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전히 귀귀의 만화를 본다는 것은

《귀귀 개인전》 전시 포스터

 

00.

  웹툰 작가 귀귀는 흔히 병맛 만화의 대부로 여겨지곤 한다. 그의 초기 만화인 ‘정열맨’과 ‘열혈 초등학교’에서 두드러졌던 특유의 미학은 당시 한창 유행하고 있던 ‘병맛’의 문화를 관통하는 듯 보였다. 한편으로 그는 굉장히 문제적인 작가로 또한 알려져 있다. 이는 그의 만화가 병맛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굉장히 이질적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병맛’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대상에 대한 판단 자체를 굉장히 혼란스럽게 한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가 무언가를 문제로서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과 문제와의 개연성을 헤아리고 그에 따른 맥락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병맛’은 그와 같은 맥락화의 과정을 전적으로 어지럽게 한다. 그래서 ‘병맛’이 어떤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연루되는 일은 굉장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같은 병맛의 특징에 관해서 또 다른 병맛 만화의 대부중 하나인 이말년은 이렇게 말한다. “만화 안에서 일어나는 아이러니한 상황들(예를 들어 ‘자연왕’편에서 자연왕은 자연을 수호하겠다고 외치지만 자연을 더 괴롭히는 인물 등), 혹은 전혀 개연성 없는 사건 전개나 각종 패러디라고 본다.”[1]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마음을 비우고 즐기듯이 그리면 된다. 병맛은 병맛으로 즐겨야지 논리적으로 분석하려 하면 더욱 재미없어진다.” 작가님의 말처럼 ‘병맛’은 주로 ‘전혀 개연성 없는 사건의 전개’를 다루고, 때문에 이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려 드는 일 또한 무가치한 일로 만든다. 그래서 지금 이 지면이 조금은 죄송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귀귀 작가는 굉장히 뜨거운 문제적 맥락 속에 놓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가 문제적인 작가로 여겨지는 것 자체가 진짜 문제의 단서는 아닐까? 나는 귀귀 작가가 흔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병맛의 시공 속에 놓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찾아볼 수 있는, ‘엽기’라 불리던 문화적 시공과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01.

  2000년대 초반이다. 어렸을 적 경험한 인터넷의 풍경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던 기억이다. 지금만큼 인터넷 이용에 관한 규제가 구비돼있지도 않았고 사람들의 저작권 의식도 미미했다. 그래서 말 그대로 검색만 하면 뭐든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만 말하면 언뜻 해방적이고 되게 좋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점을 이야기해야겠다. ‘뭐든지’ 보여주는 인터넷 세상 속에서 이 ‘뭐든’의 범주에는 꼭 좋은 것뿐만이 아니라 최악의 것들 또한 포함돼있기 마련이다. 특히 당시에는 엽기 문화라는 것이 유행하여 저 최악이라는 것의 범주가 꽤나 심화되어 가던 참이었다. 사전에 따르면 ”비정상적이고 괴이한 일이나 사물에 흥미를 느끼고 찾아다님“[2]이란 의미를 가진 ‘엽기’는 오늘날 흔히 ‘병맛’이나 ‘밈’이라고 불리는 문화의 양상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괴이함에 대한 애호 경향’과 견주어도 전혀 꿀리질 않았다.

 

