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로서의 페인팅

전은숙, royal botanic garden, 100x100cm, oil on canvas, 2018

 

  페인팅에 필요한 조건을 적어보자. 캔버스와 페인트, 브러시, 팔레트가 먼저 떠오른다. 캔버스의 수직 각도를 맞춰 줄 이젤도, 페인트를 섞기 위해서 적절한 미디엄도, 그것들을 놓을 스튜디오(혹은 그에 준하는 장소)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대상(그것이 재현불가능한 어떤 것일지라도)과, 그것으로부터 페인터에게 떠오른 어떤 심상(그 장소가 머리인지 가슴인지는 단정할 수 없겠지만), 그리고 그 심상을 브러시로 캔버스에 옮길 몸도 필요할 것이다.

 

  다음으로 한 페인터가 캔버스를 지긋이 보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이 페인터는 갑자기 무언가를 결심한 듯 몇몇 튜브를 팔레트 위에 짜서 브러시로 섞기 시작할 것이다. 오페라와 티타튬 화이트와 레몬 옐로우가 보인다. 오페라와 화이트가 재빠른 스트로크 가운데 오페라도 아닌, 화이트도 아닌, 혹은 그 두 가지와 교묘하게 섞여 있는 핑크색으로 변한다. 스트로크는 멈추지 않고 그 옆에 있는 옐로우를 살살 건드리기 시작하고, 페인트 덩어리의 장력이 적당히 반발하는 가운데 몇 줄기의 노란 빛깔이 핑크색 주변에서 소용돌이친다. 페인터는 그 색의 소용돌이를 브러시로 감아올리고선, 손아귀에 적절한 힘을 분배하는 가운데, 브러시의 각도를 세심히 맞추고, 이미 있는 푸른 빛깔의 터치 옆에 또 하나의 터치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선 페인터는 멈춘다. 또다시 그것들을 지긋이 바라본다.

 

  지금까지 적은 것은 페인터가 페인팅하는 과정에서 대강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이다. 그리고 거칠게 말해서, 숙련됐다고 부르는 페인터는 어떤 페인트가 필요한지, 어떤 각도와 위치에 캔버스를 놓는 것이 효과적인지, 어떤 브러시가 어떤 터치를 넣는 데 좋은 것인지, 팔레트에 어떤 위치에 튜브를 짜는 것이 페인트를 섞는 데 유리한지, 하나의 터치가 다른 터치와 어떻게 조응하는지, 혹은 대립하는지, 하나의 터치를 넣는 데에 얼마만큼 다른 세기의 악력이 필요한지, 하나의 색이 다른 색과 나란히 놓였을 때 어떤 다른 느낌을 자아내는지, 미디엄이 얼마만큼 페인트와 스트로크와 질감에 영향을 미치는지, 그런 것들을 행한 결과 그 미래는 어떠할지를 어떤 면에서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 꼭 결정론일 필요는 없다. 페인터는 매 순간을—페인트를 팔레트에 짜는 순간부터 터치를 넣는 순간, 심지어 터치가 들어가는 순간에 그것을 손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는 순간까지도—불확실성과 맞서야 한다. 페인터의 기술이 원숙하면 할수록 이런 불확실성에 기민하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페인터가 자신의 물적 기반을 알아 가면 갈수록, 물질이 자기 스스로의 법칙만을 따르려고 한다는 점을 절실하게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페인터에게도 페인트를 짜고 섞고 칠하고 고치고 그대로 놔두는 모든 순간에 의도를 품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들어보지 못했다. 만일 누군가가 그렇다고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받아들일 용의도 없다. 감각은 너무나 모호하고 물질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확실하다. 페인트를 섞는 과정에서, 혹은 페인트를 캔버스에 바르는 터치에서, 또 다른 터치가 그것에 포개지는 과정에서, 혹은 페인트와 브러시, 캔버스의 외부적 성질 그 자체로 인해서 우리가 소위 말하는 의도는 항상 옅어지거나 배반당하거나다. 그렇다면 페인터는, 추상이든 구상이든, 초현실주의든, 표현주의든, 테이핑 조형이든 좌우간에, 미리 상정해 놓은 어떤 형태의 이미지도 절대로 손아귀에 꽉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페인터는 대체 무엇을 하는가? 할 수 있는가?

