은 언제나 유럽과 아메리카라는 대전제의 부정항으로서만 성립 가능하며, 그리하여 ‘서구’와의 관계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전체와 부분, 혹은 일반과 특수라는 위상학적 개념쌍이 요구되는데, 헤겔적 의미에서 ‘전체’를 향한 과정은 언제나 보편과 특수가 매개되고, 동시에 서로 분절되는 순간들을 경유한다. 즉 서구와 매개되면서도, 그와 분절되는 어떤 작인, 대상, 단위를 가리키는 것은 잠정적으로 아시아가 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해된 ‘아시아적인 것’이란 스스로가 정초되어있는 위치를 전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반추하는 과정과, 추상적 보편에서 구체적 보편으로 지양해가는 도약의 계기를 품고 있는 인식론적 과정을 포함한다. 또한 그것은 소여 혹은 ‘자연’을 ‘역사’로 만드는 부정성으로서- 현재를 생산하는 세계의 양태와는 다른 가능성을 포함한다. 이때 아시아란 주어진 실체라기보다는 생산적으로 발명되어야 할 논리이다.

 

  이와 같은 ‘아시아’를 규명하고 상론하려고 했던 미술사적 흐름은 무엇이었을까? 한, 중, 일의 고대 신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거나, 유교와 불교의 영향권에서 나온 특정한 수묵화 내지 조소, 도예를 논하는 여느 ‘아시아 미술사’는 잠시 접어두자. 본 논의에서 상론되어야 할 아시아란 국가들의 권역적 총체라기보다는 논리에 가까운 무엇이다. 보편을 새로 쓰는 특수의 논리라 할 법한 무엇 말이다. 아시아가 소여의 보편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출발한다면 우리는 비판적 리얼리즘으로서의 민중미술으로부터 아시아적인 것의 단초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혹자는 곧바로 다음과 같이 되물을 것이다. 가장 한국 특정적이었던 미술사조에서 어떻게 그와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한가?

 

  우선 민중미술은 주어진 보편으로서의 ‘미술’을 분열시켜내어 그 속에서 특수의 자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한국의 헤게모니적 경향이었던 앵포르멜, 단색화 계통의 흐름이 서구라는 발흥지를 갖기 때문에 그 자체 서구적인 전통에 놓이는 것이라고 간주하곤 하지만, 이는 인과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60년대의 앵포르멜과 70년대의 단색화는 바로 민중미술을 통해 ‘이식된 서구적 시각성’이자 ‘자족적인 형식주의’로서 발명되고 발견될 수 있었다. 달리 말해, 민중미술이라는 분열(혹은 좀 더 우아하게 랑시에르적 의미에서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겠다) 이전까지 앵포르멜과 단색화는 대문자 미술과 동일시되어 왔던 것이다. 민중미술을 통해 기존의 미술은 추상적 보편으로 판명되었고, 그 특수한 조형언어를 통해 우리는 식민통치의 궤적을 밟은 ‘아시아적 역사’에 대한 자각을 미술의 장 속에서 펼쳐내며 ‘전체’로서의 미술을 새로이 규정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간결하고 투박한 조형성, 정치적/계몽적 가독성, 민중 지향적 구상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민중미술과 같은 비판적 리얼리즘은 루쉰의 목각판화운동을 비롯하여 식민 경험을 공유한 국가들 각지에서 벌어진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비판적 리얼리즘‘들’이 아시아 각국에서 대문자 모더니즘을 비판하며 대안적 모더니즘의 모델을 제시하려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닌데, 그러한 복수의 비판적 리얼리즘은 공통적으로 미적 언어를 하나의 탐구 대상으로 미처 설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습득한 근대의 기법과 미술 실천들을 발본적으로 반성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현지화(localize) 시켜내는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소의 시간차는 있지만, 그 작업이 수행됨에 따라 각국의 역사 전체를 새로운 논리를 통해 재인식하고 새로 쓰는 작업이 동반되었고, 이것은 민중미술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은 또한 내적 파열을 겪으며 새로운 계기로 재구성되는 새로운 역사이다. 즉 민중미술은 추상적인 상태에 머물던 한국의 역사를 ‘민중사’로 다듬어내는 계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현실동인’의 선언문을 통해 가시화된 민중미술의 출발점은 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군부에 대한 저항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 철학적 시원은 4.19 혁명 직후의 민족주의 논쟁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이며,[1] 표면상의 형태는 미술사 내부에 새로운 형식을 도입한다는 선언문의 외양을 띠나, 본질적으로 그것은 당대의 엄혹한 현실 자체에 대한 암호화된 비판이기도 했던 셈이다. 1969년 오윤, 임세택, 오경환, 강명희와 김지하 등이 결성한 ‘현실동인’은 “현실주의(리얼리즘)”를 주창하며 사회적 모순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예술의 대응을 강조하고 있다:

 

“참된 예술은 생동하는 현실의 반영태로서 결실되고 모순에 찬 현실의 도전을 맞받아 대결하는 탄력성 있는 응전 능력에 의해서만 수확되는 열매이다. 경험은 일상적 감각의 타성 아래 때가 묻은 정식화한 대상의 수동적 재현이나 그 주관화는 물론 거대한 정신적 공간 공포에 밀려 현실로부터 떨어져 나간 공허한 형식열의 그 어떤 표현 앞에도 내딛을 미래가 없음을 명백히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이제 새롭고 힘찬 현실주의의 깃발을 올린다.”[2]

 

  이는 국가와 산업전체가 발전이라는 추상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모든 다른 것을 치고 나갈 때, 그러한 변화를 실질적으로 만들어내는 동시에 그로부터 밀려나 보이지 않게 된 민중들의 삶을 주목하겠다는 선언이었고,[3] 기존의 미술 형식을 비롯한 지배적인 삶의 감각들을 허위로서 간주하겠다는 표명이었으며, 또한 그에 맞서 새로운 미학의 가능성을 제기하겠다는 단언이었다. 당대 화단의 견제와 당국의 통제로 인해 ‘현실동인’은 당장 빚을 볼 수 없었지만, 이후 1979년 ‘현실과 발언’ 및 ‘광주자유미술인협회’ 결성에 밑거름이 됨으로써 본격적으로 민중적 미학과 아시아성을 담지한 미적 실천이 탐구될 수 있는 공간을 열었다.

 

  한편 인도네시아 또한 한국과 상당히 비슷한 역사적 궤적을 밟아왔다. 네덜란드와 일본에 의해 차례로 점령당했던 인도네시아는 그 과정에서 근대 미술의 시각적 모델을 외부로부터 이식받게 된다.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했고, 이로서 리얼리즘을 통해 민족적인 것을 탐구할 공간이 잠시나마 마련되지만, 그것은 1965년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수하르토의 군부에 의해 분쇄되기 이전까지의 상황이다. 1967년 정권을 잡은 독재자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를 안정화하고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나 억압적 군사정부를 통해 민중에 대한 탄압과 수탈을 자행했다. 군부 쿠데타를 통한 수하르토의 집권[4]은 인도네시아를 반공전선으로 내세워 공산세력을 막으려 했던 미국의 비호 하에 이뤄졌다는 정황 증거가 풍부하며, 적어도 닉슨과 레이건을 비롯한 이후 미국의 대통령들은 어떤 이유로든지 수하르토를 적극 지지했다. 이런 조건에서, 한국과 유사하게 20세기 후반 인도네시아에서 지배적이었던 것은 추상화였다. 그 거점이 되었던 곳은 반둥기술학교(Bandung Institute of Technology)였는데, 이곳은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에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비판적 리얼리즘의 산실이기도 했던 족자카르타 학교(Jogjakarta Academy of Fine Arts)[5]와 대립하며 냉전시기 미국의 헤게모니를 인도네시아의 시각장 내부에서 관철시키는 이데올로기 장치로 기능했다. 그 연장에서 혹자는 반둥 학교의 졸업생들의 그림에서는 인도네시아의 영혼이 보이지 않는다고 평할 정도였다.[6] 형식주의적 경향 속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을 생산하는 반둥 학교와, 리얼리즘적 경향 속에서 인도네시아의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문제들을 다루는 족자카르타 학교의 이러한 대립은 현재까지도 이어질 만큼 깊은 골을 가지고 있다.[7]

