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마음들

 <저녁으로 가는 길> 하라은, 2021.

 

  그 길로 가지 않았더라면, 노인을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다른 노인이 다른 길에서 출몰했을 것이다.

 

  노인은 길목에서 전단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더니 이쪽으로 몸을 틀었고, 나는 그를 맞을 준비를 했다. 그는 터벅터벅 다가와서 종이를 내밀었다. 신축 오피스텔 매매 전단이었다. ‘역세권, 지금이 기회’라는 문구가 보였다. 여기까진 현대인이 흔하게 겪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처럼 종이를 코트 주머니에 구겨 넣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질 계획이었는데, 예상 밖의 광경이 펼쳐졌다. 노인이 전단 뭉치를 쏟아버린 것이다. 바람이 많이 불었고, 종이들은 진눈깨비처럼 흩날렸다. 나는 전단을 주웠다. 감사합니다, 그가 말했다. 대강 묵례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블록 끝의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별안간 노인이 횡단보도 앞까지 따라와 내 옆에 섰다. 그는 내 머리를 바라보더니 충고를 건넸다. 저도 예전에 염색을 자주 해서 개털이 됐어요. 삭발하고 다시 기르니까 괜찮아지더라고요. 삭발하세요. 편하고 좋아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인은 나의 반응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머리카락 관리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비싼 돈 주고 미용실 가지 말아요. 다 밀어버리고 처음부터 길러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노인의 입을 빠져나온 단어의 조합이 기어이 나의 귀에 입력되고 있었다. ‘지금 처음 보는 사람이 삭발을 권유하는 건가? 내 머리가 상하긴 했지. 탈색을 여러 차례 했으니. 그래도 이 사람은 뭔가?’ 신호등을 보니 빨간색이었다. 이곳을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방법을 고민하다, 신호를 기다리기로 했다. 신호가 초록색이 되면, 이자를 떨쳐낼 수 있겠지. 그때였다. 마음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삭발을 추천하는 자는 처음 봐. 예언자일지도 몰라.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다. 신호가 느리게 바뀌면 좋겠군.’ 나는 노인에게서 달아나고 싶은 동시에 이곳에 함께 있고 싶었고, 귀를 막아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내심 집중하려고 했다. 찰나에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 이 사실을 모르는 노인은 여전히 나의 머리카락 상태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내가 선택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에게 최선을 다해 반응했다. 그럼요, 할머니. 저도 삭발할 거예요!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손가락 두 개로 머리를 가위질하는 시늉을 했다. 스탠딩 코미디언이 된 느낌이었다.

 

  쾌와 불쾌는 게임 카드와 같다. 영원히 같은 자리에 있지 않으며 엉뚱한 계기로 뒤집힌다. 아침이었고, 날이 쌀쌀했으며, 차들이 지나갔다. 이 정도가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정보였다. 스스로 신이 나는지 화가 나는지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노인은 깔깔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거리에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았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사방에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그 와중에 내가 삭발하면 어떤 옷이 어울릴지 상상했다. 그러다 신호가 바뀌었다는 걸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녹색 표시등은 절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 옆의 수다스러운 인간에게 작별 인사도 건네지 않고 단숨에 횡단보도를 건넜다. 길을 다 건너고, 잠깐 뒤를 돌아 허리를 숙일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냥 앞을 향해 걷기로 했다. 북소리는 서서히 멎었고, 길 위엔 다른 사람들이 나타났다. 도로 위의 자동차 소리도 선명하게 들렸다. 노인은 내 삶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반쯤 안도했다가, 이내 시무룩해졌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계속 그를 떠올렸다. 침대에 누워서도 허공을 보며 오전의 일을 소환했다. 나는 오래된 우유로 치즈를 만드는 사람처럼, 그와 나눈 대화를 휘젓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말들이 하얀 덩어리처럼 떠다녔다.

 

  게임 참가자들은 규칙에 복종해야 한다. 왕 카드를 집으면 왕이, 사령관 카드를 집으면 사령관이 된다. 쾌와 불쾌도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정해진다. 글쓰기 놀이에서는 몇 번이고 카드를 교체해도 된다. 나는 그를 후안무치하고 막돼먹은 늙은이로 만들 수 있다. 동시에 처연하거나, 비밀스러운 사연을 간직한 노신사로 꾸며낼 수 있다. 찰스 부코스키 시집에 나올 법한 우스운 인물로 묘사할 수도 있다. 어쩌다 나는 기이한 장면을 밤새 반복하여 돌려보고, 다시 만나지 못할 이들을 그리워하는 어른으로 성장했을까. 이것은 애도일까, 고인 모독일까. 1958년 <파리리뷰The Paris Review> 봄 호에 게재되었던 헤밍웨이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인터뷰에서, 기자는 실제 인물을 허구의 인물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알려달라고 요청한다. 헤밍웨이는 답한다. “때론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설명한다면 그건 명예훼손 전문 변호사들의 안내서가 될 겁니다.”[1]

