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코로나 시대: 미술계와 관료주의적 작동방식(Modus Operandi)

포스트코로나 시대와 국공립 후원 프로그램

 

  2019-2020년 코로나가 미술계에 불러온 지난 2년간의 변화는 전 세계적으로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도로 크고 중요했다. 세계 대전 직후부터 있던 파리의 화랑이 닫는다든지, 뉴욕의 유명 화랑들이 합병을 하였다. 이미 국가와 문화의 경계선을 넘어서 존재하는 미술시장에 코로나가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또한 뉴욕이나 유럽의 주요 미술관에서 지난 20-30년간 구겐하임, 휘트니, 워커센터 등 주요 미술관의 요직을 담당한 큐레이터들이 급격하게 교체되었다. 2020년과 2021년에 걸쳐 뉴욕의 뉴뮤지엄을 비롯하여 주요 현대미술관에서 노조의 단체행동이 여러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미투와 인종차별의 문화적인 변화 덕분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미술관들이 코로나 때문에 후원을 받기 어렵고 문을 열기 자체가 어렵다 보니 기관의 구조조정이 보다 본격적이고 방대하게 이뤄졌다고도 볼 수 있다.

 

  반면에, 국내 미술계에 코로나가 준 충격은 덜 극적이었다. 어차피 국내 미술시장의 양극화는 지난 10여 년 동안 꾸준히 진행되어왔기에 새삼스러울 것이 없고, 대신 NFT나 경매 등의 뉴스가 신문지상을 장식해오고 있다. 특히 국공립 기금이 미술계 전체에 이바지하는 비중(가장 큰 통계는 70%)이 국내 미술계에서 지난 2년간 정부 부처는 적극적이고 꾸준하게 공공기금을 문화예술계에 투입하였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큐레이터가 대량으로 해고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학예사의 고용안정을 위한 각종 조치들이 취해졌다. 특히 국공립기관에서 진행하는 코로나 관련 프로그램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서울문화재단에서 재정한 청년 위주의 후원 프로그램부터 공공미술의 키워드가 들어간 프로그램으로부터 최근 문화예술위원회에서도 각종 포스트코로나 관련 기금들이 즐비하게 준비되고 시행되었다. 코로나를 통하여 확대된 긴급 지원금이 한국미술계를 지탱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구권의 급격한 변화와 비교해보면 국내 미술계에서 공공기금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필자는 국공립 기금이 가진 온갖 중요한 역할과 혜택에도 불구하고 국내 미술계에서 비평적인 상상력이 보다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믿는다. ‘속도전’인 각종 심사와 정보를 만들어내는 과정, 공정성을 가장한 과도하게 복잡해진 행정상의 절차, 태생적으로 모호한 체계를 자랑하는 ‘예술과 인문과학(Arts and Humanities)’의 분야를 오히려 기이하게 쪼개놓은 후 인위적으로 ‘융합’한다고 주장하는 각종 심포지엄과 연구 프로그램들, 이제 그 심각함에 있어서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임계점에서 뭔가 전환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에 ‘관료주의’라는 제목으로 현장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단순히 비대해진 공무원 조직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예술을 정책적으로 후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단순히 비용이나 부지런함과 같은 기계적인 ‘작동의 방식(Modus Operandi)’을 넘어서 어떠한 고민과 태도가 필요한지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무엇보다도 예술의 창작과 비평의 환경이 내용적으로마저 피폐해질까봐 두려워서 말이다.

 

장면 1: 공정한, 너무나도 공정한

 

  “관료제가 지배하고 있는 국가에서 나타나는 관청이나 사회집단 등에서의 기능적 장애 및 병적 행동양식·의식형태. 일정한 사상내용을 지니는 신조(信條)는 아니며, 비능률·보수주의·책임전가·비밀주의·파벌주의 등으로 표현된다.”[1]

 

  오랜만에 인터넷을 통하여 ‘관료주의’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았다. 사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관료주의의 대표적인 특징은 ‘비능률,’ ‘보수주의,’ ‘책임전가,’ ‘파벌주의’이다. 통상적으로 국공립기관에서 접하게 되는 미사여구와는 사뭇 차이를 보인다. 실제 현장에서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공정, 정의, 창의, 독립 등의 긍정적인 단어가 이곳저곳 문서에서 발견되고 모든 국공립기관도 이러한 추상적인 개념을 현실에서 적용시키고자 여념이 없다. 보수주의, 비능률, 파벌주의를 조장하거나 의식적으로 묵과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슬로건으로 내걸은 목표와 일의 과정이 언제나처럼 미스매치 된다는 것이며, 이때 괴리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이다.

