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초고는 방언이다 The first draft of anything is vernacular

 

  나는 창작자다. 사후에 무언가를 논평하기보다는 먼저 나서서 일을 벌이는 것을 선호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처럼 미술 비평 웹진에서 원고요청이 들어왔으니, 미술계의 글쓰기 행태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다소 인상에 근거한 직관적인 의견들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파편적인 인상도 오랜 시간 중첩되면 풍경이 되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완고한 풍경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직관일는지도 모른다.

 

*

 

  나는 스물아홉에 미대에 입학하였다. 대부분의 만학도가 그렇듯, 나이에 걸맞지 않은 열정과 새로운 자극에 대한 기대감과 실제 목도하게 되는 풍경의 남루함이 이인삼각으로 덜커덕대는 상태로 학부 시절을 통과하였다. 스스로와 주변에 대해 냉소적으로 거리를 두는 편은 아니었으므로 이 동네, 그러니까 미술 씬에서 내가 보고 듣는 참으로 많은 것들에 대해 놀라워했던 기억이 있다.

 

  특히 놀라웠던 것은, 미술계에서 생산되는 글의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전시 서문들, 작품론들, 작가론들, 대담들, 인터뷰들, 에세이들에, 그것과는 별개로 전국의 미술 석사 미술 박사들이 가열차게 쏟아내는 동시대 미술 관련 논문들까지 생각하면 정신이 돌아버릴 정도였다. 뻥이다. 사실 정신이 돌아버릴 정도로 글들에 천착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첫째, 나는 바쁘다. (과제가 많은데 술도 많다.)

둘째, 글들은 구리다. (말이 많은데 재미가 적다.)

다시 말해, 나는 바쁜데, 글들은 재미가 적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미술과 관련된 그 온갖 글들을 공들여 읽어 봤자 남는 게 많지 않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 글들은 ‘공들여야’ 읽을 수 있는 글들이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내 문해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면, 그 글들의 가독성이 떨어졌다는 말이다.

처음 말하는 건데, 나는 문해력이 좋은 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씬에서 생산되는 글들 중 칠 할[1] 정도가 읽기 힘든 글이었다. 무슨 생각을 바탕으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생각이 느슨한 건지 문장이 빡빡한 건지 헷갈리게끔 글을 쓰는 무슨 특별한 기술 같은 게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습관적으로 쓰이는 텅 빈 관용구들[2]이 무표정한 얼굴로 글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글 읽는 눈을 사정없이 찌르는 설익은 개념어들과 성급한 인용구들은 반죽이 덜 된 밀가루로 만든 쓰러져가는 형태의 케잌 표면에 공들여 세공한 크림장식 같아 보였다.

 

  그나마 크림장식이 얹혀있으면 다행이지. 때로는 통삼겹살이나 신발 끈, 반건조 오징어 같은 게 얹혀있기도 했다.

 

  …반건조 오징어로 장식된 케잌이라고…? 와 씨, 그거 쿨한데…? ㅋㅋㅋ

 

  근데 ㅋㅋㅋ도 잠깐이지. 인간은 반복되는 자극에 대해 무뎌지게 되어있으므로 내가 느낀 (불)만족도 그냥 이 동네 글들의 톤 앤 매너 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모른 척, 내 창작에만 몰두했었다. 하지만 성기게 봉합한 솔기는 언젠가 반드시 그 아가리를 벌리게 마련. 학부 마지막 해, 내심 두근대는 마음으로 참여하게 된 첫 그룹 전시회의 전시 서문을 읽은 내

분할친구[3]의 감상평은, 나의 덜떨어진 설레임을 보기 좋게 박살 내버린 것이었다.

 

  “동규야 ㅋ 근데 이건 어느 동네 방언이냐?”

 

  …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가리가 쩍 벌어졌다. 모른 척하기가 힘들어졌다는 말이다.

