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빙/리빙 이미지로서의 VR에 관한 연속적 질문

  ‘무빙 이미지(Moving Image)’라는 개념은 그 명칭에서 드러나듯 직관적이고도 (여전히) 모호하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완벽한 재현보다는 사막에 버려져 동물이 서식하는 누더기 지도에 가깝다”는 말과 같이,[1] 그의 유형학은 기존의 관념을 파괴하는 동시에 무한히 팽창한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부터 탄생하게 된 여러 매체와 장르, 그리고 그들 사이의 경계가 무너져 내린 포스트-미디어적 순간들을 복기하는 대신, 우선 용어 자체의 사전적 의미를 들여다보자.

 

- 움직이는, 이미지.

 

두 개의 단어 사이에 명백히 내재되어 있는 ‘동적’인 성질은 아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 움직이는 이미지는 살아 있는 이미지(Living Image)인가?

 

  물론 이미지가 움직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은 아니며, 살아 있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반의어로서 떠올릴 수밖에 없는 스틸 이미지(Still Image), 즉 정지된 상태의 이미지가 이미 죽은 존재라는 의미는 더욱 아닐 것이다. 다만, moving과 living이라는 두 조건 사이에 자리하는 교집합은 VR에서 (확장된) 무빙 이미지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시도의 기점이 될 수 있다. 움직이며 살아 있는, 혹은 살아 있게 된 이미지와 살아 있는 신체가 움직여야만 펼쳐지는 이미지는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관객에게 이전의 매체들과는 다른 종류의 능동성을 부여하면서도, 어느 정도 제한적인 시청각적 요소로써 스크린이라는 오랜 계보를 연장하고 있는 VR 매체는 무엇을 어떻게 초월하고 횡단하는가?

 

  주지하듯이, 무빙 이미지를 읽는 데에는 재생 버튼이 필요하다. 러닝 타임에 일정한 빚을 지고 있는 무빙 이미지는 재생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시각언어로서 의미를 생산한다. 이미지가 ‘움직이는’ 것임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때 쓰이는 원 안의 삼각형 형태와는 동일하지 않으나, VR 또한 재생 버튼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시간과 더불어 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HMD)를 쓴 인간의 미미한 1인칭적/능동적 움직임이 없다면 가상현실 속 세계는 시작되지 못한다. 그러나 정해져 있는 러닝 타임이 무색하게도 VR 작품 감상자들은 각기 다른 시작과 끝을 경험한다. 디스플레이 장치를 돌리는 각도와 방향에 따라 시선이 x, y, z축을 따라 상, 하, 좌, 우, 앞, 뒤로 자유롭게 이동하고, 이미지와 사운드가 겹쳐지며 관객에게 인지되는 순서는 마치 세포 분열하는 생물인 듯 한없이 증식된다. 물론, 여기에서의 생물은 인공생명일 수도 있으며, 자연 속 실제 생물일 수도 있다.

 

  앞서 등장한 질문을 다시 이곳에 가져온다. VR 작품을 논하는 데 있어 ‘움직이는 이미지는 살아 있는 이미지’라는 전제를 우선 두자. 가상현실 속 이미지가 이곳에 살아 있다는 지점을 고려한다면, 심지어는 고려하지 않더라도, 몇 가지의 연속적 질문들이 서로 얽힌 채 우리를 점령한다. 그 예시는 다음과 같다.

 

1.

  우선 미디어의 변천사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 금세 실감 미디어의 기준이 끊임없이 변모했음을 알 수 있다. 라디오 청취가 한창 유행했던 시기에는 라디오가 최선의 실감과 몰입도를 제공했고, TV가 발명된 이후에는 TV 화면이 그 역할을 계승했다. 결국 일종의 메가 트렌드가 되어 국가 정책 자료를 포함한 곳곳에서 등장하는 용어 ‘실감형 콘텐츠’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언젠가 홀로그램의 파도가 밀려들어 오면, 과거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다고 – 예를 들어, 1957년에 첫선을 보인 센소라마 시뮬레이터의 오감 세계로 – 확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확장하게 되는 신체는 VR 공간에서 어디에 연루되는가? 이 이미지들의 집합체 속에서 살아 있는 것은 이미지 자체뿐인가? 조종자이자 관람자인 관객의 신체 또한 살아 있다는 점을 또 다른 전제로 한다면, ‘살아 있는 것들’의 상호작용은 어떻게 발현되는가? 나의 선택, 즉 입력값에 따른 반응은 어느 정도의 생명력을 지니는가? 무엇이 그렇게나 ‘실감 나는’ 장면을 만드는가?

