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위드'는 가능한가: 비평가 22인의 릴레이 인터뷰③

“글을 쓰는 것과 삶 사이를 이어줄, 지속 가능한 연결고리 같은 게 있을까요.”

 

이광호-영화

  애초에 삶과 글이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는 편이라, 그 둘을 동등한 대상으로 두고 다른 연결고리를 찾기보다는 삶 자체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글쓰기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서정화-미술

  위에서 이야기했듯 글쓰기와 삶이 별개의 것이 아니기에, 둘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라는 것이 모순적인 매개라고 생각됩니다. 글쓰기의 지속 조건이 삶 그 자체입니다. 인간이 호흡기를 통해 세계와 유기적으로 연관되듯이, 마찬가지로 글쓰기를 통해 개인과 세계가 맺어지는 방식이 가시화됩니다. 그것이 문자의 탄생 이후로 인간에게 부여된 숙명적인 삶의 형태는 아닐까, 하고 가끔은 고심하기도 합니다. 생각을 글쓰기로 옮기고 나면, 그것은 내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대상이 되면서 매체에 따라 여러 사람들에게 유통되는 별개의 것이 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신념에 따라 생산되는 글들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움직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써나갈 생각입니다.

 

안시환-영화

  위의 질문에 답하며 이미 어느 정도 답을 하기도 했지만, 글을 쓴다는 것과 삶을 사는 것은 그 자체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단어가 ‘짓다’라는 단어다. 짓다, 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참 재밌는데, 우리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또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것, 없을 수 없는 것)에 짓다 라는 단어가 쓰이는 경우가 많다. 옷을 짓다, 밥을 짓다, 집을 짓다. 그러니까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의식주는 모두 ‘짓다’로 표현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죄를 짓다’는 표현이 참 재밌다.

  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글을 짓는다. 아마 이게 글과 삶이 그 자체로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어쩌면 글이라는 건,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삶에 깊숙이 뿌리내린 행위일지도 모른다. 글을 짓는 게 곧 삶을 짓는 일이다. 둘 사이에 매개를 찾으려 하기보단 곧바로 글짓기로 돌격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숨구멍이 되리니.

 

전민지-미술

  삶에 불규칙적으로 등장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기민하고도 유난스럽게 바라보되, 치밀하지는 않은 방식으로 기록합니다. 또한 그 관찰의 결과를 공기가 새어 나간 듯한, 즉 완벽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형태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는 모든 것을 한 발짝 물러선 상태에서 다시 보고 글로 재차 정리하려는 시도이자 습관이기도 합니다. 한편, 외적인 연결고리로는 (끝이 없다는 점에서 ‘지속 가능한’) 데드라인들이 있겠습니다.

 

안숭범-영화

  제겐 영화, 아니 ‘좋은 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좋은 영화는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 순간과 영원, 정주와 탈주, 사랑과 이별, 의지와 운명 사이를 헤매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더 좋은 영화는 끝내 해명되지 않을 그 아포리아를, 영화관 바깥에서 더 고민하게 합니다. 좋은 영화에 최선의 주석을 달아보고자 하는 시도, 그것이 제가 쓴 영화평론의 초석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좋은 영화가 제 삶에 주석을 달아주는 날들을 기도합니다.

 

한창욱-영화

  단연코 ‘영화’다. 영화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글쓰기도 가능하다. 글쓰기 그 자체가 아니라 영화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이다. 나의 애정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글쓰기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 생각한다.

 

윤태균-미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앞의 질문에서도 어느 정도 한 것 같습니다. 삶에서 자신의 글쓰기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비평적 글쓰기는 삶에서의 감각과 그에 대한 사유 경로를 거치는 이중적 번역이기에 자칫하면 삶과 유리되어 그 동력을 잃고 잡지의 지면을 떠돌기만 하는 폐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 그 실천은 큐레토리얼 액티비즘, 정치적 활동입니다. 국지적으로는 일상에서의 사유 경로를 비평적 방법론으로 길들이는 것이죠. 실천이 비평의 존속을 여전히 실재적 삶에서 유효하게 만드는 정당성이라 생각합니다.

