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위드'는 가능한가: 비평가 22인의 릴레이 인터뷰①

“진리인 것은 오직 무한할 때만
타당한 것과 구분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1]
-알랭 바디우-

 

  이 릴레이 인터뷰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됐다.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권유하는 이 시기에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생각할 거리는 점점 많아지므로, ‘비대면’ 사회라면 그만큼 많은 생각들을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 나에겐 그런 마음이 있었다. Zoom과 같은 화상통화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여주지만, 엄밀히 말해서는 ‘대면’이라고는 볼 수 없다. Zoom과 같은 비대면 서비스는 사람을 직접 만나는 것만 못하며, 우리는 하루빨리 대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허나 이것이 비대면이라 하더라도, 우리를 사회와 연결해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라는 점은 홀로 고립되어 있으면 꽤 우울하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과의 ‘연결’을 추구하는 일은 몹시 중요하다고 느꼈다.

 

  이 대목에서 궁금증 하나가 떠올랐다.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된다면 그건 어떤 모양일까. 각자 다른 생각을 할 테니 그렇게 만들어진 [마음]이란 것도 울퉁불퉁한 모양새일까. 그게 아니라면, 다들 바라고 염원하는 것은 비슷할 테니 [마음]은 동글동글할까. 내가 내린 가설은 사람들이 바라고 염원하는 것은 얼추 비슷하리라는 점이었다. 의견은 다를 수 있어도 ‘산다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입장은 다르지 않을 테다. 그리고 ‘위드’를 향해가는 이 시점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위드’는 ‘함께 산다’는 뜻이 있고 좋든 싫든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들을 의미하기에. 서로 다른 몸에 있더라도 영혼은 결국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이 나에겐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것이 왜 비평과 글쓰기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졌는지를 설명해두려 한다. 나는 어떤 염원은 육체와 영혼이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글쓰기다.

 

  그에 대한 근거로는 첫 번째. 인터뷰에서 몇몇 필자들이 지적해주었듯 글이라는 건 일종의 기록에 해당한다. 글은 적을 때의 생각과 상황을 반영하므로 시간이 지난 뒤에 읽어보면 내 글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헌데 이는 ‘당시’의 ‘나’가 글의 형태로 잔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때의 우리는 ‘과거의 나’를 ‘지금의 나’와 같은 선에서 볼 수 있을까. 이 둘이 울퉁불퉁하게 이어질지, 동글동글하게 이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리고 두 번째. ‘위드’라는 말을 하고 싶다면 결국에는 방향성을 따져 묻게 된다. ‘함께’라는 말은 타이타닉 호의 마지막 순간을 뜻할 수도, 혹은 허드슨 강의 기적을 뜻할 수도 있다. ‘염원’도 마찬가지다. 염원이라는 말은 우리가 지켜내려는 것일 수도, 이루려 하는 일일 수도 있다. 비평에서도 그러한 두 가지 방향성이 있다. 만약 비평이라는 게 ‘위드’, 즉 ‘연결’을 위한 행위라면 이곳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켜내려는 것,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것’ 말이다.

 

  좋든 싫든 간에 함께 해야 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우리들 사이가 연결될 수 있을까.

 

  나는 이 궁금증을 풀고자 인터뷰를 기획했다.


“처음으로 글을 썼을 때,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이광호-영화

  영화를 보고 좋았던 기분을 간직하고 싶어 시작한 것 같습니다. 축약하면 이기심과 소유욕에 가깝습니다.

 

박동수-영화

  학교 과제 등을 제외하면, 제 의지로 처음 글을 썼던 이유는 단순히 본 영화를 기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때는 여러 블로그 등 온라인에 올라와 있는 글들을 통해 영화를 접해왔는데, 그렇게 자신이 본 영화를 공개된 공간에 소개하는 분들처럼 저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주로 장르영화를 많이 찾아봤었습니다. <인간지네> 같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화제작들을 온라인에서 볼 수 있게 됐을 때 자주 봤던 것 같아요.

