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가상화, 가상의 자연화

  자연은 인간 외부의 물질적인 삶의 토대이면서 인간 내부의 본성(nature)을 동시에 가리키는 낱말이다. 자연과 마주한 인간은 자신의 노동력이라는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외부의 자연과 내부의 자연을 함께 변형한다. 우선 자연은 인간 외부에서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인간에 의해 역사적으로 구성된다. 레닌은 자신의 저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당대의 철학적 유물론이 우리의 의식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라는 그런 물질의 유일한 '속성'의 인정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1] 다르게 말해 철학적 물질 개념은 역사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물질의 구조를 실체화한다. 인간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자연 혹은 물질이란 개념은 관념론적 추상에 불과하다. 물질의 구조와 그것에 내재한 실현 가능성은 물질과 대면하는 인간의 물리적/지적 생산력이 도달한 역사적 단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루카치가 언급한 것처럼 자연은 사회적 범주이다. 새로운 유물론 경향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사회적 ‘매개’를 배제한 자연과 물질에 대한 재조명이 존재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여러모로 자연은 문제적인 개념이다. 이를테면 근대 민족국가와 시민사회가 성립되어 가던 시기에는 홉스, 로크, 루소가 상정했던 국가 이전의 ‘자연상태’에 대한 논쟁이 있다. 그들이 가정한 자연상태는 서로 달랐는데 그 이유는 절대군주제로부터 입헌군주제와 삼권분립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각 사회의 역사적·물질적 조건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때의 자연은 시장경제가 출현한 뒤로 변화하는 ‘사회상태’를 매개로 해서만 발견되는 과거의 굴절된 ‘자연 상태’인 것이다. 홉스가 묘사한 무자비하고 항구적인 만인의 전쟁상태로서의 자연이 있는가 하면, 우리는 다른 한편에서 소외되지 않은 본래적인 고향으로서의 자연을 희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루카치가 지적했듯이 제1의 자연은 인간들에 의해 형성된 제2의 자연이라는 인공물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한 소외의 역사철학적인 객관화의 표상이다.[2] 매개 없는 직접적 '자연'이라는 관념은 인간이 그로부터 뿌리 뽑혀 있음을 전제로 하는데, 그것은 제2의 자연을 매개로 할 때만이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자연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루카치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물이 자신들에게 적합할 때에는 그로부터 자연을 추구와 발견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체험하는 동경이 생겨날 수 없다고 말한다.

 

Mont Sainte-Victoire, 1904-06, Princeton University Art Museum, Wikimedia Commons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1904,_Cézanne,_Mont_Sainte-Victoire.jpg)

 