  당시의 인터넷 공간이 가진 또 다른 특징은 아직 이용자들 간의 분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늘날 특정한 커뮤니티들이 이용자들의 문화적 정체성이나 계층, 심지어는 정치적 성향에 의해 분리돼 있기 마련인 모습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이용자 간의 경계가 희미했던 만큼 그 안의 컨텐츠들 또한 온갖 것들이 경계 없이 뒤섞여 있곤 했다. 그와 같은 무분별한 뒤섞임이 얼마나 심했냐 하면, 초딩들이나 즐겨보는 유머사이트나 게임 커뮤니티에 대놓고 포르노가 올라가 있던 식이었다. 사실 초딩들이 일찍부터 포르노를 본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포르노가 ‘스캇’이나 ‘구토’물과 같은 하드한 패티시를 포함한 종류의 것이라면 그건 좀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당시에 인터넷을 이용한다는 건 (지금도 부분적으로 그렇기는 하지만) 예기치 않게 온갖 부적절하고 끔찍한 것들을 마주치는 상황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온갖 엽기들이 경합하고 있던 상황 속에서도 나름의 왕좌를 차지하게 된 전설적 컨텐츠들이 몇 존재했다. 그리고 이것들을 떠올려보는 일이 그때의 인터넷 풍경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그때 인터넷을 이용했던 유저들이라면 한 번쯤 ‘미트 스핀’이나 ‘노란 국물’, ‘갈색 국물’ 따위로 불리는 것들에 관해서 들어보았거나 보게 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각각 ‘게이 포르노’, ‘분뇨’와 ‘구토’, ‘혈흔’ 애호 등을 포함한 하드한 패티시 포르노의 푸티지였다. 그때는 이런 종류의 사회적 금기들을 담은 컨텐츠가 그냥 평범해 보이는 게시글에 낚시로 올라와 있곤 했다. 그저 무방비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하드 포르노의 단편뿐만이 아니라 흔히 ‘고어’, ‘스너프’물로 분류되는 것들 또한 심심치 않게 등장하곤 했다. 당시 하드한 패티시의 포르노와 고어물은 엽기 문화의 양 극단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시절 내 친구 중 하나는 그런 끔찍한 것들을 우연히 마주치는 일로는 부족했는지, 직접 그러한 컨텐츠들의 출처를 궁금해했고 찾아보길 원했다. 그러다가 찾게 된 한 사이트의 이름이 ‘베스트 고어’였는데, 이름처럼 베스트 한 ‘고어’ 및 ‘스너프’ 영상들이 아카이브 되던 사이트였다.

 

  사이트의 메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게시돼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죽음을 희화화하거나 경시할 목적이 아니라 언제나 죽음이 우리 곁에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이런 사이트를 운영한다'라나 뭐라나. 그리고 베스트 고어의 메인 컨텐츠중 하나는 바로 '올해의 죽음'이란 것으로, 그 해에 발생한 온갖 고어한 죽음이 담긴 영상들에 순위를 매기는 것이었다. 사이트의 이용자들은 올해 베스트 죽음의 순위를 매기기 위해서 첨예한 논쟁까지 벌이길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선정한 영상을 지목하며 왜 이 죽음이 더욱 베스트한 죽음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온갖 주장을 피력하곤 했다. 이제는 그게 무슨 내용이었는지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최대한 기억을 좀 더듬어보자면 대충 이런 내용들이었다.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의 스펙타클함이나 사건이 벌어진 이후 나타나게 되는 (반쯤) 시신의 참혹함 등이 그들의 논쟁에서 유의미하게 설득되고 점수를 획득할 수 있었다. 또 죽음의 유형을 분류하기도 하였는데, ‘사고’, ‘살해’, ‘테러’, ‘자살’ 등의 카테고리가 기억난다. 말하자면 죽음 장면의 스펙타클함뿐만이 아니라 그에 도달하게 된 서사까지 포함하여 아주 복합적으로 논쟁이 진행되었던 셈이다. 아마도 죽음이란 주제에 있어서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집요한 사유가 오가던 곳이지 않았나 싶다. 그들은 죽음이 끔찍하고 비통한 만큼이나 동시에 우스울 수도(희화화 하지 않겠다고 한 것 같지만), 무의미할 수도 또 매혹적일 수도 있음을 아는 듯했다.