  성인이 되고 서울로 학교를 오게 되면서 시네마테크를 알게 되고, 영화제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시네마테크와 영화제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고전영화, 독립영화, 개봉하지 않을 영화들을 보게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영화를 꽤 많이 보고 있지만 항상 보고 난 뒤 모조리 까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당시에도 왓챠 같은 플랫폼이 있지만, 거기에 별점만 남기는 것은 영화를 봤다는 것 이외엔 별다른 기억을 남기지 않으니까요. 그러다 여름방학에 단기알바를 하고 첫 노트북을 구입하게 됐습니다. 그 이후로 관람한 영화들의 내용과 감상을 까먹지 않기 위해 블로그를 시작한 게 제 글쓰기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안시환-영화

상념1.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냥 막연하게나마 돌이켜보자면, 적어도 내게는, 글을 쓴다는 것 이전에 본다는 것이 있었던 듯싶다. 영화를 보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보이는 것을 보는 것,’그것이면 족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공부하고, 글을 쓰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 아니 어쩌면 아주 버거운 일이라는 점이었다. 문득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1999)를 마주하던 무렵이 떠오르는데, 난 이 영화를 마주하며 ‘보이는 것을 본다는 것’이 참 버거운 일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나는 지금도 <로제타>의 엔딩 무렵을 정확히 기억한다. 물론 첫 관람 이후에도 여러 번 관람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상하게도 반복 관람 이전에도 이 장면만큼은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본다는 것의 무게감과 함께.

  그것이<로제타>부터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2000년대 초반 언저리에, 그러니까 영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할 무렵, 나는 과연 눈앞에 보이는 것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시달렸다(지금도 그렇다). 분명 내 눈앞에 나타났지만 그만 보지 못하고 사라진 것들. 내 시야의 그물은 이토록 느슨한데, 또 다른 누군가의 시선은 어찌 그리 촘촘한지……, 보이는 것들을 어찌 그리도 잘도 낚아채는지……. 어쩌면 그 한탄과 시기, 질투였을지도. 내가 처음 글을 쓴 이유는.

상념2.

  영화에는 두 종류의 영화가 있다. 시간을 버티는 영화와 시간과 함께 휘발되는 영화. 단 몇 개월도 버티지 못한 채 얼마나 많은 영화가 기억에서 사라지는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마음 한켠에 여전히 잔상으로 침전된 영화들, 그리고 장면들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쌓이면 무게가 된다. 그리고 그 무게만큼 자신을 끄집어 내달라는 요구도 거세진다. 아니, 어쩌면 그것들을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으면, 쌓이고 또 쌓인 그것들이 내 몸을 빵하고 터트려버릴 것 같아 불안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영화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에 또 한 가지 덧붙여 고백해야 할 게 있다. 언제부턴가 글을 쓴다는 일이 빈 우물에 두레박을 던지는 일처럼 느껴진다는 사실 말이다. 참 많은 것들이 쌓인 줄 알았건만 두레박질 몇 번 만에 맨바닥이 드러나더라. 길어도 길어도 마르지 않는 우물은 없는 법이다. 때로 글을 쓴다는 것은 그렇게 마른 바닥을 확인하는 일이고, 그렇기에 X-레이 사진처럼 앙상한 자신을 목격하는 일이다. 그 쓰라림을 매번 확인하곤 하지만, ‘보이는 것을 보는 일’도,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도 멈추기가 참 어렵다.

 

김도형-영화

  유기적으로 연결된 세 개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글을 썼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정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글을 썼다'라는 문장은 크게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태어나서 처음 글을 썼다.' 둘째, '처음 영화 글을 썼다'. 셋째, '블로그에 처음 영화 글을 썼다.' 아마도 질문해주신 분의 의도는 둘째 혹은 셋째 의미에 가까우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첫째 의미로 질문을 해석하면, 저는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글을 쓴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각설하고, 둘째 혹은 셋째 의미로 질문을 해석하여 답을 해보겠습니다.

  처음 영화 글을 썼던 것은 아마도 2009년 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저는 동네 극장에서 상영 중인 〈그랜 토리노〉(클린트 이스트우드, 2008)를 보고 나서 그리 길지 않은 리뷰 형식의 글을 썼습니다. 이것이 제 첫 번째 영화 글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당시에 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누군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그랜 토리노〉가 좋아서, 정확히는 그 영화가 제게 전달한 일련의 감정이 좋아서, 그에 대한 반응으로 무언가를 글로 써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영화 글을 쓰는 행위를 지속하진 않았습니다. 십 대 후반에는 영화 대신에 온갖 문제집만 봤기 때문입니다.

다시 영화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삼수를 할 때였습니다. 그때 여러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랑, 포드, 오즈, 브레송, 고다르, 큐브릭, 무르나우, 르누아르, 안토니오니, 타르코프스키 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찾아본 것은 대학 입학하고 난 뒤였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니, 봐야 할 영화가 줄지어 있다는 것에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때부터 '일단 봐야 한다'라는 생각이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영화를 하루에 두세 편(많게는 네다섯 편)씩 보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그런 생활을 십여 개월 지속하다 보니, 당연하게도 몸에 무리가 왔습니다. 그때가 2018년 여름이었습니다.