 

  그래서 내가 보기에, 페인팅과 마주하는 페인터는 상당히, 항상, 불안정성에 내몰려 있다. 그 이유는 다시 말해서, 페인팅이라는 일련의 과정이 불안정하기 때문이고, 거듭, 페인팅의 물적 조건과 페인터의 몸이 맺는 관계가 근본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페인터가 표현 것은 그래서 사실은, 표현 것이다. 혹은 어쩌면 그렇게 표현된 것에 대한 일련의 반응이 페인팅하기일지도 모른다. 화가는 브러시로 그리는가? 아니면 브러시와 페인트가 캔버스 표면의 마찰을 가로질러 움직인 궤적을 따라잡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가? 매 순간 페인터와 페인팅의 물적 토대는 서로 밀고 당기기를 반복할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페인터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이런 불안정한 관계 자체일 것이다. 따라서 페인팅이란, 최소한 1차적으로는, 페인터와 페인팅의 물적 토대가 불안정하게 관계 맺는, (명사가 아닌) 동사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페인팅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스트로크와 터치다.

 

  스트로크와 터치는 말하자면, 같은 것을 시차적으로 본 것이라고 해야 하겠다. 페인터가 어떤 기대를 가지고 물질을 조작하는 행위가 스트로크라면, 터치는 그 행위의 기댓값이자 물질적 결과로써 행위를 촉발하는 원인이다. 즉, 스트로크는 터치를 생산하며, 터치는 스트로크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언제나 통약불가능성이 흐른다. 스트로크는 제일 처음 출발부터 터치를 만족시킬 수 없다. 완벽한 터치란 존재하는가? 의도와 효과, 원인과 결과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그런 세계 말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페인터는 단 하나의 터치만으로도 부족함 없는 경지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런 성취를 이룬 페인터라면 더 이상 또 다른 페인팅을 제작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것이며,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추가적인 의미를 두기는 힘들다. 이미 그는 거기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기로 그 장소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말은 곧 페인팅, 나아가 페인터의 죽음을 뜻한다. 그 때문에 이우환은 터치의 정수를 추구했음에도 망설였고, 이내 그것의 무수한 변종을 만들었다. 표면과 서포트를 극단적으로 강조했던 구미의 1950-60년대 페인터도 텅 빈 캔버스를 내놓을 만큼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는 내가 알기론 없다. 페인터와 페인팅은 모두 죽음에 강하게 이끌리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그 말은 페인터와 페인팅은 모두 살아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때문에 스트로크는 터치를 부르고 터치는 스트로크를 부르고 하나의 페인팅은 기어코 다른 페인팅을 불러낸다. 항상 스트로크와 터치는 항상 기대와 실망이라는 양가감정을 한꺼번에 분출하며, 그런 한, 스트로크와 터치는 무한한 결핍의 생산지이기도 하지만, 꼭 그만큼 미래로 가능성을 열어 둔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동사로서의 페인팅이다. 페인팅은 완성되어 완전히 정지한 사물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스트로크를 끊임없이 욕망하고 유발하는 터치의 집합이다. 이 우글대는 터치는 실로 살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페인터가 또 다른 스트로크를 결심하게끔 만드는 몹시 유혹적이면서도 괴로운 원천이다. 이 말은 우리가 끊임없이 페인팅과의 관계를 재설정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페인팅에 고정된 역할을 부여하는 프로젝트—예를 들어 상품이나 정치 이데올로기를 부여하는 일—는 종국엔 실패할 것이다. 거듭 그래서 그런 이데올로기 때문에 페인팅을 두려워하거나 포기할 필요는 더욱 없어 보인다. 페인팅은 인간과 사물이 몹시 내밀하고 진지하고 지속적으로 관계 맺는 방식이며, 내가 보기에, 그것에 총력을 기울이는 미술 행위는 미술사 전체를 통틀어도 흔치 않다. 그런 의미에서 페인팅이 맞을 이유는 없지만 굳이 아닐 이유는 더욱 없다. 그보다 주의를 기울여볼 만한 문제는 이런 것 같다. 오늘날의 페인팅은 무엇을 원하는가?

 

2018년 9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