 

이재민-만화

  저는 원래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했어요. 그런데 평론을 하다 보니 이것도 번역에 가깝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현대 번역에서 중요하게 보는 것 중에 '독자경험의 일치'라는 게 있어요. 원문 텍스트를 읽던 사람이 목표언어의 책을 읽을 때에도 같은 감상을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관점이 있는데, 이게 제 관점이랑 비슷해요.

  내가 느끼고, 감상을 통해 파악한 것. 그리고 보통 독자들보다 조금 더 많이 보고 파악하는 훈련을 한 독자로서 읽어낸 것들, 그리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풀어냈을 때, 독자들이 공감하는 부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글 쓰는 것과 삶을 이어주는 가장 큰 연결고리는 이 생각인 것 같아요. 웹툰을 그냥 한번 읽고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읽고 나서 남은 것들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더 풍성해지는 것. 그게 문화로서의 시작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그런 시도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만화를 두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정말 많은데, 이 즐거움을 더 많은 분들이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정은-미술

  백아절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춘추시대에 백아라는 이름의 거문고 명인이 있었는데 자신의 악상을 알고 이해하던 유일한 친구 종자기가 죽자, 더 이상 연주를 계속할 의미가 없다며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는 뜻의 사자성어인데요. 글을 쓰는 데에 있어서도 종자기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글의 의도를 알아주는 독자, 경쟁심보다는 유대감으로 창작 환경을 만들어가는 동업 분야의 사람들, 글쓰기를 직업으로 영위할 수 있게 하는 사회 경제적 시스템 등이 복합적으로 종자기를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이보라-영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글을 쓰는 이들에게 가져온 믿음(이라 부를 수 있다면) 같은 것이 깨지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물론 저 자신의 경우도 그렇고요. 연결고리 같은 게 있다면 꼭 함께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걸 함께 고민하고 지속시킬 동료나 커뮤니티가 중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정강산-미술

  순수히 자발적 탐구심과 의지에서 비롯되는 글을 매번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인간인 이상 그런 식으로 계속 작업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글 생산의 지속가능성에서 중요한 것은 촉발의 계기들이다. 대학의 코스웍 과정이나, 세미나나, 일상적이지만 철학적인 대화 등에 우리가 기대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영감을 얻고자 함일 것이다. 여기서는 앞서 말했던 바의, 인간의 지평을 제약하는 조건이기도 했던 인적 구성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즉 누군가 대답하라고 보채고, 질문하고, 청탁하며, 격려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정치경제학적 논의들을 섭렵할 것을 권하고 이내 그와 관련된 저작을 집필하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아는 <자본>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과 별개로, 대상과 질적으로 충실한 시간을 보내는 것 역시 지속가능성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특정의 저작, 혹은 사건을 공들여 읽는 정도에 따라, 우리의 이성은 그 텍스트가 펼쳐내는 실재의 지평에 강도 높게, 혹은 느슨하게 접속한다. 무언가와 시간을 오래도록 진하게 보내면 보낼수록, 우리는 그에 관해서 말할 수 있게 되며, 끝내는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내게 충실함이란 그런 것인데, 이것이 전제되지 않은 채 쓰인 글은 차라리 쓰이지 않는 게 나은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글과 삶의 지속가능한 연결’이 의미하는 것이 글을 통한 경제적 재생산에 관한 것이라면, 역설적으로 현재 지속가능한 연결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참으로 글다운 글은 고용관계 하에서 노무관리의 대상이 되지 않는 한, 본질적으로 주체의 욕망을 해소하며, 주체에게 세계와의 화해를 약속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애초에 물화된 ‘경제’의 보상체계와는 너무나도 떨어져 있는 무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쓴 글이 자본주의적 합리성 하에서 안정적인 경제적 재생산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욕심이 지나친 것이라 생각한다. 자본주의하에서는 축복받은 미치광이 이외에는 모두가 자신이 하기 싫어하는 일로써, 즉 걔 중에 그나마 높은 임금을 주거나 노동 강도가 느슨한 일로써 경제적 재생산을 하도록 구조화되어있다. 조정래조차 작가 생활을 위해 십수 년을 출판업자로서 일했고, 칸트조차 적잖은 기간을 도서관 사서로 구르지 않았나. 만약 글 쓰는 삶의 경제적 재생산에서의 불리함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비판과 지양이라는 과제 이외의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대한-음악

