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위드'는 가능한가: 비평가 22인의 릴레이 인터뷰②

“글을 쓰는 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김철홍-영화

  잘 모르겠다. 글을 쓰는 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그런 게 있을까 싶다. 그런 게 있다면 글을 쓰는 사람이랑 안 쓰는 사람의 삶에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 이런 방식으로 접근해서 생각해보니까 떠오르는 게 있다. 더 피곤하다는 것이다. 때로는 글 같은 건 아예 안 쓰면서 사는 게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냥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면서 살면 되지 왜 글 같은 걸 쓰느라내 소중한 시간을.. 하면서 ‘글쓰기에 반대한다’는 주제로 또 글을 쓴다.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데 글쓰기의 영향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진우-영화

  삶에 영향을 줄 만큼 글쓰기를 하며 살아오지 않았다. 영화 글쓰기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글보다 이미지에 관심이 많았다. 글쓰기보다 다운받은 영화의 이미지를 캡처해서 일명 ‘짤’을 만드는 작업에 열중했다.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것보다 영화 자체가 삶에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글쓰기가 실질적으로 삶에 영향을 미친 것은 대학원 때부터다. 이때부터 글은 나를 평가하는 하나의 잣대가 되었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판치는 대학원에서 블루오션을 찾아야만 했다. 그것이 영상 비평(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이었다. 하지만 올인했던 영상 비평으로 두 번의 고배를 마셨다. 같은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어 도전한 씨네21 영화평론상에서 수상하면서 가장 원했던 상황을 삶에서 맞이한다. 등단하면서 글쓰기가 내 삶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셈이다. 이제 시작이다. 올라가야 한다.

 

전대한-음악

  ‘음악 글을 쓰는 사람’이 나의 주된 정체성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내 이름 앞에 “대중음악 비평가”라는 수식어가 붙는 게 조금 자연스러워졌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쓰고 싶은 문장이 있고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만 쓴다. 그리고 그러한 글쓰기는 많은 경우 즐겁(기만 하)고 보람차(기만 하)다.

 

한창욱-영화

  생각하는 힘이 생겼다. 그것이 가장 큰 영향이다. 글쓰기는 장애물과 수없이 부닥치는 과정인 것 같다. 적확한 표현을 찾는 일, 내 감정과 생각을 파악하는 일, 타인의 것을 쉽게 판단하지 않으면서도 조심스레 짐작하는 일 등, 글쓰기는 매번 허들과 함정으로 가득한 무언가였다.

  그런데 글을 쓸 때 내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계기로 인해 글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건 글쓰기가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내 눈앞에 공백 상태의 표면이 있기에 나는 더욱더 생각하게 되고, 실마리도 찾게 된다. 그 공백을 앞에 두고 나는 그 공백과 대화하거나, 나의 내면과 대화하거나, 상상된 타인들과 대화한다. 그 대화 과정들을 통해 실마리를 발견한다.

  글쓰기가 주는 허들과 함정은 나에게 많은 것을 알린다. 나를 비롯한 누군가의 삶을 말하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단순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래서 더욱더 생각과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 생각과 대화가 있어야 문제에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

 

이재민-만화

  내가 느낀 것, 내가 보는 세상의 프리즘으로 해석한 작품을 글로 풀어내는 것은 굉장히 어렵지만, 사실 즐거운 일이기도 해요. 애정이 없으면 글을 쓸 수 없거든요. 글 쓰시는 분들은 다 공감하실 거예요. 내가 뭔가 대단한 사명감이 있고, 뭐 원대한 계획이 있어도 글을 쓸 때 애정이 기반이 되지 않으면 백지 앞에서 한숨만 쉬다가 창을 닫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만화에 대해서 글을 쓸 때는 그런 경험이 거의 없어요. 정말 쓰기 싫은 작품, 제 취향과 너무나 거리가 먼 작품인 경우를 제외하면요.