 

  속도감에 취해 있을수록 개인이건 단체이건 슬로건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 빠르게 소통되고 있다고 스스로 되뇌면서 본인도 동화되어 무엇인가를 이루고 있다는 정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의도지 않았던 편 가르기마저 일어난다. 작년 심사 때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하였다. 물론 필자도 그 장면의 부분이었다. 일단, 국내에서 일어나는 심사는 웬만한 경험을 쌓지 않고서는 커버할 수 없는 방대한 양의 문건을 보고 이에 코멘트를 달고 공무원은 빛의 속도로 이를 정리한다. 인간의 하는 온갖 일의 오류까지 조정해가면서 말이다.

 

  그런데 급박한 시간에 진행된 심사는 정작 ‘공정성’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논의가 추상적으로 흐르다 보니 세밀하게 심사할 시간이 없어져버렸다. ‘공정성’이라는 말이 현대미술에서 작가나 작업을 선정할 때 어떻게 적용되는지도 알 길이 없는데 그마저도 내용이 아닌 절차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굳이 21세기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의 예를 들지 않아도 추상적인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아니 생각이나 해봤는지, 미술에 어찌 적용 가능한지, 그리고 모두에게 매번 다르게 인식한다는 것을 삶을 통해서도 현대인들은 체득하고 있을 터인데, 그 어려운 일을, 그 불가능한 일을 심사위원들과 공무원이 감내해야만 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현장에서 심사에 참여해 온 이론가라면 모두 경험했을 법한 일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코로나 시대, 심사 시 고려사항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과적차량처럼 공정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 아래에 끼워 넣어야 하는 조건을 늘어만 간다. ‘공정성’이라고 읽고 의도하지 않은 ‘비효율성’이라고 읽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장면 2: 분업화된, 너무나도 분업화된

 

  두 번째로 공정성과 연관될 수 있으나 확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지나치게 일을 세분화하고 용역을 주는 경우이다. 물론 일을 쪼개서 용역을 주는 방식은 미술계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사, 전시 설치, 도록 제작, 각종 교육 홍보물 제작 과정에서 일을 세분화함으로써 미술인들의 고용이 증진된다. 하지만 모든 절차는 결국 목적과의 연관성 속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아니 정당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이때 목적이 단순할 수 없으며 지속적으로 조정되어야겠지만 적어도 목적에 반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체계는 심각한 재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필자는 국공립기관에서 진행되는 여러 일들에 참여하면서 지나치게 세분화되고 용역화된 일의 체계가 자율성, 유기적인 협업관계, 전문성과 같이 공정성만큼이나, 아니 내용적인 측면에서 더 상위개념으로 중시되어야 할 것이 의도치 않게 도외시되거나 아예 손상되는 과정을 목격하였다. 글을 쓰게 되었고 세밀한 단어 선택에 이르기까지 코멘트가 달려있는 리뷰를 받게 되었다. 도록, 브로슈어, 잡지, 책을 제작하는 편집과정에서 에디팅은 필수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 글의 에디팅 수준은 훨씬 확대되어져서 돌아왔으며, 작가와 논의해서 제안한 부분에 대해서도 메모가 달아져서 돌아왔다. 코멘트가 무례하거나 저자가 코멘트를 무조건 수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리뷰를 보면서 질문이 들었다.

 

  매우 세밀한 단어 선택에까지 코멘트가 달려 있는 것을 보면서 만약 모든 글을 용역처럼 에디팅을 시키게 될 때 단어 선택이 같아지는 것은 걱정하지 않는 것일까? (실제로 한 번역자에게 맡긴 국내 연구자들의 글의 앤솔로지가 한 저자가 쓴 것 같아서 너무 이상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메모가 돌아왔을 때 각자의 생각을 미리 나누고 이야기할 수 있는 정서적, 시간적 여유라는 것이 과연 주어질 수 있는 것일까? 만약 그러한 것이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면, 저자가 추후 글을 고치고 에디터가 불필요하게 보낸 노동에 대한 비용은 낭비에 해당하지 않는가? 오히려 처음부터 ‘제대로’ 된 비평가를 고르는데 더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크로스체크를 과도하게 해야 한다면 처음부터 맡기지 말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과연 저자의 자율성은 어찌할 것인가? 미술관에서 만들어지는 글을 고치는 에디터의 전문성은 어떻게 담보되어야 하는가?

 

  여기서도 제한된 여건 탓을 할 수밖에 없기는 하다. 그런데 만약 시간과 물질적인 재원이 한정된 것이 진짜 문제라면 외형적인 체계, 전문인들의 ‘피상적인 집단지성’이 아닌 쪼개기 용역이 빚어낼 각종 문제점에 대하여 먼저 고민해 보았더라면, 서로의 시간, 에너지, 그리고 스트레스를 사전에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예는 비일비재하다. 오히려 덜 심한 예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술과 법, 예술과 경영과 같은 융합학문적인 분야에서부터 미술사나 미술이론 강연을 정책적으로 영상(으로) 제작하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내용과 형식의 분리, 각기 어떻게 서로의 지식과 전문성이 연결될지에 대한 성찰 없이 만들어지는 ‘협업’의 형태가 빚어내는 ‘낭비’는 그야말로 심각한 지경인 경우가 많다.