  1) 글쓰기와 개인의 삶을 가장 확실하게 이어주는 것은 ‘원고료’ 아닐까?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고, 그렇게 유지된 생계를 토대로 새로운 글을 쓰고, 그 새로운 글은 또다시 삶을 조금 더 지속시킬 것이고, 더 지속된 만큼 또 글을 쓰곤 할 테니까. 악순환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관계만큼이나 확실한 연결고리가 있을까 싶긴 하다.

  2) 1)과 같은 답변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면, 잘 모르겠다. 이를테면, 글쓰기를 통해 어떻게 나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지속 가능하게 재현하거나 매개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라면, 나 또한 그 답을 듣고 싶다. (사실 나는 이 물음에서 "이어주다"라는 동사의 의미와 "지속 가능한"이라는 형용사 표현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조재연-미술

  올해 3월부터 미술전문지 아트인컬처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전에는 국어 입시 학원에서 6년 정도를 강사로 일했어요. 국어 입시 학원에서 일한 이유는 비교적 적은 시간을 할애하면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과 예술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 까닭이 컸어요. 너무 동떨어진 일을 한다면 다시는 예술계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거든요. 국어 강사만큼 많은 문학을 반복해서 또 집중적으로 읽을 수 있는 직업은 몇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같은 시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그것을 설명해야 하니까요. 물론 다양한 해석은 허락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많은 도움이 됐어요. 윤선도부터 이육사, 김기림, 나희덕, 함민복, 이성복, 진은영 같은 시인들의 문장은 내가 써야 하는 문장이 무엇인지 늘 가르침을 주곤 했어요. 지금도 제 글에서 그들의 문장이 살아 있어요.

  아트인컬처는 비평을 쓸 때부터 꿈처럼 바랐던 곳이었어요. 글을 쓰는 것이 생업인 삶, 그 연장선에서도 그랬고, 의미 있는 일을 ‘함께’ 한다는 것이 많이 그리웠어요. 늘 혼자서 일을 해왔기에 동료가 있었던 적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꿈보다 더 좋은 동료들을 만났어요. 가난한 능력 탓에 좌충우돌하고 애를 먹을 때가 많지만 소중한 시간들을 소중한 사람들과 보내고 있다는 건 확실해요. 함께 혹은 홀로 전시를 보고, 그 전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가 쓴 글과 타인이 쓴 글에 대해서 의견을 주고받고. 지금의 이런 일상이 지속 가능하길 바라요.

  어느 날 글을 쓰는 것과 삶 사이를 이어줄, 지속 가능한 연결고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글을 계속 쓰고 있기를 바라요. 어떤 연결고리가, 무엇이 저를 쓰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저이기 때문에 쓰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도 글을 쓰는 것은 피치 못할 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걸요.

 

김철홍-영화

첫 번째 항목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면 글을 쓰지 않을 것 같다. 독자가 있다는 것이 글쓰기와 삶을 이어줄 유일한 연결고리라고 생각한다. 내 소설의 오리처럼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나 또한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을까.

 

임종우-영화

  지금 저에게는 그런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을 (되)찾고 싶냐 묻는다면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내적동기‘가 필요한 것 같아요. 무언가를 발화하고 싶은 마음, 정리하거나 기록하고 싶은 욕망, 누군가에게 어떤 사실을 스리슬쩍 고백하고 싶은 속내, 정체 모를 미래의 독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겨야만 할 것 같은 기분 등이요. 내적 동기가 완전히 사라진 글은 공허할 테고요. 공허한 글을 오래도록 반복하게 된다면 그때에는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펜을 내려놔야 할 거예요. 저는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기도 합니다.