  글을 쓰는 건,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애정의 크기를 확인하는 일 같아요. 개별 작품이 아니라 웹툰이라는 더 큰 표현방식에 대한 애착이죠.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이렇게 어떤 추상적인 개념에 애정을 가질 수 있다는 걸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해요. 작품이 주는 즐거움을 쪼개고 파고들어서 분석하고, 그것이 시대의 맥락과 연결되는 지점을 찾아내고, 그것이 설득력을 갖출 때 오는 즐거움이 있거든요. 이런 즐거움을 알려줬죠. 그렇게 함으로써 제가 웹툰에 가지고 있는 애정을 재발견하고, 다시 그게 웹툰의 오리지널리티를 찾아내는 노력으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또 직업인으로 소식을 전하고, 글을 쓰다 보니 경제적인 측면이나 생활의 측면에서도 저에게는 커리어이자 경제수단으로써도 글은 매우 중요한 것이 되었고요.

 

김도형-영화

  ‘잠깐 멈춰 선 뒤 기억하기 위해서'가 제가 영화 글을 쓰는 이유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영화 글쓰기가 제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표면적으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평소처럼 학부 수업 듣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은 시간에 영화를 보고 글을 씁니다. 그런데 유독 올해는, 학교를 다니면서 졸업 이후 머무를 곳을 찾기 위해 바삐 지내느라 이전만큼 영화를 보고 글을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최근에 (이전부터 고민해왔던) '어떤 작품을 가지고 글을 쓸 것인가'와 같은 까다로운 문제가 좀 더 피부에 와닿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는 모든 작품에 대해서 나름의 글을 쓸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부끄럽지만) 능력의 문제 때문입니다. 가령, 저는 프램튼, 베닝, 보베와 같은 작가의 영화 앞에서 무력감을 느낍니다. 이들 영화와 공호흡하기 위해선, 혹은 이들 영화를 가지고 글을 쓰기 위해선 먼저 심호흡을 해야만 합니다. 물론 심호흡을 한다 하더라도 이들 영화에 대한 글을 완성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시간과 돈의 문제 때문입니다. 이는 좀 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임종우-영화

  이 질문 지금까지 정말 많이 받았는데요. 이번에는 아주 솔직하게 답변하도록 할게요. 우선 저에게 돈을 주었죠. 비평을 쓰면 원고료가 생겼고 입사서류, 자기소개서, 공모사업 기획서 등을 쓰면 여러 일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글은 저에게 크고 작은 문화권력을 주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지면을 줄 수 있는 권한, 학생을 가르치고 평가할 수 있는 자리, 어떤 사업을 총괄하고 실무자에게 무언가를 지시할 수 있는 결정권을 가질 수 있었어요. 하지만 큰 틀에서 글이 제 감정과 생각을 자세하게 전달할 수 있으면서도 상당히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도구가 되어주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요. 이메일, 문자, 카카오톡 메시지와 같은 것도 모두 결국 글이기 때문에. 글이 생각 전달이나 소통의 장애물이 된 적이 저에게는 거의 전혀 없었어요. 글을 아주 잘 쓰지는 않지만 동시에 매번 큰 어려움 없이 쓸 수 있다는 게 이제는 작지 않은 선물로 느껴져요.

 

조일남-영화

  글을 쓰는 일을 시작하면서 저는 무지를 드러내고 이를 교정하고 반성하는 데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굉장히 고집스럽고 자존심을 내세우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영화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무엇보다 사람에게 열린 태도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뜻이 맞는 좋은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지금 제 아내가 될 사람을 만났으니 글쓰기가 제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고민해도 글쓰기가 돈이 된 것 같지는 않고 돈보다 중요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 게 가장 큰 것 같습니다.