 

  최근 국공립기관에서 미술이론 관련 영상을 제작하는 과정을 살펴보니 기금을 지원하는 곳, 기획하는 곳, 영상을 촬영하는 미디어콘텐츠 업체가 각기 서로 독립된 섬으로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제작사, 각본가, 감독, 촬영감독, 편집인이 서로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하지만 동시에 유기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진부한 이야기를 연락을 통해 늘어놓았다. 돈 많은 헐리우드 영화계는 아니더라도 이미 문화예술과 관련된, 그럴듯한 영상을 만들어내는 시리즈들을 보면 건축이면 건축, 순수예술이면 순수예술, 디자인이면 디자인, 동일한 시리즈라도 각기 내용에 따라 다른 톤과 시각적 효과, 음악을 삽입한다. 어차피 영상이라는 것이 그러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던가?

 

에필로그: 문제의 ‘핵심(?)’에 대하여

 

  뭔가 좀 더 근본적인 이야기가 필요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공정성에 집착하거나 형식적인 체계와 분업화를 통하여 야기되는 ‘낭비적인’ 상황에서 몇 가지 패턴이 발견된다. 그리고 ‘분업화,’ ‘포디즘’ 등 관료화로 고착되고 각종 문화정책 과정과 작동방식의 특징이 실은 현대미술이 지향해오고 있는 바에 대치되고 있다.

 

  일련의 현장 경험에서 필자는 문화정책을 시행하는 국공립 기관이 ‘융합’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으나 사고방식은 아직도 분업화, 혹은 포디즘(1920년대 포드 자동차가 대량생산을 위하여 만든 분업화된 생산체계)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연장선상에서 예술과 법, 예술과 경영, 예술과 미디어, 혹은 행정과 창작을, 기관과 예술가를,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산업화 시대의 학문적 분류방법이다. 원래 1920년대 독일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산업혁명 모델을 뛰어넘는 고등교육 모델을 만들고자 대학을 혁신하였다. 이때 우리가 현재 통상적으로 접하는 학과별 대학교육과 각종 차별화된 학위의 체계가 만들어졌다. 현대식 대학교육의 체계가 이때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체계는 무엇보다도 자연과학을 육성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으며, 최근 국내에서 ‘융합’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회적으로 사용되게 된 것도 결국 자연과학과 기술 분야의 혁신을 위한 것이다. 독일미학과 문화에 능통하였던 그린버그가 모더니즘 미술의 근간에 과학적 태도를 강조하는 것도 장르의 고유 성격을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서 탄생하였다.

 

  21세기 코로나 이후 한국 미술계는 모더니즘 미술의 태도나 사고에 매몰되어 있지 않다. 미술은 통상적으로 예술과 인문과학의 부분이다. 정확히 현대의 대학 시스템의 부분이기는 하지만 애초에 완전히 나뉠 수 없고 지식의 유기적인 연결성을 자랑하는 분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합은 어떤 융합이어야 하는지, 분야의 세분화는 무엇을 위하여 행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 없이 포디즘 시대, 즉 초기 산업화 시대의 분류가 국공립기관에서 행해지는 문화예술 관련 지원 프로그램의 철학적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장르이건, 학문의 분야이건,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이건 말이다. 게다가 분업화된 모델을 극복할 수 있는 사전 미팅(pre-production meeting)이 부재한 채로 말이다.

 

  덧붙여서 현대미술은 매우 복잡해진지 오래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각종 사회적 여건이나 이미지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체계에서 파생되는 모든 개념적인 문제점들을 떠안게 되면서 현대미술은 어렵기를 자처해왔다. 만약 문화예술정책이 예술을 발전시키고 예술과 관련된 담론을 육성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다면 구세대적인 산업화 모델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미술인들 모두가 기금이 필요하면 필요할수록, 비평가들이 현장에서 각종 체계에 적응해야만 하면 할수록, 포디즘 모델에 저항하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다. 불필요한 절차와 개념의 칸막이를 없애고, 유기적인 사고와 체계를 만들고 추상적인 수사 어구가 아닌 실질적인 모델을 만들어가야 한다. 물론 국공립기관에 이러한 과업을 감당한 여력이 있는지가 의문이기는 한지만 중요한 것은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 코로나 덕택에 더 바빠지고 더 비대해진 국공립기관의 프로그램과 미술인들의 의존도를 고려해볼 때 기우는 아닌 듯하다.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이다.

 


[1] “관료주의,” 두산백과 인터넷 사전;

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64367&cid=40942&categoryId=31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