 

2.

  관객들은 고정된 좌석에서 벗어나 스크린으로부터 탈출한다. VR 매체의 특성상 부여된 이동 가능성은 움직임을 동반하고, 두 개의 눈동자에서 출발하던 시선을 걸어 다니게 한다. 기존의 인터랙티브 아트와 비교해보았을 때 정해진 결말이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내러티브 전개 방식에 있어 경우의 수가 많다는 점에서 이 ‘걸어 다니는 시선’의 신체성이 두드러진다. 그뿐만 아니라 VR 작품의 동작에서 인간은 감상자와 창작자로 분류되므로 또 다른 경우의 수가 탄생한다. 먼저 감상자의 경우, 기술이 깊숙하게 틈입하는 순간에 (당연하게도) 기계 자체가 될 수 없는 이들은 자신의 신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가? 작품 속을 걸어 다니며 작품을 감상하는 나는 몇 퍼센트나 ‘기계적’인가? 이어서 창작자들은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VR 촬영 및 편집 과정을 드로잉 또는 페인팅 등과 동등한 위치의 직관적 행위로 바라보는가? 관람하는 인간의 눈을, 종국에는 팔과 다리를 움직이게 하는 조건은 어디에서 출발하여 이곳에 도달하였는가?

 

3.

  가상현실의 매체는 감상환경을 하나의 돔으로 전제한다. 마치 거대한 스노우볼의 중앙부에 서 있는 것처럼, 관람자는 무언가에 몰입 또는 몰두한 상태가 되어 하나의 세계에 기꺼이 들어간다. 추측하건대 가상현실 작품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존재할 수 없는/그러나 존재해야 하는 상태의 세계와 연결된다. 다만 화면에서는 채널 수가 여러 개든, 파노라마 360도로 볼 수 있든 구성된 부분의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술적 매체로서의 VR이 일정 부분 폐쇄적으로 구성된 이유는 어떻게 설명되는가? 공간성의 의미 구조를 파헤치는 것이 감상과 비평에 있어 중요한 지점이 되는가? ‘가상현실 체험관’, ‘가상현실 체험 부스’라는 표현이 이 세상에서 삭제되는 날은 과연 오게 되는가? 관객과 배우 사이의 벽이 제4의 벽이라면, 가상현실과 실제 세계의 벽을 제5의 벽이라고 칭할 수 있는가? 혼합현실(Mixed Reality)과 가상현실의 가장 큰 차이점이 현실 세계와의 차단 정도에 있다고 할 때, 두 세계를 가로막는 벽이 하릴없이 무너지는 날은 올 것인가?

 

4.

  앞서 언급한 ‘벽’이란 작품과 감상자가 한데 모인 모습을 포착해낼 수 없다는 기록 불가능성을 내포하기도 한다. VR 기기를 쓴 자신의 모습이 아닌, 작품 속에 입장한 상황을 스스로 기록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가로막혀 있다. 관객 눈앞의 미술관 스크린에 영사되는 무빙 이미지와 달리 VR 작품과 감상자가 병치되는 순간이 영원히 추적 불가능하다는 점은, 더 나아가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하지 않다는 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약 감상자가 작품에 입장함으로써 다른 세계의 조각이 되는 것이라면, 작품 속 요소들은 전체를 이루는 각기 다른 부분이 될 뿐이므로 주체와 객체의 구분은 무의미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일례로, 전시를 관람하는 나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과정에서 적어도 작품이 배경으로 전락하는 일은 없겠다) 그렇다면 가상현실 환경 내부에서 ‘보는 주체’와 ‘보이는 객체’는 구별 가능한가? 혹은 주체와 객체를 신유물론적 관점에서 해석하여 무화된 범주 내의 동등한 행위자들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때 VR 작업 내부의 개별 행위자들이 모두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행위자가 몸담고 있는 작품 자체도 살아 있게 되는 것인가?

 

  봉합된 물음표들의 끝에 놓인 마지막 질문은 이러하다.

 

  움직임을 지속하는 ‘무빙 이미지’의 유기적 구성과 생동감을 담지하는 ‘리빙 이미지’의 유기체적 구조는 가상현실의 어떤 부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그 뿌리는 어떤 시공간을 향하는가?

 


[1] 백남준아트센터, 『상상적 아시아』, 2017. p. 21; <기억의 천재 푸네스(Funes the Memorious)>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가 1942년 출간한 단편소설의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