 

손시내-영화

  어렸을 때 잡지를 많이 읽었기 때문에 고료를 받고 글을 쓴다는 것에 약간의 동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돈 받고 글 쓰는 것 자체가 큰 변화이고 영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이미 시작한 글과 어렴풋한 아이디어를 방치하지 않고 마무리하려고 어떻게든 노력하는 사람이 됐다는 점이 중요한 영향 아닌가 싶네요. 어쩌면 그 과정에서 비겁함만 늘 수도 있는데, 그걸 인지하면서 길을 찾아보려고 애쓰는 게 나름 재밌고 즐겁습니다. 그러고 보면 글쓰기는 제게 솔직해지는 법을 가르쳐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끄럽더라도 가진 패를 다 꺼내 보이는 경험을 하고, 그것들로 엉거주춤 길을 찾아가면서 매번 솔직해지는 방법을 새로 배웁니다.

 

안숭범-영화

  영화평 같은 시를 쓰다가 시인으로 등단(2005년)했고 그로부터 4년이 지나 영화평론가로 등단했습니다. ‘시인’이라는 옷이 아직 어울리지 않을 때 공식적인 지면에 시를 발표하게 됐고, ‘영화평론가’라는 직함에 값을 하는 글을 쓸 수 없을 때 여러 방송과 매체를 감당하게 됐습니다. 그때 쓴 글들은 저의 안목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을 품고 있습니다. 제 글에 제가 없던 시절이었지요. 그런 시절을 천천히 벗어나면서 좀 더 정직하고 정갈한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내 삶으로 뒷받침되는 글을 써야 한다는 각오를 더 자주 만나게 됐습니다. 제가 쓴 글이 생계를 책임져 주거나 예기치 않은 명예를 안겨준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어설픈 제 글이 더 어설픈 제 삶을 부축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윤태균-미술

  삶이라는 단어가 붙잡는 범주는 매우 다양하지만, 통속적인 의미에서의 ‘일상’ 혹은 ‘인생’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글쓰기는 제 주위를 떠돌아다니는 개념들을 붙잡아 조직화하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글쓰기를 통해 비로소 생각이 상징적 언어로 정돈된다고 할 수 있겠네요. 글쓰기를 하는 다른 분들께서도 공감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글쓰기는 저에게 실천적 삶을 가능케 합니다. 글쓰기의 실천이란, 항상 초과하는 언어들의 세계에서 제가 언어를 조직화하는 방식을 자각하고 그 방향으로 저의 사유와 행동을 이끄는 수행입니다. 자신이 딛고 서 있는 실재의 물결에 무작정 휩쓸려 가기보다는, 적어도 조직된 언어라는 조각배라도 얻어 타고 갈 수 있는 것이죠.

 

안준형-미술

  흔히 참된 작가는 자신의 작업과 삶이 어느 정도 일치하고, 그런 점에서 진정성을 갖는다고들 하는데 사실 전 아직까진 제 삶이 작업과 어떻게 일치될 수 있는지 확신은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그런 일치가 가능하긴 할까 싶어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저는 작품의 장르적 완성도라거나 재미를 찾는 일 그리고 형식주의 비평 같은 것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고, 그렇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해서 제 삶 또한 제가 쓰는 글의 영향을 받아 견고해질 것 같진 않더라고요.

굳이 말하자면 전 마르크스주의 문화연구의 전통 속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대상과 세계와의 연관 속에서 모순이나 적대에 집중하는 편이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제 작업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고 마주하게 될 모순이나 적대를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결코 글을 쓰는 정도로는 해소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작업과 삶이 일치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히려 작업을 하면 할수록 작업과 제 삶의 거리는 멀어져 가는 것 같네요.

  미술작가들은 자신의 작업에 관해서 말하기나 텍스트를 요구받을 때 종종 언어로는 충분히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작업을 한다는 식으로 돌려서 답변하긴 하는데, 저는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삶이라는 형태만으로는 충분히 전개하기 어려운 비판 작업이 분명 있기 때문에 글이라는 형태를 빌릴 수밖엔 없지 않을까, 미술작가들의 말을 돌려주자면 작업만으로는 충분히 표현될 수 없는 영역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글 또한 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저는) 글쓰기와 제 삶은 비판이라는 총체적인 작업 안에서 상호보완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 같습니다.