  스트라우브-위예와 차이밍량 영화 여러 편 몰아본 것을 끝으로 얼마간 영화를 끊었습니다. 사실, 아예 끊지는 못했습니다. 그 대신에 제가 만들고 스스로 종속되었던 와치리스트(watchlist)에서 해방되어 영화 감상 횟수를 확 줄였습니다. 그리고 대학 입학 이후 본 수백 편의 영화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 영화가 많았습니다. 다종다양한 영화의 이미지와 사운드가 머릿속에서 뒤섞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본 영화를 정리하면서 비로소 '일시정지(pause)의 시간 없이 계속 영화만 보는 것은 무의미한 것 아닌가'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다 저는 결국 '영화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영화를 보는 순간에 감정, 분위기 등을 느끼는 것이 중요한가' 혹은 '영화를 보고 난 뒤에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가' 등의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정답이 없는 일련의 물음에 사로잡혀 있다가 2018년 12월 1일 부산에서 한 영화를 봤습니다. 그 영화가 바로 〈자나 깨나〉(하마구치 류스케, 2018)였습니다. 한 대 얻어맞은 느낌으로 극장을 빠져나온 뒤 서울에 돌아와서 〈자나 깨나〉를 몇 번 더 봤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 어떻게든 반응해야만 할 것 같은 충동을 느낀 뒤에 '일시정지의 시간'을 보내면서 글을 썼습니다. 그 글이 바로 개인 블로그에 올릴 목적으로 쓴 첫 번째 영화 글입니다. 〈자나 깨나〉를 가지고 글을 썼던 것은, 잠깐 멈춰 서서, 〈자나 깨나〉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제가 영화 글을 썼던/쓰는/쓸 이유는 '기억'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혹자는 '기억하기 위해서라면 그냥 영화를 다시 보면 되는 것 아닌가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기억'은 영화(의 이미지)를 붙잡으려는 한 개인의 안간힘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정확히는, '영화(의 이미지)와 접촉하여 (타자와) 공호흡(共呼吸)하기'를 내포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다시 보기'와 '영화 글쓰기'는 다릅니다. 전자와 후자 간에 어떤 위계가 있진 않지만, 후자는 영화 이미지와 사운드 사이사이에 자기 사유의 흐름(flow)을 삽입하는, 혹은 자기 시간을 각인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전자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여하간 완성된 글은, 그것이 짧은 노트가 되었건 긴 비평이 되었건, 공동의 기억과 맞닿을 수 있는 준비태세를 갖추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완성된 글을 공개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는 일일 것입니다. 저는 가급적 완성된 글을 개인 블로그를 비롯한 여러 지면에 공개했고, 앞으로도 (여건이 되는 한) 공개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재민-만화

  처음 글을 썼던 건, 중학생 때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학교 숙제나, 일기 같은 게 아니라 "남들이 봤으면 좋겠다!" 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요. 그때 제가 한창 빠져 있었던 판타지 소설이 있었거든요. 지금도 너무 좋아하는 작품인데, 전민희 작가님의 <룬의 아이들>이었어요. 지금은 완결됐지만, 그때는 공식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면서 발간 소식을 찾아보고, 발간되는 날이면 서점에 달려가서 책을 사고 그랬거든요. 그렇게 책을 기다리는 동안, '이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 거죠.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쓴 글을 코믹월드 같은 곳에서 팔기도 하고, 꽤 인기도 있었는데 입시를 시작하면서 멈췄죠.

  본격적으로 리뷰나 비평을 쓰게 된 건, 대학생이 되고 난 이후였어요. 당시에 팟캐스트를 해보자는 이야길 나눈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와 함께 뭘 해볼까? 하다가 당시의 대학생인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콘텐츠를 리뷰해보자는 얘기가 나왔죠. 그래서 만들어진 게 '웹투니스타'였어요. 그렇게 리뷰를 시작했는데, 그때 쓴 글은 거의 대본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그러던 차에, 지금은 인천대학교에 계신 한상정 선생님이 "그냥 이렇게 방송으로만 하기보다 글을 써서 남겨보면 어떻겠냐"고 조언을 주셨어요.

  그리고 마침 2017년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만화평론 공모전이 생겼고, 그 공모전에 글을 써서 상을 받아 본격적으로 '글 쓰는 일'을 하게 됐다고 볼 수 있겠네요. 처음에 글을 썼던 이유가 '이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면, 지금 글을 쓰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도 이 이야기를 알았으면 좋겠다'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전대한-음악

  내가 들은 음악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기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종종 그 말은 내가 들은 그 음악을 내가 왜 ‘좋은’ 혹은 ‘나쁜’ 음악이라고 판단했는지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당화였고, 때때로 그 말은 내가 들은 그 음악을 내가 들은 바로 그 방식대로 묘사하고 표현하기 위한 기술구였으며, 한편으로 그 말은 내가 들은 그 음악과 내가 흥미로워하는 담론이나 연구를 연결시켜 보려는 실험이었다.