  세잔은 생 빅투아르산에 갔을 당시 겪은 일화를 편지로 남겼다. 그곳의 농부들은 인간과 마주한 대상으로서의 자연 즉 나무나 풍경 등 아무것도 보지 않으며, 심지어 생 빅투아르 산마저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실상 농부에게 자연은 일정한 크기의 땅에 단일한 농작물을 기르기 위해 잡초를 솎아내거나, 그것을 먹이로 삼는 다른 종과 병충해의 위협으로부터 투쟁하는 살생과 순환의 장소이다. 인간의 인식과 그 범주의 발전은 생산, 즉 사회적 실천의 형식과 관련된다. 그리고 자연을 소재로 한 인간의 노동은 무로부터의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단지 자연의 소재를 단지 변형시키는 것에 불과하며, 철저히 그 물질의 법칙성에 따라야만 한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과 그 항상성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마르크스는 살아있을 당시 19세기 생물학과 유기화학의 발전으로 등장한 “물질대사” 개념을 수용했다.[3] 그것은 생명체가 생존을 위해 외부 자연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유기적이고 화학적 과정이다. 이를 통해 마르크스는 근대 도시화에 따른 인구 집중으로 의복과 식품의 형태로 유입된 토지 영양분이 도시의 토양 및 수질 오염을 야기하고, 농촌에는 지력 고갈을 가져오는 사태를 물질대사의 ‘균열’로 파악했다. 유기체의 생존에 있어 물질대사는 필연적이기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자연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초역사적인 “내용”으로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물질대사는 그 내용을 규정하는 각 사회적 형태에 따라 그것이 미치는 범위와 성질이 변화해왔다. 즉 오늘날의 기후위기와 생태적 재난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규정하는 “형태”가 역사적으로 변화해 온 것과 관련된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의 변화는 과학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자연과학자의 망막에 비치는 순수한 가치중립적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의 발전은 곧 산업과의 연계 없이 독립적으로 사유할 수 없으며, 기술 그 자체가 궁극적인 심급이라 볼 수 없다. 에르네스트 만델은 자신의 저서 『후기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따라 변화한 과학 기술의 근본적 혁명을 세 시기로 구분한다. 1848년 이후의 증기기관, 1890년대 이후의 전기와 연소기관 생산, 1940년대 이후의 전자와 원자력 발전의 기계 생산은 곧 시장자본주의, 독점자본주의 혹은 제국주의 단계, 다국적 자본주의 단계의 시기 구분과 조응한다. 마찬가지로 1970년대 자본축적의 심각한 위기로부터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정보통신기술 혁명과 함께 출현할 수 있었다. 신자유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데이비드 하비는 마르크스의 ‘본원적 축적’ 개념을 발전시켜 “탈취에 의한 축적”을 제안한다. 하비의 이 개념은 민영화와 상품화, 금융화, 위기의 관리와 조작, 국가의 재분배의 네 가지 양상을 포함한다.[4] 그로부터 자본에 의해 아직 상품화되지 않았던 수많은 영역들이 포섭되면서 유례없는 세계적 침탈과 식민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닐 스미스는 마르크스가 개진한 자본에 의한 노동의 형식적 · 실질적 포섭을 응용하여 자연의 형식적·실질적 포섭을 제안한다.[5] 자연의 형식적 포섭이 자연에 존재하는 물질적 자원을 채취하고 전유하는 것이라면, 자연의 실질적 포섭은 자본이 기술적으로 자연에 대한 생산과정을 통제하여 축적을 고도화한 것이다. 여기서 금융화 이후의 ‘의제적 포섭’을 추가할 수 있다.[6] 의제적 포섭은 자연의 물질적 생산 없이, 자연의 금융화 또는 증권화 등을 통해 자연을 상품화하여 자본의 축적을 촉진하는 상황과 관련된다. 이처럼 금융화는 자본이 노동력 상품과 자연의 소재를 구매하여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력의 가치증식(M-C-M’)의 우회 없이, 화폐를 통해 더 많은 화폐를 증식(M-M’)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질적 토대로서의 자연을 가상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왼쪽에서부터 도지코인, 비트코인, 이더리움.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품체에서 사용가치를 배제하면 노동의 유용한 성격은 사라지고 ‘유령적 대상성’이라 칭한 무차별한 인간노동의 응결물, 즉 ‘가치’의 사회적 성격만이 남는다. 