 

황지원-미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제가 글을 쓰면서 살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항상 글 주위를 기웃거리고는 있었지만, 논리적이고 공식적인 글의 세계에 입문하면서 많은 고통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계속 삶의 혼란은 지속될 것이고, 배움 또한 끝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1세기를 영상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글은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글자와 글자 사이에 저는 필연적으로 오독할 운명에 처해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 쓰는 행위란 제 삶에서 해독제 같은 역할을 합니다. 계속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저는 계속 글을 작성할 것 같습니다.

 

박동수-영화

  지속 가능한 글쓰기엔 무엇이 있을까요? 사실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이긴 합니다. 최근 들어 이런저런 일을 하게 되면서 블로그에 쓰던 영화 리뷰를 잠시 멈추고 있습니다. 3주 정도 됐는데요, 그렇다고 글을 안 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감이 정해져 있는 원고도 있고, 지금 이 인터뷰도 서면으로 진행되다 보니 일종의 글쓰기라고 할 수도 있겠죠. 여하튼 글쓰기와 삶 사이를 계속 이어줄 지속가능성이라면 블로그와 같은 개인적인 공간에 꾸준히 뭔가를 남길 수 있을 동력을 잃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러프한 아이디어가 되었든, 별거 아닌 메모가 되었든, 원고의 재료가 될 시시콜콜한 감상이 되었든, 그것을 완전히 멈추게 된다면 지속이 끊긴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것 같아요. 적어도 제 개인적인 상황에서는 말이죠.

 

조일남-영화

  글쓰기와 삶 사이를 이어주는 지속가능한 연결고리라는 말의 의미가 저는 조금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사유하고 이를 글로 표현하는 일이 삶과 조금도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저의 많은 글들은 작업실이나 혹은 특수한 공간에서 쓰이지 않고, 출퇴근 길과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혹은 편지를 쓰면서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아마 계속해서 글쓰기를 이어나갈 수 있는 그런 연결고리라 한다면, 돈도 벌면서 영화에 관한 글을 계속 쓸 수 있는 그런 조건을 고민해보는 단계라 편의적으로 이해해 보겠습니다. 저는 지금 프로그래밍 언어를 공부하면서 영화계와 출판, 문학 업계보다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비로소 한 사람의 노동자로 대우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처음 프로그래머 일을 하기로 결심했을 당시에는 단순히 40세 이후에 대학원 진학에 들어갈 학비를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겼다면, 저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저에게 자신감과 보람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보다 영화에 관해 덜 고민하고 영화에 거리를 두고 있지만, 오히려 저는 알고리즘이라는 학문을 배우면서 하나의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확신을 계속 하게 됩니다. 컴퓨터와 끊임없이 나누는 변증법, 혹은 상호 작용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고 이런 어떤 기계장치와 벌이는 대화가 브레송, 홍상수, 기요시의 작업들과 엮어서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으로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는 제가 이 일을 하면서도 영화에 관한 글쓰기를 지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는 저만의 방법을 찾은 게 아닐까 라는 개인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손시내-영화

  생활인(?)으로서 글을 계속 쓸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해했습니다만, 한참 생각해봐도 뭐라 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아직 쓰지 않은 글 때문이 아닐까요. 영화 글이 시나 소설 같은 창작물은 아니지만,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상태로 쓰기 시작한다는 점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내용으로 진행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글을 시작해도 처음에 떠올린 아이디어가 글에 아예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그럴 때 느껴지는 글의 물질성 같은 게 재밌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구겨 넣고 싶어서 접속사도 바꿔보고 단어도 바꿔보고 그러다 결국 실패하면서 혹은 일부 성공하면서 하나의 글이 완성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아직 쓰지 않은 글은 어떤 모습일지, 그 글을 쓰면서 어떤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될지 지금으로선 모르는 것이고, 그걸 알고 싶어서 다음 글을 쓸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다만 먹고 살아야 하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게 결국 필자의 의지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고 생각하면 슬픕니다. 그렇게 보면 연결고리는 아직 찾지 못한 게 아닐까 합니다.