 

*

 

  모든 관습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여전히) 유효한 것일 때, 관습은 타당한 것이 되지만 적시에 그 이유를 따져 묻지 않는 관습은 인습이 되고 만다. 어떤 행태를 무의미하게 반복하게 된다는 거지. ‘미술 관련 글들은 읽기 어렵게 쓰여지곤 한다’는 사실을, 오랜 시간 반복되어 온 관습이라 가정해보자. 우리는 대체 왜,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발생시키는 데에 골몰하는 대신 모호한 관점을 과장된 개념으로 덧바르는 듯한 형태의 글들을 이리도 오랜 시간 동안 가열차게 생산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순수 창작 영역의 특징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순수 창작 영역으로써의 동시대 미술이 발생시키는 커뮤니케이션의 양상은, 영화, 디자인, 웹툰 등 대중문화 영역의 시각예술 장르들이 발생시키는 커뮤니케이션의 양상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순수 창작은 여타 대중적인 시각문화 영역의 창작물들과는 달리, ‘서비스’를 중심으로 기획되지 않기 때문이다. 감상자 (혹은 소비자)의 니즈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창작하기보다는 창작자/기획자의 내적 욕구나 특정한 미학적 담론 등, 이 씬 내부에서 통용될 만한 가치와 동기를 바탕으로 창작하고 소통하는 것이 관습화 되어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습에 익숙하지 않은, 게다가 넷플릭스와 아이폰과 네이버 웹툰으로부터 받고 있는 하이퍼 서비스에 익숙한 비 전문적인 관객들이 느끼기에는, 이 씬의 창작물을 매개하는 과정에서 통용되는 언어들이 소통 불가의 특수한 ‘방언’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혹은 위와 같은 상황에 기인한 반동적인 욕망으로써, ‘순수 미술은 가장 전문화된 시각문화’라는 위상을 점유하기 위해 글을 난해하게 쓰는 것일 수 있다. 시장이 온갖 전략을 통해 기대감의 버블을 만들어 내듯, 미술씬은 미술 작품들이 굉장히 심오하고도 중요한 미학적/정치적/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거품 같은 문장들을 만들어 낸다. 시장의 버블, 즉 과잉 기대치가 더 큰 자본을 회전시키기 위한 공격적인 전술이라면 미술계의 버블, 즉 엘리트적인 과잉 의미화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규명하기 위한 방어적인 전술이다. 우리는 작품의 의미(혹은 무의미)를 뻥튀기고 전시의 성취(혹은 실패)를 뻥튀기고 프로젝트의 무게(혹은 가벼움)를 뻥튀기고 커뮤니케이션의 질(혹은 양)을 뻥튀긴다. 여기저기서 뻥튀기도 아닌 것을 자꾸 뻥 뻥 튀겨재끼니까 이 널븐 세상천지에 꼬소한 냄새가 가득하고 뻥튀기 조각을 뽀각 해서 입에 쏩 넣고 혀 위에 올린 채 오솔오솔 녹여믁으면 어렴풋이 미묘하게 단맛이 살짝 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랑말랑 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만! 미안합니다 민망합니다 허기는 가시지가 않구요. 다만 약 올리듯 세상 천지에 꼬소한 이 냄새만이 우리가 참으로 뻥산주의 적으로다가 뻥유할 수 있는 뻥뻥적인 신호인 것이다. 미술계라는 폐쇄회로 안의 이 모든 신호들은 이 회로가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내부자들끼리 설득하는 언어들로 구성되어있는 건지도 모른다. 비록 팔리지 않고 각광받지 않을지언정 우리는 저들과는 다르다는 집단 무의식의 발로!

 

  …

 

  … 말이 좀 심했다. 사실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쓰다 보니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 이게 참 문제다. 한 문장이 다음 문장을 물고 들어오는 것이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갛고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이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원숭이 엉덩이가 백두산은 아니잖아? 정신 놓고 쓰다간 그야말로 (백두)산으로 가는 거지. 글을 쓰다 보면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 주의해야 한다. 이런 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가기 전에 개요를 충실하게 작성하기를 권한다. 개요 쓰기의 요령은 다음과 같다 :

 

ⓐ 원고 전체를 꿰뚫는 중심적인 논지를 상정한다.