 

이보라-영화

  답답함이 컸던 것 같습니다. 떠올려보자면 중학생 시절부터 뭔가를 계속해서 써왔는데, 머릿속에서 떠돌아다니는 생각들을 방치하기보다 방만하더라도 풀어내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글을 쓰고 싶어지는 것은 뚜렷하게 좋은(혹은 나쁜) 작품을 만나거나 아니면 너무 수상하고 이상해서 말을 얹고 싶어지는 작품을 만날 때, 거기에 대한 제 감상을 끄집어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듯한 기분에 씁니다.

 

윤태균-미술

  제도에 속한 교육기관을 거친 사람들이라면 으레 그렇듯, 학교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읽은 이론서와 문학 작품들은 아직까지도 저의 글쓰기 방식을 강력하게 지탱하는 양식이 되었습니다. 다소 뻔하지만, 칼 마르크스와 발터 벤야민, 빌렘 플루서, 할 포스터와 같은 중요하게 색인된(indexed) 필자들이죠.

  이야기가 잠깐 샛길로 간 것 같네요. 아마 질문은 언제부터 ‘비평문’을 작성했냐 묻는 것 같습니다. 본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제가 인상 깊게 본 전시를 어디에든 저의 언어로 번역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누구에게든 언어의 배출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이 언어가 배출되는 형태는 다름 아닌 글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각 작업도 해보고 영상 작업도 해보았지만, 아직까지 저의 생각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형태는 글입니다.

 

전민지-미술

  질문에서 말씀하신 ‘글’이 비평적 글쓰기라면, 일종의 기점은 ‘부족하게나마 무언가 쓸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단순한 생각이었습니다.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썼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썼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멋진 동기는 없었습니다. 몇 년 전 ‘비’미술 비평 공모전에 제출해 수상한 글이 비평문으로 분류된 첫 텍스트였는데요. 이마저도 전시 리뷰나 큐레이터 노트가 아닌 미술 비평은 아직 쓰지 못할 것 같다는 치기 어린 이유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모든 장르에서의 비평적 글쓰기는 무겁게 느껴지지만, 그때는 석사과정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하던 시기라 우선 미술 비평이라는 이름의 부담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속해 있지 않은 분야에 관해 씀으로써, 조각난 글의 부족한 점에 대하여 스스로 면죄부를 주려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안숭범-영화

  어렸을 적, 아버지가 갱지 묶음을 늘 사다 주셨습니다. 제 기억 속 ‘글쓰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고향집 툇마루에서 갱지에 그림을 그리거나 낙서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풍경입니다. 어머니가 가꾸시던 작은 화단 곁에서 규격에 얽매이지 않는 글자들처럼 자랐던 것 같습니다.

  만약 이 질문이 ‘영화에 관한 글’을 처음 썼을 때의 기억을 묻는 것이라면, 솔직한 답변은 ‘기억나지 않는다’ 입니다. 영화에 관한 글이 아니더라도 일상다반사에 관해 기록(다이어리)하고 하루의 기억을 글로 정돈(일기)하는 습관을 오랜 시간 지녀 왔습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적는다는 게 제겐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삶의 평범한 부분이었습니다. 영화도 기록의 대상이자 기억에 대한 정돈의 계기였습니다. 영화평론가로 등단(2009년)하기 전,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영화평을 꾸준히 올리던 시절이 있긴 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과거에는 몇몇 영화 관련 다음 카페에 비정기적으로 글을 올렸던 기억도 있습니다. 제 글을 세심히 읽어주던 사람들로부터 누렸던 사소한 긴장과 소소한 기쁨. 그것이야말로 제 글이 서툰 얼굴로 자꾸 태어나던 이유가 아닐까요.

 

손시내-영화

  영화가 좋아서 영화 글을 썼다기보다는 글이 좋아서 영화 글을 쓴 게 시작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글 읽는 걸 좋아했지만, 좋아하는 글의 유형은 계속 달라진 것 같고요. 예전에는 아름답고 힘 있는 글이 좋았고, 저도 그런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글 중에서 영화 글을 좋아하고 쓰고 싶었던 첫 번째 이유도 멋진 문장에 끌렸기 때문입니다.