 

  게임 속으로 들어가, 지각 변동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해보자. 땅 아래에서 절규가 들리고, 사나운 풀숲이 솟아난다. 작가들은 폐허에 가장 늦게 도착하여, 유물을 찾아다닌다. 그러다 작은 쇠붙이 하나라도 주우면, 처음부터 그곳에 존재했던 사람인 양 행세한다. 그들은 오직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만을 신용한다. 이러한 작가들의 뻔뻔한 성정이 가장 두드러지는 글은 단연 일기다. 일기는 가장 진실한 문학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선 소설보다 허무맹랑하다. 일기는 타인을 무작위로 초대하여 파티를 즐기다 끝내 쓸어버리는 학살극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블로그에 일기를 올리는데, 어떤 친구들은 ‘너무 공감되는 글이야!’라는 댓글을 달아준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맙지만, 가끔 수치심이 올라온다. 나는 공감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글감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정성껏 기술하고 싶은 욕망이 드는 대상은, 이미 나와는 처참하게 어긋나버린 이들이다. 외면받은 진심. 빗나간 문장. 깔깔거리는 입. 비통한 울음. 그런 풍경이 글쓰기를 추동한다. 길에서 만난 노인의 이야기를 왜 할까. 그와 나눈 대화가 소통인지 아닌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알기 위해서는 총을 겨누어야 한다. 그는 떠났다. 나는 홀로 남아 연극을 끝내야 한다.

 

  글쓰기에 대한 온갖 조언을 읽을 때마다 쓴웃음이 나온다. ‘이렇게 하면 남을 웃길 수 있다’라고 속삭이는 유머 지침서를 보는 것 같다. 그러니까 원데이 클래스 광고에 나올 법한 말들. 쉽게 쓰세요. 솔직하게 쓰세요. 물론 납득할 만한 조언들이다. 나도 글쓰기 수업을 진행해본바, 이런 가르침이 일종의 합의점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안다. 그걸 알면서도 반항심이 든다. 교사들은 ‘정직한 글쓰기’의 가치를 설파한다. 그런데 정직함은 상당히 피로한 덕목이다. 인간의 감정은 언제나 통념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인간은 병에 걸리고도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애인을 아끼면서 증오할 수 있다. 사랑하는 이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지기도 한다. 정직한 자신과 마주하려면, 요동치는 땅 위에 끝까지 중심을 잡고 서 있어야 한다. 이는 체력과 지구력이 필요한 작업으로, 고통을 수반한다. ‘쉬운 글쓰기’에 관한 조언은 더욱 잔인한데, 그건 결국 독자를 위해 환경을 인위적으로 바꿔 달라는 요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무한히 갈라지는 지층에서, 가장 평평한 바닥을 고르고, 남은 공간을 모조리 시멘트로 채워달라는 이야기다. 이런 태도가 미덕으로 작동하는 글쓰기도 있다. 신문이나 방송과 같은 저널리즘 글쓰기가 그 예다. 하지만 모든 글이 공익을 위해 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구태여 모든 땅을 갈아엎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놀이에 심취하다 보면 너무 많은 거짓을 진짜라고 믿게 된다.

 

  작가들은 양립 불가능한 감정을 머리에 이고 산길을 오르는 작자들이다. 날은 어두워지고, 땅은 점점 가파르게 변한다. 그런데도 산행에 합류하는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나는 진짜 작가, 가짜 작가를 구분하는 방법 같은 건 모른다. 오르한 파묵이나 아인 랜드가 작가이듯, 브런치에서 퇴사 후기를 쓰는 사람도, 일기를 모아 독립출판을 낸 사람도, 팬픽으로 돈을 번 사람도 모두 작가일 것이다. 다만 나는 세상에 두 부류의 작가가 있다고 믿는다. 자신의 거짓말을 알아차리는 자와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 이러나저러나 작가들은 허구를 호령해야 하는 저주에 걸려 있다. 이들이 마주하는 모든 풍경과 소리와 냄새는 속절없이 흘러내리고, 썩은 치즈의 재료가 될 것이다. 물론 모든 참가는 자발적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저주에서 풀려나고 싶다면 언제든 산에서 내려오면 된다.

 

  그래서, 삭발식을 보려면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하는가?

 


[1] 권진아 옮김, 『헤밍웨이의 말』, (마음산책, 2017), 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