다종다양한 상품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상품에 깃든 ‘가치’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상품을 ‘사용가치’를 지닌 감각적 대상이면서 동시에 감각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초감각적 대상으로 규정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가치의 물질적 담지자이던 종이 화폐조차 스마트폰과 컴퓨터 스크린 위의 전자적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가치는 ‘기호’ 혹은 ‘정보’로 치환된다. 각종 유가증권, 주식, 채권, 코인 등 의제자본의 과열된 금융투기가 불거지는 상황은 노동이 가치의 기원이라는 명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 같은 신기루를 만들어낸다. 그 이유는 잉여가치의 증식을 목적으로 삼는 자본의 중심에는 자연의 소재적 한계와 탄력성을 초월하여 ‘가치’를 추구하는 충동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제임슨이 말한 바와 같이 그 어느 시기보다 더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인 것이다. 허나 스크린 속 그래프의 ‘가치’ 증식의 신기루 이면에는 제3세계로 이동한 비가시적인 노동이 자리하며, 물질적인 자연의 소재와 노동의 탄력성을 초월하려는 자본의 모순은 쉽사리 제거할 수 없다. 그로부터 나타난 물질대사의 균열, 즉 기후위기와 생태계 불안정성은 미래의 이익과 관련된 리스크의 상품화, 탄소배출권, 습지거래권 등 새로운 이윤 창출을 위한 기회로서 자본에 의해 자연은 허구적인 상품으로 탈바꿈된다. 세계 곳곳의 거래소에서 판매되는 파생상품이 작동하는 연산의 복잡한 수식과 예측 불가한 그래프의 등락은 제2차 세계 대전의 군사 프로젝트와 밀접하게 관련된 정보통신기술과 컴퓨터공학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파생된 담론 중 ‘포스트휴먼’을 한번 살펴보자. 1940년대 출현한 사이버네틱스는 생명/기계, 인간/로봇, 정보/물질 사이의 경계를 의문에 부치면서 인간의 주체성을 재구성하려 시도한다. 포스트휴먼의 함의를 몇 가지로 요약하면 계몽주의 이후의 자유주의적 주체의 재구성, 탈물질화에 따른 현존/부재에서 패턴/임의성으로의 인식론적 변화, 신체의 가상화 및 정보패턴화 등이 있다. 사이버네틱스 가설에서 정보의 물화는 하나의 정보가 그것의 맥락에서 벗어나 다른 물질적 매체를 자유롭게 이동 가능하며 그 과정에서 정보가 변형되거나 손상되지 않을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포스트휴먼 담론 내부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정보/물질, 가상화/신체화, 기록/체현 사이의 긴장을 사유하려는 시도들이 있다.[7] 다른 예로는 미술작가 히토 슈타이얼의 ‘빈곤한 이미지’를 들 수 있겠다. 그것은 전지구적 네트워크 속의 매체를 거치며 나타나는 물질적 흔적들을 간직한 이미지로서 맥락에 따라 유동적으로 전유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8] 심지어 그는 빈곤한 이미지를 룸펜 프롤레타리아라는 사회정치적 계급의 표상으로 규정하지만, 그것이 내포한 미규정성과 불확정성은 불분명한 오류이며 인공지능의 재귀성을 통해 학습을 돕는 인자로서 인공지능 알고리듬에 의해 재차 포섭될 처지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인간과 기계 사이의 유추는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공동의 영역과 옮겨갈 수 있는 정보를 전제로, 인간의 의식을 기계로 옮겨 영생을 누리는 SF적 상상력이 출현한다. 이는 자신의 물질적 맥락으로부터 벗어나 전지구적 네트워크를 부유하는 정보는, 지구상의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가상화하는 ‘가치’라는 유령적 대상의 과학기술적 표상이기도 하다. 그 추상적 운동을 포착하려는 충동은 1980년대 과학기술과 음모론이 결합된 사이버펑크 SF소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포스트휴먼 속에 나타나는 주체성의 재구성은 인간과 기계의 결합, 동물, 기계, 논-휴먼, 그리고 성별, 인종, 젠더 등 사회적 범주와 경계를 와해시키는 분산된 주체들로 산개한다. 이는 전지구적 자본의 포섭이라는 동일성의 폭력 아래 놓인 이질성이며, 그로부터 예외로 남았던 자연과 인간 내부의 자연(본성)을 포섭하려는 시도와 인간이 만든 인공물과의 상호작용으로 생성된 새로운 혼종적 주체성의 변이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 놓여있다. 