ⓑ ⓐ의 논지를 이끌어갈 키워드들을 도출한다.

ⓒ ⓑ의 키워드들 간의 관계/위상을 논리적으로 파악한다.

ⓓ ⓒ에서 파악한 구조를 바탕으로 글의 구성을 잡는다.

개요를 쓰는 데에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이 좋다. 이 과정을 충실하게 이행한다면, 주제/구성/문체라는 글의 3요소 중 주제와 구성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개요 쓰기의 단계에서 구체화될 것이다.

 

  개요의 작성을 마친 후 초고 작업에 돌입하게 되는데, 초고에서는 속도가 생명이다. 빠르게 문장을 쏟아내다 보면 ‘문체’, 즉, 문장의 특질이 저절로 형성되기도 한다. 리드미컬하고 감각적으로 문장을 흩뿌려보자. 다소간 비문이나 비약이 섞여 있어도 괜찮다. 어차피 우리에게는 퇴고라는 마지막 단계가 남아있다. 헤밍웨이의 말을 명심하라 :

 

“The first draft of anything is shit.”

 

  뭐, 편히들, “모든 초고는 쓰레기이다.” 정도로 번역하곤 하는데, 사실 영단어 ‘shit’은 ‘똥’이라는 의미 외에도 ‘겉치레, 거짓말’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글쓰기의 마지막 단계인 퇴고는 나의 글이 겉치레 혹은 거짓말의 상태에 놓여있지는 않은지 점검하는 과정이다. 허식의 문장들을 걷어내라. 많이 걷어낼수록 농밀해진다.[4] 남기기로 결정한 문장들은 가능한 오랜 시간 매만지고 섬세하게 수정하되, 필요하다면 과감해져라. 불가피하다면 퇴고 단계에서 글의 전체 구성에 메스를 들이대는 대수술을 감행하는 것도 괜찮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고는 글을 쓰는 과정 중에서조차 진보하기 때문이다.

 

*

 

  나의 바람은 소박하되 명쾌하다. 화가가 색채에 빠져들듯, 조각가가 흙을 매만지듯, 사진가가 카메라를 사랑하듯, 미술계의 필자분들이 언어를 절차탁마하기를 기대한다. 장식적이기보단 정확하기를, 신경쓰기보단 집중하기를, 중성적이기보단 설득력 있기를 바란다. 더 좋은 글을 쓰겠다는 욕망으로 이글이글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당신들의 성취를 통해 실제로 작품의 의미를 소개하고 실제로 관객의 영감을 자극하고 실제로 창작자의 나태를 고발하기를 바란다. 무서우리만치 효율적으로 작동하기를 바란다. 나는 진심으로 나의 사고를 진보시키는 문장들을 원한다. 모두들! 노력하여!! 내게!!! 떠멕여달라!!!

 


[1] 수치의 근거 : 내 느낌.

 

[2] ex) ‘질문을 던진다’, ‘실험을 지속한다’, ‘모호함을 포착한다’, ‘반성을 촉구한다’, ‘인식을 확장한다’, ‘경계

         를 더듬어 나간다’, ‘태도를 견지한다’, ‘감각을 일깨운다’, ‘타자성을 극복한다’, ‘형상을 탐구한다’, ‘망

         각에 저항한다’, ’공공성을 획득하다’, ‘조형성을 구축한다’, ‘세계를 사유한다’, ‘고통을 마주한다’, ‘차

         이를 가로지른다’, ‘공간을 표류한다’, ‘표면을 직조한다’, ‘사물에 주목한다’, ‘관계를 연구한다’ 등등

 

[3] 콩 한쪽도 나눠먹는 ‘분할(分割)’친구.

 

[4] 이 단계에서 글 전체를, 아니, 글을 쓰는 일 자체를 걷어낼 수도 있다. 세상에는 장식적인 문장 외에는

    붙일 말이 없는 작품이라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뒤늦게라도 깨달았다면 더 늦기 전에 원고를 포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