  2000년대 중반 즈음부터 「씨네21」에서 길고 짧은 글을 많이 읽었는데요, 물론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지만 (제 기억에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다양한 글을 썼던) 당시 다들 영화에 달라붙어서 열성적으로 글 쓰는 게 참 재밌어 보였습니다. 그중에 물론 멋진 문장들이 있었겠지만, 정확히 기억나진 않습니다. 아무튼 글이 좋아서 글을 찾아 읽었고, 그중에서 영화 글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고 정리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영화 글을 쓰고 싶었고요.

  별거 아닌, 혹은 나름 신박한 아이디어로 아무렇게나 시작한 글을 어떤 식으로든 끝맺는 게 재밌었습니다. 대부분이 조악하고 급작스러운 마무리였지만요. 또 막상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아름답고 멋지고 힘 있는 문장보다는 무뚝뚝하고 차갑고 개성 없는 문장을 조금 더 좋아하게 됐습니다. 알파고에 영향받았습니다.

 

오진우-영화

  고등학교 시절 언어영역 점수가 안 나왔고 이를 제대로 가르쳤던 선생도 없었다. 자연스레 문학은 삶에서 지워졌다. 그때쯤 다이나믹 듀오(Dynamic Duo)의 1집 <Taxi Driver>가 발매했다. 필사란 단어조차 몰랐다. 듣기 싫었던 과학 시간에 빈 공책에 전곡을 외워서 써 내려갔다. 다음 단계로 다양한 국내외 힙합 곡들을 접하고 개사했고 이후엔 랩의 형식(시의 형식)으로 나의 이야기를 처음 써 봤다. 이유는 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 보고 싶은 욕망이었지 싶다. 이때 체득된 것들이 현재 나의 글쓰기 방식에 녹아있다. 그것이 글이든 영상이든 간에 내가 받은 평가에서도 드러난다. ‘에세이적인 자기 반영성’. 하지만 논리적이어야 하는 평론에서 이게 독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음악을 안 들을 수도 없고 교착상태다.

 

조일남-영화

  제가 처음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막막함 때문이 컸습니다. 2015년 대학교 2학년이던 때, 가정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학자금 대출과 부모님의 실직과 사고, 어린 시절부터 함께 살았던 할머니께서 치매로 요양원에 입원하게 되시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해 도무지 생각만으로 그치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감정을 유형의 무언가로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그 당시에는 글이 유일했기 때문에 저는 글을 쓰는 일을 마지못해 선택했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한겨레 교육 문화센터를 다니며 글쓰기를 배웠습니다. (라기보단 글쓰기를 일종의 배설행위로 생각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 부끄러운 시절이네요)

 

한창욱-영화

  내가 글을 쓸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책을 엄청 읽어야만 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글쓰기나 공부는 내 삶과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어쩌면 늦었다고 할 수 있을 법한 나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되게 그럴싸한 말을 잘하곤 하는 젊은 필자들을 보면 참 부럽기도 하다.

  글쓰기는 내가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그저 생존을 위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생존 이외에 내 삶에 중요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삶일수록 삶에 더욱 의미를 찾게 되는 모양이다. 내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줄 무언가가 필요했고, 영화가 여전히 내 옆에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글을 쓰기로 했다. 그 당시 나에게 글쓰기는 부와 지식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 삶을 의지하는 수단이었고, 도피처이면서도 해방구였다.

 

황지원-미술

  제게 일어난 일들이 감당이 되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자조적인 글들을 작성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일어났고, 상대방은 어땠을 것 같고, 내 감정은 이러한데 나는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이런 내용들이요. 그렇게 하나둘씩 쓰던 글들은 삶 자체에 대한 의문들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문들은 저의 가치관과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과도 계속 얽혀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면에 대한 생각을 그저 휘갈기는 것과 공식적인 글을 쓰는 것은 너무나도 다른 일입니다. 저는 이미지의 세계를 먼저 접하고 난 후 텍스트의 세계로 이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을 통해 이미지를 어떻게 보여줄까 했던 고민이 사진 옆에 적힌 설명, 작가 노트, 비평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결국에는 나의 생각과 감정과 주장을 전달하고 공유하려면 어느 정도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오정은-미술

  미술계에서 활동을 처음 시작할 때 작가와 기획자의 역할을 구분하지 않고 했습니다. 또 전시에 필요한 사항을 자급적으로 충당해야 할 때도 많았어요. 글은 다양한 목적과 용도에 따라 여러 문체와 형태감을 띠고 쓰였습니다. 이후 나름의 이유로 활동의 방향성을 정리하고 글도 형식을 찾아왔습니다. ‘처음으로 글을 썼을 때’라고 질문 주셨는데, 그 시기가 특정한 한 때로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김철홍-영화

  처음으로 글을 썼을 때? 그걸 기억하고 있는 위인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신 기억하고 있는 건 누군가 내가 쓴 글을 처음 읽어준 때이다. 중학교 국어 시간에 한 선생님이 수행평가로 가요를 이용해 단편 소설을 쓰는 어마어마한 과제를 내주셨고, 나는 체리필터의 <오리 날다>와 동화 <미운 오리 새끼>를 믹스해서 소설을 완성시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두 원작의 설정과 메시지를 그대로 가져온 표절작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장면을 묘사하고 대사를 쓴 것만큼은 온전한 글쓰기의 영역이 아니었나.. 훗날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지금은 그 글이 어땠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고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선생님의 내 글에 대한 반응이었다.