 

정강산-미술

  당연한 말이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여느 사회적 행위와 마찬가지로 특정의 세계의 지평을 성립시키는 행위이고, 따라서 특정한 사회적 관계, 혹은 장(field)의 형성을 동반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내 주변의 사람들 대부분이 글을 쓰는 실천 혹은 그에 준하는 실천, 또는 그와 관련된 실천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이로써 얻은 영향은 아마도 양가적인 것일 텐데, 한편으로는 발화에의 욕망을 강하게 갖고 있는 동료들로부터 많은 영감과 힘을 받은 채, ‘대상을 언어로서 상론해내는 자질’을 심도 깊게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인적 구성의 경로의존성으로 인해 다른 세계의 지평과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연구하며 글을 쓰는 자들을 가리켜 하는 통속적인 표현으로서 ‘먹물’이란 말은 아마 후자의 조건에 고착된 이들이 기꺼이 들어야 할 말일 것이다. 전자를 공들여 신경 쓴다면 자연스레 정규적인 코스를 밟아가며 ‘학자’가 될 것이고, 후자의 한계를 조정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지식인’이 될 것이다. 학자야 어느 때나 존재했던 것이지만, 루카치와 사르트르와 같은 대가들의 특징이 활발한 정치적 참여에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자신의 지평을 무화시키는 실재에 대한 겸손이 지식인의 중요한 덕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좋은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전문성에의 집착 못지않게 그러한 전문성을 무화시키는 충동이 필요할 거라 생각하고 있다.

  한편으로 또 하나의 영향은, 제대로 된 글을 쓴다는 전제하에, 글을 쓰는 행위에서 필연적으로 비롯되는 객관적인 체계의 규명이 더 없는 고양감을 가져다주며, 그 외의 다른 쾌락들과 욕망들에는 다소 의연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글을 쓴다는 것은 적어도 내게 있어선, 내일 죽는다 해도 오늘 슈퍼카를 몰며 미슐랭 가이드로 맛집을 탐방하기보다는, 못 봤던 책을 들춰보거나 미처 상론하지 않은 것을 논증하는 데에 시간을 들이도록 주체의 욕망이 정향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결국 세계라는 불가해한 대상의 심연을 마주한 주체가 취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는 앎을 통한 대상과의 화해이며, 그로서 잠시나마 실재를 간취하는 일이다. 그리고 글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과정이다.

 

전민지-미술

  앞선 답변에 덧붙이자면 마침내 미술 비평(의 탈을 쓴 글)을 쓰는 지금은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 오히려 달라졌습니다. 물론 비평이라는 단어로부터 오는 무게감은 여전합니다. 대체 뭘 그렇게 평가하고 가치를 논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이 고민이 결국 미술의 미래를 파편적으로라도 점칠 수는 있는 것인지, 여러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무언가 계속 쓰고는 있는데요. 이는 글을 쓰는 행위에 관한 생각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바뀌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전에는 완벽한 생각을 온전하게 언어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요즘은 실패한 생각을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상상력의 결점을 돌이켜보곤 합니다. 생각이 성공했다는 것은 단어나 문장 대신 머릿속 생각으로만 남아도 완전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저는 스스로를 ‘완벽하지 않은 완벽주의자’라고 칭하는 편이라, 추상적 측면에서도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일정 부분 삶의 가치관과 연결됩니다.