 

  이 같은 고어 분야에서도 앞서 한 국물 시리즈나 ‘미트 스핀’과 같이 컬트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 컨텐츠가 몇 있는데, 대표적으로 ‘레바논 다이빙’이라 불리던 것이 떠오른다. 이는 총 두 개의 영상으로 되어있었는데, 첫 번째는 사건의 발생을 담고 있다. 어떤 남자가 물가에 다이빙을 시도하다가 그만 지상과의 경계면인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보다 끔찍한 것은 다음인데, 이어지는 두 번째 영상에선 사건 발생 이후로 추정되는 사고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수술실로 옮겨진 듯 보이는 그는 머리가 완전히 깨져버려서, 두개골의 전면부가 아예 열려있는 모습이었다. 안면은 말 그대로 붉은색의 고깃덩이와 뼛조각 등이 뒤섞여서 차마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말 끔찍한건 그가 아직 살아있는지, 숨을 쉬며 미동하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주변의 의사들은 그의 터져버린 얼굴을 어떻게든 봉합하고자 하는지 쓸어모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여지없이 이런 댓글들이 달리곤 했다.

 

"트릭 예술성 10, 폭발성 7."

 

02.

  엽기 문화에서 볼 수 있었던 괴이한 것들에 대한 매혹은 언뜻 오늘날의 ‘병맛’에서 ‘밈’으로까지 이어지는 어떤 독특한 문화적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엽기가 바로 그러한 오늘날의 독특한 문화적 양상에 관한 자양분이자 출처가 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들 사이에는 분명한 단절 또한 존재한다. 이를테면 엽기 이후 병맛 문화의 전형적인 생산물 사례로 볼 수 있는 만화 작가 이말년의 작품을 보면, 엽기 문화 특유의 ‘잔혹성’이나 ‘그로테스크함’은 이제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병맛은 당시의 엽기에 비하면 많이 순화된 감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는 그간 이루어졌던 약칭 ‘정보통신망법’으로 불리는 인터넷 이용에 관한 법률의 도입이나, 웹사이트 플랫폼 각각의 자체적인 운영 및 관리 방침의 변화, 즉 인터넷이라는 물적 조건의 변화에 의한 영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엽기 문화는 이것이 비록 주류문화로 여겨졌음에도 불구 어디까지나 음지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포함하는 역설 속에 있었다. 누구나 엽기 문화를 즐긴다고는 하지만 그래서 그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았는지 물었을 때는 대놓고 말하기가 좀 곤란한 종류의 것들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이에 관해 말하는 것은 언제나 사적이었고 은유적이었으며, 때로는 소문으로 밖엔 말할 수 없기도 했다. 심지어 그것을 직접 보았더라도 말이다. 이 또한 오늘날 밈 문화에 관한 향유가 언제나 그것이 놓인 맥락에 관한 구체적인 이해를 동반해야 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어쨌거나 엽기 문화가 놓인 이러한 이중적인 상황 속에서 한편으로는 엽기 문화가 간직한 음지로서의 속성이 그저 해당 컨텐츠가 아직은 이용자들에게 덜 알려졌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도착적이고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엽기 문화는 대부분 음지에나 그 보금자리를 트기 마련인 매니악하고 사회적인 금기인 것을 포함했다. 그리고 이같은 측면은 밈 문화와는 대조적이다. 밈의 생태는 처음엔 그것이 소수에게만 매니악하게 향유되더라도 순식간에 대중들에게 유행되고 또 그 순간 생명력을 잃으며, 다시 새로운 것이 나타나고 다시금 이 과정이 반복되는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개별적인 밈의 생명력은 언제나 일시적인 것처럼 보인다. 반면 엽기 문화를 향유하는 데 있어서의 가장 큰 동력 중 하나는 음지에서나 가능한 사회적 금기를 위반하는 행위 그 자체에서 오는 쾌감에 기인했다. 때문에 엽기 문화의 컨텐츠들은 항상 금기여야 했다. 말하자면 사실 ‘스캇물’과 ‘구토물’, ‘고어물’이든 뭐든 이 내용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저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금기를 위반하는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쾌감을 느낄 수 있게만 해준다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극단적인 기호증은 엽기 문화가 서서히 제도화되면서, 달리 말하자면 인터넷이라는 물적 조건이 서서히 법률화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가장 먼저 제거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렇게 엽기가 서서히 병맛 문화로 이행하면서 이 문화의 생산자들 또한 점차 음지가 아닌 양지로 올라와 안정된 보금자리를 얻을 수도 있게 되었다. 오늘날 흔히 병맛 작가로 분류되는 대부분의 대표적 인물들이 무리 없이 대형 플랫폼에 연재처를 얻고 있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듯 말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만화 작가 귀귀 또한 흔히 병맛 만화의 대부로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내가 볼 때 그는 병맛 문화의 주요한 특징들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는 이말년 작가처럼 한 때는 대형 플랫폼에서 연재를 하던 작가였으나 어느 순간 그의 작품 속에서 불거진 ‘잔혹성’, ‘폭력성’과 같은 문제로 인해 더 이상 연재를 이어갈 수 없게 되었다. 귀귀의 만화가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지점이다. 비록 그에겐 온갖 구설수와 좋지 못한 상황을 불러오는 일일지는 몰라도, 그의 만화는 엽기에서 병맛으로 그리고 밈으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문화적 흐름과 그 사이의 경계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내게 있어서 귀귀의 만화를 본다는 것은 왜인지 그때 당시의 엽기 문화적 풍경을 다시금 떠오르게 하는 일이다.