선생님이 그 수행평가에 대해 공식적인 피드백을 준 것은 아니었다. 당시 수행평가는 대체로 그랬다. 그냥 내면 끝인 거고 선생님이 몇 점을 줬는지에 대해 묻고 따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사연은 모르겠지만 어느 날 나는 반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고(앞자리는 잘 수 없어서 항상 기피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업은 끝났지만 아직 쉬는 시간은 아닌 어수선하고 개늑시 같은 시간이었는데, 이제 챙길 거 챙겨서 교실을 떠나려는 선생님이랑 눈이 마주친 순간 선생님이 홀연히 내 소설의 마지막 대사를 나 들으라고 뱉으시고 교실을 나가시는 것이었다. 그 대사는 가족들에게 오리로 인정받지 못한 오리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절벽에서 몸을 던지며 나지막이 내뱉는 독백으로, “그러니까 나도 사랑해주세요.” 뉘앙스의 대사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가 아마 정확하진 않지만 글을 쓰는 것의 기쁨, 아니 누군가 내가 쓴 글을 읽어주는 것의 기쁨을 느꼈던 첫 순간이었던 것 같고, 그것이 내가 처음은 모르겠고 두 번째 글을 쓴 이유가 아닐까. 글쓰기란 결국 누군가의 글 읽기로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조재연-미술

  아마도 이런 대답은 아둔한 편에 속하겠지요? 저는 이미 몇 편의 문장들을 쓰고 난 후에야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또 마음에 둔 일이 ‘글쓰기’임을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첫 글을 어떤 연유에서 썼는지에 대해서라면 대답할 수 없습니다. 다만 계속 쓰는 이유라면 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처음 글을 쓰게 된 이유와 다르지 않길 바라봅니다.

  유년 시절부터 어머니는 청력이 좋지 않았습니다. 같이 드라마를 볼 때면 그는 내게 방금 극 속 인물이 무엇을 말했는지 묻고는 했죠. 같이 나눈 대화에도 많은 것들이 그에겐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것을 이따금씩 느끼기도 했습니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으로부터 느낀, 내가 경험한 세상과 그가 경험하는 세상이 다르다는 사실은 제가 많은 것을 불확실하게 느끼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때는 학년이 올라가 반이 바뀌기라도 하면 밖에서 친구를 만나도 인사를 건네지 않았어요. 제가 그를 기억하는 것처럼 그가 저를 기억한다고 확신할 수 없었거든요. 그렇게 잃어버린 친구들도 있었지요.

이젠 결코 어머니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지만, 내가 느끼는 느낌과 기분 그리고 의미가 누군가가 가진 것과 다르다는 사실은 여전히 저를 힘들게 해요. 어렸을 때 잃었던 친구처럼 내일이면 모두가 나를 알아보지 못할까 떨곤 해요. 그리고 이런 슬픔과 두려움은 비단 제게만 있을 것이라 생각하진 못했어요. 그래서 말로 전해졌으나 말이 아니게 된 것, 말 없는 것이기에 읽히지도 발음되지도 못하는 것, 영영 눈에 밟히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저는 쓰고 싶었어요. ‘설명’하고 싶었어요. 내가(그것이) ‘달다’고 하는 미감은 어떻게 혀가 물들 때 발음하는 단어인지, 내가(그것이) ‘아름답다’하는 정서가 어떻게 존재를 흔들 때 뱉을 수밖에 없는 개념인지.

  비평의 목표 중에 하나일 ‘정확하다’라는 말은 제게 어떤 대상에 대해서 결코 대체 불가능할 하나의 단어 내지 문장을 지시하지 않아요. 외려 수없이 대체 가능하도록, 그만큼 그것에 대해서 많은 말들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정해진 자리에서 가장 멀리 밀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제 글이 일상적으로 말하는 ‘정확함’에 대응한다고 자신하지는 않아요. 단, 가장 멀어진 것이 이해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 사이에 있는 것들 역시 이해받아 모든 것이 이해되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기대는 하고 있지요.