 

오진우-영화

  내게 있어 글과 삶 사이의 연결고리는 영화다. 내가 내린 비평의 정의 중 하나는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로 작품을 보고 이를 글로 뽑아내는 작업을 말한다. 글과 삶 그리고 영화가 연결되어있지만, 현재 썩 잘 굴러가지 않는 느낌이다. 그것을 굴러가게 만드는 것은 돈이다. 어떤 대상을 비평을 한다는 것은 결국 나의 글도, 영상도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증명하고 평가를 받고 이를 통해서 원고료를 포함한 수익을 내는 것. 이것이 직업으로서의 평론가의 삶의 조건이다. 그 조건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김도형-영화

  영화 글을 쓴다는 것은, 그 글을 쓰는 시간만큼 다른 공부를, 혹은 다른 일을 하지 못하고, 또 다른 영화를 보지 못함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다른 것들을 압도할 만큼 영화 글쓰기가 어떤 가치들—가령, 학술적 가치, 경제적 가치 등—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계속 글 쓰는 작업을 이어 나가기가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지속 가능한 연결고리는 '가치 생산'(혹은 '돈')이 아닐까 싶습니다. 학생 때가 아니고서야 상당한 시간을 들여 양질의 영화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있을까에 대한 제 견해는 다소 부정적입니다. 물론 영화 글을 쓰기 위해 나름의 노력은 하겠습니다만, 적어도 영화 이론 관련 대학원을 다니면서 (그나마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연구목적의 글을 쓰거나 공모전 당선 이후 비평가 타이틀을 얻어 돈을 받으면서 글을 쓰지 않는 이상 글 쓰는 작업을 성실하고 꾸준히 이어가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보고 싶은 영화를 어떤 제약 없이 보는 것도 영화 관련 일을 업으로 삼지 않는 이상 힘든 일이죠.

 

안준형-미술

  위에서 말한 것과 동일한데요. 저는 쓸수록 견고해지는 형식주의적인 글보다도 모순을 드러내는 글을 쓰고자 하는 편이고, 종국에는 그런 모순이 비판적으로 청산되길 바란다는 점에서 제 글쓰기가 지속되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 싶어요. 마르크스주의 문학 평론가인 ‘테리 이글턴’도 어떤 책에서 이런 비유를 들더라고요, 마르크스주의자는 불교 신자나 억만장자가 되는 것과는 다르고, 차라리 의사와도 같다고. 의사가 환자들을 치료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업무를 박탈하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자들 또한 자신의 목표가 달성되어 스스로가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라고. 그런 점에서 몇십 년 후에도 마르크스주의자나 여성주의자가 남아있다면 그건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 이글턴은 이야기를 하는데, 저 또한 이 이야기가 크게 동의가 되더라고요.

  사실 저도 예전엔 내가 앞으로도 계속 작가로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하긴 했는데 이젠 그런 생각은 딱히 없어졌습니다. 글을 쓰고 작업을 하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노동이라고 부르는 고용 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기도 하고, 글을 쓰는 동기 또한 비판하고자 하는 세계의 적대가 남아있는 한 앞으로도 꾸준히 남아있을 것이고, 계속해서 자율적으로 글을 쓰거나 작업을 하겠죠. 물론 글을 쓰는 삶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 물었을 때는 단순히 글을 쓰고자 하는 동기나 동력의 지속성뿐만이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생계에 관련한 현실적인 물음 또한 있는 것으로 알아요. 하지만 거기에 대해선 질문이 현실적인 만큼 답변도 현실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말하자면 글을 쓰는 것과 삶 사이를 이어줄 무언가를 찾는 것부터가 아이러니라는 거죠.

  생계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전업이라는 환상은 일찍이 거둔지 오래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저는 글을 쓰면 쓸수록 제 작업과 삶은 멀어져만 간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저의 삶의 영역을 책임질 직업을 따로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