 

  그러나 인도네시아 현대미술의 거장이자 리얼리즘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준 신도다르소노 수조요노(Sindoesoedarsono Soedjojono; 1913-1986)를 떠올려 본다면, 인도네시아의 비판적 리얼리즘은 그러한 제도적 기관을 경유한 것만은 아니었다. 1931년부터 교사로서 활동하던 그는 화가로서 활동하겠다고 결심한 뒤 1937년 중국,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일단의 작가들과 함께 자카르타에서 전시에 참여했고, 당해에 동료들과 함께 인도네시아 작가 연합 뻐르사기(PERSAGI; Persatuan Ahli-Ahli Gambar Indonesia)를 설립하여 사실상의 리더로서 활동했다. 상가르(Sanggar)[8] 시기의 뻐르사기는 고흐, 세잔, 고갱, 피카소의 그림들에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이들은 동양적 종교와 이념들을 현실적으로 포착하는 데에 천착하였고, 그 결과 루카치적 의미에서의 “사회적 리얼리즘”을 구현해내며 근대적 미술 기법들의 위에서 ‘인도네시아적인 것’을 조형해내었다.[9] 물론 그가 자신의 작업을 ‘리얼리즘’이라 명시한 적은 없으나, 수조요노의 작업은 억압받는 인민들의 일상적인 삶의 면면을 탐구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부르주아적 미적 판단으로부터의 결별을 선언했던 리얼리즘의 원형을 인도네시아에서 맥락화하였다고 하겠다.(도판1)[10]

 

 

"Seko." 1949, oil on canvas, 174 x 194 cm.

 

  그의 실천은 그저 동료들과의 작품 활동에 머물지 않았다. 수조요노는 인도네시아의 급진적 민족주의를 대변하는 비평가로서도 활동하며, 1950년엔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레크라(LEKRA; Lembaga Kebudajaan Rakjat)[11]의 설립을 주도하는데, 이 단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리들을 보급하고 선도했던 인도네시아 좌파의 문화조직이었다.[12] 이를 기점으로 1950년대부터 수조요노의 작품에선 완연한 리얼리즘적 작풍이 완성되며,[13] 이것은 당대 높은 수준으로 무르익었던 인도네시아 공산주의 운동의 분위기에 화답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1956년부터 1957년 사이, 과열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아내와 가족을 선택할 것인지 당을 선택할 것인지를 종용받아 당을 떠나기 전까지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할 만큼 사회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14] 공산당 탈당 이후로도 그는 1986년 죽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인도네시아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에 천착하지만(도판2), 수하르토의 신질서 하에서는 이전과 같은 동력과 영향력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전설적인 누드화가인 모흐따르 아핀(Mochtar Apin)을 비롯한 수많은 인도네시아 작가들의 영감이 되었으며, 유기적 지식인이자 전위적 예술가로서 식민지에 주어진 경험 체계와 시각성을 극복하는 모델을 제시했다.

 

 

“Pertempuran antara Sultan Agung dan Jan Pieterzoon Coen(Battle between Sultan Agung and Jan Pieterzoon Coen).” 1973, oil on canvas, 300 x 1.000cm.

 