 

임종우-영화

  어느 순간을 ‘처음’이라 할 수 있을까요. 여름방학 일기를 썼을 때일까요. 아니면 대학교 논술시험에 답변을 작성했을 때일까요. 학교 레포트를 발표한 순간일까요. 아니면 등단을 하고 나서 쓴 첫 번째 비평일까요. 일기를 썼을 때라 한다면 아무래도 감정의 ‘표현’과 경험의 ‘기록’ 때문일 것 같아요.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문자 언어로 ‘표면화’하는 것, ‘정박’하는 것. 참고로 정박과 박제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생각하는 제가 글을 쓰는 이유를 고려한다면 저는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대화’하고, 누군가를 ‘설득’하려고 글을 쓰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안준형-미술

  아마 제가 처음 발표가 되는 글을 썼던 게 17년이었을 거에요. 당시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기념해서 동료들과 함께 준비한 전시 <배드 뉴 데이즈>를 위해서 썼던 글이었어요. 제목이 좀 긴데, <정정당당하게 선전, 선동으로 승부하기 위한 몇 가지의 변호들>이라는 글이었고, ‘사회주의 프로파간다’에 대한 이미지 비평이었어요. 제목에서처럼 프로파간다 이미지를 흔히 우리가 대하는 것처럼 조롱하고 또는 냉소적으로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나름 진지하게 비평적으로 분석해보고 이를 통해서 나아가 “비겁하게 정정당당하게 선전과 날조로 승부하지 않고 비겁하게 팩트로 승부하다니” 따위의 지독한 반어적 농담이나 통하게 돼버린 오늘날의 탈이데올로기적 환상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고자 했던 기억이에요.

  어쨌거나 미술작가인 제가 이미지의 정치적 힘을 믿고 분석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선전’이란 어쩌면 정치적 이미지 실천의 정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거든요. 비록 그게 오늘날엔 완전히 시효를 다해버린 듯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단순히 ‘주작‘이나 ‘날조’와 같은 선상에 두고서 자유주의적으로 냉소할 수 있는 건 아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바로 그런 선전 행위에 대한 집요한 냉소 그 자체에 오늘날의 진정한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스며들어있는 건 아닐까 했죠.

  그리고 사실 당시에는 제가 글을 쓰는 사람이다기보다는 미술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기도 했었어요. 글이 쓰여진 목적 중 하나도 전시 안에 놓이게 될 제 개인 작업과 보충적으로 짝짓게 될 것이라는 점도 있었고요. 하지만 당시 전시의 기획 의도 중 하나가 작가나 비평가, 큐레이터와 같은 미술 내의 또 다른 분과적 전문영역을 비판적으로 폐지해보자라는 것도 있었어요. 작가인데 글도 쓰고, 비평가인데도 작업도 하고 기획도 못할 건 뭐있을까 그런 거죠. 그런 총체적인 예술가상을 그렸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마도 제가 미술에서 뜬금없이 게임에 관한 글도 쓰고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제가 최근에는 미술보다는 게임에 관한 글을 주로 쓰고 있으니까, 처음 글을 쓰려고 했던 작가로서의 동기나 태도가 지금 와서는 좀 달라졌을까 싶기도 한데요. 하지만 미술 영역에서나 게임 영역에서나 재미 혹은 장르적 완성도를 살펴본다거나 형식주의 비평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매체 혹은 이미지의 정치성과 이데올로기적 연관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제가 글을 쓰는 동기에 크게 달라지진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서정화-미술

  이전에도 크고 작은 몇 군데인가 게재한 적이 있으나, 공적 논의를 위한 시도로는 비평 웹진 ⟪퐁⟫에 게재한 <여성이라는 난제:얄팍한 성기를 넘어선 범주를 상상하기>를 첫 글로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 여성성에 관한 해석을 다투는 학문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문제의 원인을 생물학적 남성의 문제로 환원하며 신본질주의로 회귀하는 경향이 짙어져 이에 대한 개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을 물구나무선 알탕연대처럼 취급하고 스스로 남성이 되는 모습이 충격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인데요. 심지어 어떤 비평가는 2019년의 올해의 작가상 후보 4인이 전부 여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파급력이 있다는 주장을 내뱉기까지 이르렀고, 저는 깊은 시름을 얻었습니다.

  여성의 임파워링은 여성이 남성적 권력을 찬탈하고 그것을 누리는 데 기인하지 않습니다. 이는 데리다와 이리가레이가 정확히 기각했던 지점이기도 합니다. 나열하지 않았다 뿐이지,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남성 세계의 문제를 사건을 이루는 지평의 기저로 두지 않고 생물학적 남성으로만 마구잡이로 환원하면서 역으로 남근주의에 종속되고 마는 참담한 광경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기에, 그것에 대한 일부 환기를 요청하고 싶었습니다.