인류의 미래가 기후위기와 방사능 및 전염병으로 SF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AI 기계가 지배하는 디스토피아가 될지, 종과 성별 그리고 기계와 인간의 경계를 초월한 새로운 주체로서 포스트휴먼의 유토피아가 펼쳐질 것인지를 결정하는 궁극적인 심급은 새로운 기술의 발전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슬라보예 지젝은 자신의 글에서 ‘가치’의 범주 외부에 있었던 1970년대 가사노동의 가치 생산적인 것으로의 합법화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요구, 물과 공기 그리고 숲 등 자연의 선물을 가치 생산 내부로 통합하려는 생태-자본주의적 요구가 공간의 상품화와 그린-워싱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9] 우리에게 인식되는 가치는 그것이 가치로 표상되기 위해서 항상 비-가치적인 것과의 변증법적 관계를 필요로 한다. 그것을 주조하는 ‘가치형태’에 대한 비판 없이는 가차 없이 그 포섭 아래로 모든 것이 녹아 사라질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이 말하는 해방이 단지 남성들의 권리 내부로 여성들이 포함되거나 균형을 맞추는 기계적 평등이 아니라 이성애 규범성과 가부장제를 폐지하는 것이듯, 마찬가지로 현사회의 특정한 ‘가치’와 ‘비-가치적인 것’을 규정하는 체계를 비판해야 할 것이다. 의제자본은 바로 그 외부의 잔여를 미래에 도래할 가치증식의 대상으로 삼아 끊임없이 포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휴먼적 주체는 이미 도래했다. 주지하다시피 근대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주체의 탄생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개인의 탄생이다. 그것은 이중적 자유를 가진 노동자를 출현토록 했다. 노동자는 자신의 신체의 소유권을 전제로 한 노동력 상품을 시장에서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었다. 물론 그와 동시에 자신의 노동력을 실현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적 자유가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자유'에 반하는 ‘독점’적인 보편적 의료보험을 폐지하고 민간병원의 다양한 서비스를 선택할 자유, 획일적이고 국가독점적인 교과서와 교과과정에 시장의 경쟁을 도입하여 교육 수요자가 선택의 자유를 누릴 것을 요구한다. 하나의 직업으로 정체성을 규정하던 평생고용 직장에서 비정규직으로의 전환은 자신의 잠재성을 실현할 새로운 분야로의 도전과 자기계발의 자유가 주어진다. 근대의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 외에는 소유하지 못했기에 시장에서의 그것의 판매를 통한 생존이 강요됐다면, 신자유주의 노동자는 자신의 가능성과 감정 그리고 미래의 가치를 담보한 시간성까지 거래하도록 강요된 자유 앞에 내몰린다. 포스트휴먼의 유동적이고 경계를 넘나드는 주체는 바로 그 주체와 닮아있다. 그리고 이미 알아챈 사람들도 있겠지만, 인간 지능의 한계를 넘어선 특이점(singularity)으로서의 구성물은 이미 출현했다. 제임슨이 말한 것처럼 어떤 개별적 인간 지성이 아우를 수 없으며 정보 테크놀로지가 출현하기 전에는 가능하지 않을 그런 복잡한 구성물로써 ‘파생상품’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10] 일찌감치 도래한 미래와 폐허가 된 과거 사이의 역사적 조건에 대한 사유 없이는, 소문만 무성한 4차산업 혁명과 과학기술에 대한 예찬으로 뒤범벅된 오늘날의 가상화된 세계와 포스트-주체들을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럴수록 우리는 ‘가치’가 초월해버린 것처럼 보이는 토대와 그로부터 발생한 균열을 다시금 더듬어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1] 알프레드 슈미트, 김경수 옮김, 『마르크스의 자연 개념』, 두 번째 테제, 2020, 105쪽 재인용
[2] 게오르크 루카치, 김경식 옮김, 『소설의 이론』, 문예출판사, 2007, 73쪽
[3] 마르크스의 『자본』 1권 1장에 등장하는 개념이다. 알프레드 슈미트의 『마르크스의 자연개념』 2장과 

     존 벨라미 포스터의 『마르크스의 생태학』, 폴 버킷의 글들을 참고하라.
[4] 데이비드 하비, 최병두 옮김, 『신자유주의』, 한울, 2007, 194~201쪽
[5] 닐 스미스, 허남혁 외 옮김, 「축적전략으로서의 자연」, 『자연과 타협하기』, 필맥, 2007, 39~66쪽
[6] 최병두, 「자연의 신자유주의화 - (1) 자연과 자본축적 간 관계」, 마르크스주의 연구
[7] 캐서린 헤일스, 허진 옮김,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플래닛, 2013, 8장 참고
[8] 히토 슈타이얼, 김실비 옮김, 『스크린의 추방자들』, 워크룸프레스, 2018,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 참고
[9] Slavoj Žižek, 정용택 옮김, 「의제자본과 인격적 지배의 귀환 (Fictitious capital and the return

    of personal domination)」, 블로그 파벨라, 2018
[10] 프레드릭 제임슨, 박진철 옮김, 「단독성의 미학」, 문학과사회, 2017, 30(1), 286-317.

  • ㅇㅇ 2022.05.25 01:57

    흥미롭지만 동의하긴 힘든 내용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