 

박동수-영화

  글쎄요……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영화를 보고 리뷰나 메모를 남기는 게 일종의 습관처럼 자리 잡은 점은 나름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 같아요. 글쓰기를 배웠다거나 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과거에 써둔, 블로그에 전시된 옛글들을 다시 보거나 할 때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게 되는 순간들도 그런 긍정적인 영향 중 하나인 것 같네요. 아는 것 하나 없이 무턱대고 글을 써왔고, 지금도 블로그에 쓰는 글들은 대체로 그런 느낌인데요. 그렇게 써 내려간 글들을 볼 때 계속 공부하고 배워야겠다는 의욕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앞의 질문에서 적은 처음 글을 썼던 이유처럼, 과거에 봤던 영화들을 기억하는 의미도 크고요.

  작년부터 몇몇 지면에 글을 쓰게 되고, 올해는 막연하게만 생각하던 영화비평상에 당선도 되면서 큰 변화가 온 것 같아요. 기존에는 (블로그나 SNS처럼 공개된 공간이긴 하지만) 내 마음대로 써도, 비문이 있거나 논리와 근거가 부족해도 괜찮은 것을 써왔다면, 어떤 독자층을 상정하고 있는 지면에선 그렇지 못하니까요. 읽는 사람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제멋대로인 글쓰기를 해오다가, 고료를 받고 각기 다른 독자층을 상정하고 있는 지면들에 글을 쓰게 되니 글쓰기라는 행위에 관한 제 태도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꾸준히 들더라고요. 지금은 과도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글을 쓰는 것이 제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조금 더 명확해질 것 같아요. 글쓰기가 제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제대로 생각해보기엔, 아직 제 글의 부족함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를 먼저 고민하게 되는 시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조재연-미술

  글을 쓸 때면 늘 바닥을 보아요. 왜 나는 이렇게 못난 말밖에 할 수 없는지, 왜 더 좋은 문장을 찾을 수 없는지, 어째서 새로운 생각 없이 지난 생각을 반복하는지. 세상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정말 많아요. 그러니 매번 물을 수밖에요. 그럼에도 왜 굳이 내가 써야 하는지를요. 글을 쓴다는 건 매번 제가 얼마나 별로인 사람인지를 깨닫는 일과 같다고 생각해요.

세계, 변혁, 투쟁, 운동, 진리, 희망, 사랑, 윤리……. 이런 터무니없는 단어를 글에서 지껄이다가 생각했어요. 나는 내가 쓰는 것처럼 살고 있을까. 누군가 제 글을 보고 제가 그 문장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까봐, 누군가 저를 좋은 사람이라 오해할까봐 겁이 났어요. 그래서였을 거예요. 철학자의 말이나 개념에서 글을 시작했던 방식에서 저를 고백하듯 토로하듯 글을 시작하게 된 것은. 도무지 세상은, 예술은 어떻다는 식으로 글을 시작할 수 없어요. 다만, 저는 비겁하고 작은 사람이지만 그 비겁하고 작은 사람이 어떻게 저 터무니없는 단어에 도달할 수 있는지 보이고 싶었어요. 가치가 고귀함에서 시작되는 일보다 외려 비천한 자리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질 때, 그 가치에 대한 증명은 더 확고해지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믿으려 합니다.

  물론 그 고백만으로 글을 다 채울 수는 없겠죠. 여전히 터무니없는 단어들로 글을 채우고도 있고요. 그러나 그러다 보면, 그렇게 척이라도 하다 보면 그리고 글을 쓰는 동안 몇 번을 제 바닥을 확인하면 제가 쓰고 싶은 것과 가까운 사람이, 좋은 사람이 언젠가 되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글을 쓰는 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냐고요? 글은 제가 별로인 사람이란 것을 알게 해요. 그리고 별로가 아닌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꿈꾸게 합니다.