 

정강산-미술

  몇 년이 지난 후로도 여전히 기꺼이 내 글이라 소개하고 싶은 만큼의 구체성과 문제의식을 가진 채 처음으로 썼던 글은 15년도에 나왔는데, 그건 임근준식의 ‘좀비모던’에 대한 비판이었다. 글의 제목은 “예술가들이여, 미적 형식에 대한 물신을 거부하라: 좀비-모던 담론을 비판하며”였고, 말 그대로 예술의 ‘형식적 갱신’ 가능성을 형식 자체의 내적 논리에서 발견하며, 그와 같은 갱신이 발생하는 순간 이전의 형식들은 구태의연한 과거의 세대적 헤게모니로서 새로운 형식에 자연히 자리를 내줘야 한다는 사고를, ‘좀비 모던’을 경유하여 비평한 것이었다.

  2010년대 이후 북미를 중심으로 대두된 시대착오적 추상회화 경향을 ‘좀비 모던’이라 명명한 시도 자체에는 유감이 없었다. 문제는 그 논의를 전유하는 임근준의 방식이었는데, 그는 좀비 모던이 전적으로 정당한 시각성의 갱신을 담지하며, 새로운 것이기에, 시대성 자체를 선취한다는 식의 오도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임근준만이 ‘좀비모던’을 단지 영미를 중심으로 한 특정의 지역적 예술 양식이 아니라 ‘좀비 모던 시대’로 읽고 있었던 것에서, 나는 어떤 유의미한 갱신도 불가해보이는 상황을 조건으로 하는 동시대적 자폐감을 해소하기 위한 ‘사유의 헛발질’을 봤던 것 같다.

  움직일 곳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성은 멈출 줄도 알아야 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걸 참지 못한다면 이성은 시대의 조건을 처절하게 읽어 내려는 시도 없이 이브 미쇼와 같은 방식으로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비 규정적인 언어유희에 빠지게 되고, 과녁을 잃은 활처럼 대상을 꿰뚫지 못한 채 땅으로 처박힌다. 또한 양자역학이 대두되었다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폐기되어야 할 과거의 것이 아니듯, 새로운 형식은 하나의 모델로서 여타의 형식들과 시각장의 헤게모니를 두고 경쟁하게 될 것이며, 그 경쟁을 판가름하는 것은 전적으로 현재의 사회적 실재에 대한 규정과 유효한 맥락화에 있다는 것이 내 입장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즈음 임근준은 ‘-는 망했고, -는 폐기되었고, -는 파산하였고’라는 식의 단언을 남발했는데, 그들 대개는 사실 따져보면 망하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며, 특정의 예술 사조는 그런 식으로 파산하지 않는다. 새로운 형식이 시대성을 선취할 만큼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이 변화된 세계와 돌이킬 수 없이 결합된 한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미적인 것의 체제를 새로운 것으로 성립시켜주는 유일한 근거는 사회 자체에 있는 것이지, 분과로서의 미술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사유와 실천들은 자족적인 심미주의로 귀결된다.

  아무튼 그 당시의 나는 젊은 작가들과 젊은 비평가들이 우상을 자처하는 자들에게 속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글을 썼다. 특정의 작업 경향이 새로운 것이며 최전선에 있는 것이라는 주장은, 아방가르드와 같은 바의 정치적 윤리가 없이는 통속적인 다윈주의로 전락한다. 특정의 세대가 전적으로 단일한 집단으로서 특정의 미적 방법론을 공유한다는 식의 주장은, 헤게모니적 우세라는 범주 없이는 천박한 맬서스주의에 그친다. 작품의 형식이 예술을 고려함에 있어 가능한 출발점이 된다는 주장은, 형식을 규제하는 사회적 역학의 제 조건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뵐플린주의의 하위호환이 될 따름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 임근준의 글 전반에는 단아함을 가장한 위험천만한 다윈주의와 맬서스주의, 뵐플린주의가 넘실거렸다. 아무튼, 내 처음의 글이 이데올로기 비판의 과정으로 쓰였듯이 내게 있어 예술의 비평이란 근본적으로 정치의 문제였다.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말해진 것 속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을 해석하는 작업이며, 표현된 어떤 것이 그 자신이 표명하는 바와 불일치하게 되는 객관적인 조건들을 발굴하는 일이다. 다른 어떤 대상보다 예술에서 잘 수행되어야 할 이 작업은, 형식주의를 통해서는 이뤄지기 힘든 것이다.


[1] 알랭 바디우, 『존재와사건』,조형준 역,(서울:새물결, 2013) p.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