 

  여러모로 문제적 인물인 귀귀를 둘러싼 숱한 이슈들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그의 신상이 여전히 비밀에 부쳐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활동을 시작한 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는 아직까지도 신비주의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신상에 관한 정보는 고작해야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는 이름이나 출생 연도 그리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작업실 사진이 고작이다. 흥미롭게도 그 사진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그가 다름 아닌 ‘고어’한 호러 영화 장르에 얼마나 큰 애착을 갖고 있었는지다. 사진 속 작업실 한편에 위치한 그의 장식장 선반 위에는 피규어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이 피규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전부 유명한 호러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다. 그가 흔히 코믹한 개그 만화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기이한 병맛 만화를 그리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또다시 의외라면 의외인 셈이다. 그리고 그의 만화에서 심심치 않게 묘사되곤 했던 특유의 고어한 연출들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낭자한 선혈과 분뇨 등을 동반한 극단적 표현 양식, 고문과 신체 절단 등을 심심치 않게 묘사하곤 하는 그의 연출 방식은 으레 그러한 표현이 극의 진행상 필요하기 때문에, 즉 이러한 연출이 서사적으로 불가피하기 때문에 그려졌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장면 자체에 관한 패티시적인 애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올해 열리는 귀귀 작가의 첫 개인전은 그의 첫 오프라인 전시이기도 하다. 그가 지금껏 신비주의를 고수하던 인물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그가 현실에서 전시를 연다는 것 자체로도 큰 눈길을 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의 첫 개인전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크게 입소문이 돌더니 적지 않은 흥행을 거두는 중이다. 그는 전시가 진행되는 와중 자신의 블로그에 이와 같은 개인전에 대한 열띤 반응에 관해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그 또한 국내에선 일반 대중들에게 생소한 문화인 미술이 이처럼 큰 관심을 끄는 것이 생경한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음지에 있던 미술을 제가 양지로 끌어올렸다고”.[3]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 그의 만화를 보게 되는 독특한 매력 중 하나는 음지에나 자리를 틀법한 금기들을 줄타기할 때 느껴지는 꾸릿한 쾌감이다. 과연 미술은 그와 같은 매력을 어떻게 상대했을까?

 


[1]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7079.html

 

[2] https://ko.dict.naver.com/#/entry/koko/9484df94caec43479051af26572ee039

 

[3] 덧붙여 그는 이 말에 반박하면 후장파열 노트에 적겠다고도 했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https://blog.naver.com/tarboy/222665393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