 

황지원-미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감정들을 나열한 글은 저의 심신단련에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머릿속의 생각들을 그대로 두면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어떤 상황을 겪으면서 쓸 수밖에 없었던 글들을 몇 년이 지난 후에 다시 보게 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상황을 겪으며 많이 변했고,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끊임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고민과 같은 감정을 나열한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반대로 글 쓰는 행위에 대한 자각이 없던 시기에 쓴 글을 보면, ‘내가 이런 글을 썼나?’, ‘내가 이런 생각을 했나?’하면서 놀라기도 합니다. 또한 미술 작품, 영화 등을 보면서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과 질문들을 글로 옮기다 보면 그 과정 속에서 생각이 정리되고 뇌리에 깊게 박히기 때문에 저의 뇌 한편에 꽤나 길게 머물게 되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글 쓰는 행위는 저의 삶에서 이전의 나를 확인시켜주는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이보라-영화

  자주 생각을 놓거나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고 회피할 때가 잦습니다. 그럴 때마다 글을 쓰는 것이 그런 포기를 재고하게 만들고, 다시 생각을 연장하게, 부지런히 고민하게, 그래서 종종 싸우게 만듭니다.

 

안시환-영화

  나는 필명(으로 글)을 쓴다. 그 이유를 돌이켜보면 여러 이유가 떠오르지만, 아마도 (막연하게나마) 현실에서의 삶과 글쟁이로서의 삶을 분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글에서 주장하는 것들을 현실에서 추구하며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해 일종의 방어막을 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무렵, 나는 현실의 내가 좀 비굴해져도, 글쟁이로서의 나는 독야청정하며 살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절대로 벌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현실에서의 삶과 글쟁이로서의 삶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널 비평을 시작하고 글을 쓰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 사실은 자명해졌다. 단언컨대, 현실이 비루하면 글쟁이로서의 삶도 비루해지는 건 시간문제다. 현실에서의 비루함이 범람해 글쟁이로서의 삶을 어지럽히기 일쑤니까.

  하지만 글쟁이로서의 삶이 숨 막히는 현실에 숨구멍을 내주기도 한다. 숨구멍, 글쟁이로서의 삶은 조금도 대단할 것이 없지만 글을 쓰는 순간은 꽤 자유롭다(라고 착각한다). 때로는 글을 마무리하고 나면 깊은 잠에 빠진다. 불면의 밤을 이겨내는 가끔의 순간들이 있고, 그런 맛이라도 없었으면 참으로 심심했을 것이다. 다행이다. 글쟁이로서의 삶이라도 있어서.

 

이광호-영화

  빨리 돌아가는 것들을 천천히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여유를 챙길 수 있었습니다.

 

서정화-미술

  글쓰기란 생물학적 신진대사의 과정과도 같습니다. 밥을 먹었기에 화장실에 가는 것처럼, 세계로부터 얻은 여러 인상을 제 안에서 순환시키고 내뱉고 있으면 굉장히 느린 호흡을 하고 있다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글쓰기는 삶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세계는 끊임없이 인간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침묵을 유지하기가 힘이 듭니다. 어떤 식으로든 대답을 들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제가 택한 방법은 비평적 글쓰기입니다. 불규칙하고 소란스럽게 다가오는 인상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타인과의 동의를 구할 때, 거리를 조금 좁힐 수 있겠다는 미약한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오정은-미술

  요즘 고정적으로 저널을 기고하는 매체가 있는데 이를 위해 대상을 찾아 리서치하고 섭외하고 취재하는 과정을 주기적으로 합니다. 그 외에는 비정기적인 일로 기관이나 기업, 개인에게서 원고 의뢰를 받습니다. 이들은 모두 원고 마감과 피드백까지 일정한 사이클을 겪습니다. 독립 프로젝트의 일환이나 자발적인 의도를 갖고 쓰는 글도 있는데, 성격은 다르지만, 이들도 주제를 고민하는 것에서부터 지난 전시를 회고하고 자료를 찾아 참조하고 탈고하는 등의 일련의 과정을 겪습니다. 제 삶에서 글쓰기는 계속 무언가를 발굴하고 생각하는 상태를 유지시킵니다. 그 강도는 매일 다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