  한편 짐 수팡캇(Jim Supangkat)의 주장대로, 1950년대부터 원숙기에 접어든 그의 작업에선 1860년 쿠르베가 발표한 리얼리즘 선언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수조요노에게 두드러지는 것은 식민지 역사에 대한 자각, 서구적인 것에 대한 탈신비화, 리얼리즘적 특징들조차 넘을 수 있는 대안적 재현의 가능성이며, 이는 리얼리즘의 테마를 생산적으로 변용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작업이 때로 표현주의적 경향과 리얼리즘적 경향 사이에서 동요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즉 “엘리트주의적 미감에 대한 저항은 취향과 네덜란드 식민 사회의 미감과 취향에 대한 저항으로 번역”(도판3)되며, “개인적 권리의 해방에 대한 관심”은 네덜란드의 식민적/후식민적 지배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관심으로(도판4), “삶의 어두운 단면에 대한 표현은 단지 부조리한 사회적 조건을 다루는 것뿐만 아니라 식민주의에 의해 단 한 번도 존중받은 적이 없는 원주민들의 정체성을 다루는 것으로”(도판5) 전유된다.[15] 그런 맥락에서 그가 풍경화에 대한 비판에 천착했다는 것은 실로 적확한 대상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풍경화는 네덜란드 및 벨기에 지역을 아우르는 플랑드르로부터 기원한 것으로서, 그것의 인도네시아로의 전파는 17세기 초 네덜란드의 자카르타 점령 이후 19세기 초 벨기에인 화가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풍경화는 20세기 초까지 거의 한 세기 동안 인도네시아의 모든 작가들이 재생산하는 시각적 모듈이 되어왔던 것이다.[16] 수조요노는 지배의 역사를 비롯하여, 결코 미화할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삶의 실재를 다루기 위해 ‘진실성’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진실성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 풍경화는 그러한 실재를 외면하며 네덜란드의 “여행자적 미감”[17]과 엘리트의 허영에 복무함으로써 식민적 지배를 재생산하는 데 복무할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숨길 수 없는 인도네시아의 전면들을 드러낼 소명을 지닌 리얼리즘은 곧, 풍경화가 재현하는 화사하지만 건조한 허위적 세계를 꿰뚫어 넘을 수 있는 유일하게 생생한 진실이었던 셈이다.

 

 

“Orkes Mutiara Kronchong(Kronchong Pearl Orchestra).” 1970, oil on canvas, 59.5 x 67.5 cm.

 

"Markas Laskar Dibekas Gudang beras Tjikampek Karya(Laskar Headquarters Formerly Tjikampek Karya's Rice Warehouse)." 1964, Oil on canvas, 175 x 250 cm.

 

"Perusing a Poster." 1956, oil on canvas, 109 x 140 cm.

 

  여기서 우리는 주어진 동일성에 가해지는 생생한 분열과, 기존의 보편성이 깨져나가 그것이 단지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음을 알리는 꿈틀거리는 파열을 목도한다. 한국의 민중미술이 소여의 동일성으로서의 앵포르멜 및 단색화에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뚫었듯, 여기서 주어진 보편으로서의 풍경화는 수조요노의 발본적인 비판을 통해 공허한 보편으로 재정립된다. 그리하여 조정되는 것은 전체 세계이며, 인도네시아의 생동하는 역사 자체이다. 고정되어 있던 것으로 보이던 보편은 인도네시아라는 특수를 중심으로 유동하고 재편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그 자체 보편적인 과정이며, 보편을 새로 쓰는 과정이다. 아시아는 바로 이러한 생산적인 파열의 순간에 감지되는 것이 아닐까? 한국의 민중미술과 수조요노로 대표되는 인도네시아의 리얼리즘은 일정한 시차를 두고 대두되었으나, 식민지배와 승자의 역사라는 공동의 문제를 비판적 리얼리즘이라는 공동의 방법론으로 극복하는 길을 모색했다. 여기서 직접적인 대화는 부재하지만, 양자는 동일한 공간과 위상 속에 놓인다. 아시아적인 것엔 국경이 없어도 좋다. 이때 아시아는 저항의 논리에 가까운 것이다.

 

  허나 이런 생각에 찬물을 붓는 것은 언제나 시장의 위상이다. 현재 인도네시아 미술계의 사정은 썩 좋지만은 않다. 공공예술기관의 부재로 정부의 작품 소장이 드물어 개인 콜렉터가 내로라하는 작품의 전시 권한을 갖는 경우가 지배적일 만큼 사유화된 경향을 띠고 있고, 그 연장에서 수조요노의 작업 「Pura Kembar, Sanur(Twin Pura, Sanur)」(1972)는 1997년엔 싱가포르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가공할만한 액수로 거래되었으며, 「Pasukan Kita yang Dipimpin Pangeran Diponegoro(Our Soldiers Led Under Prince Diponegoro)」(1979)는 2014년 홍콩의 소더비 경매에서 직전 가의 3배 정도에 팔림으로써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된 작품의 기록을 세웠다. 이는 가나아트센터와 그 외 몇몇 기관들에서 대규모의 결산 전시들을 통해 급진성을 거세당한 한국 민중미술이 겪은 운명과 기구할 만큼 유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의 리얼리즘이 한국의 민중미술과 유사한 규모와 파급으로 그 내부의 역사와 시각성 전체를 새롭게 정초시키는 어떤 파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은 역사적 진실이며, 이로부터 가능한 아시아의 지도를 그려보는 작업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1] 김종기. “80년대 민중미술을 다시 생각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와 민중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에 관한 시론.” 민족미학 11(2), 2012. p.119 참조.

 

[2] 김지하. “현실동인 제1선언 (1969).” 『김지하 전집 제3 권: 미학사상』. 실천문학, 2002. p.77.

 

[3] 이는 현실동인 선언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나라에서 그것을 수입하고 그것을 운동화 할 때 중요한 것은 그 반역의 표적을 가장 직접적인 서울생활의 현실에서 결정하는 문제다. (...) 그것은 반드시 햄버거, 자동판매기, 금발의 나부와 코카콜라이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어째서 연탄재와 집단자살 기사와 옐로페이퍼와 짐짝버스와 바람 집어넣은 동태와 오징어포에 붙어있는 죽은 파리와 병균이 득실거리는 상한 생선과 관상쟁이의 그림책이어서는 안 되는가?”

 

[4] 이처럼 북미와 유럽에 비해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에서 군부가 권력을 쥐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은, 서구식의 단계적인 부르주아적 공화주의가 맥락 없이 적용되어 특정의 권력이 과도하게 비대해졌다는 점, 근대국가의 조직 원리의 원형이 기본적으로 군대에 기대고 있었다는 점, 국민국가 형성의 초기에는 사회의 가장 선진적인 부분이 군대라는 점 등에 의해 과잉 결정된 현상으로 간주할 수 있겠다.

 

[5] 현재는 ‘Institute Seni Indonesia’로 개명되었다.

 

[6] Grimm, Lauren. The Evolution of Indonesian Art. in partial fulfillment of the requirements for the Degree of Master of Fine Arts. Colorado State University, 1993. p.10 참조. 그러나 여기서 로렌 그림은 반둥 학교를 성찰적이지 않은 추상일변도로 설명할 수만은 없다고 지적한다.

 

[7] 인도네시아 예술의 주요 경향들을 셈할 때 족자카르타와 반둥이 한편에 있다면 다른 한편엔 발리와 우부드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민속적 예술이 있다. 이들은 이슬람적 상상이 가미된 그림자 인형극, 퍼포먼스, 직물공예, 조각 등으로, 오늘날 인도네시아 동시대 예술에서도 반복되는 테마를 제공한다.

 

[8] 스튜디오를 뜻하는 인도네시아어. 뻐르사기가 활동한 1945년부터 1950년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9] Ibid.

 

[10] Jim Supangkat. Provocative Bodies: Interpreting the Works of Mochtar Apin 1990–1993. Ed. Rani Ambyo. Trans. Marjie Suanda and Evelyn. CP foundation, 2005. p.105 참조.

 

[11] ‘인민 문화 기관(People's Cultural Institute)’을 뜻하는 인도네시아어.

 

[12] 그러나 G30S(9월 30일 운동; 자칭 인도네시아 장군 6명을 암살한 조직으로서, 65년 10월 1일의 PKI의 쿠데타 시도와 연결되어 공산당의 만행으로 보도되고 수하르토의 집권의 계기가 된다) 사태 이해산당한다.

 

[13] Ibid, p.104.

 

[14] 1965년의 G30S 사태 이후, 이 선택은 역설적으로 그와 그의 가족을 지키는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Dr Oei Hong Djien, Art and Collecting Art: A Collection of Writings. Eds. Ilham Khoiri and Candra Gautama. KPG, 2012. p.xxviii.

 

[15] op.cit, p.105.

 

[16] Ibid 참조.

 

[17] Ibid, p.106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