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니치 천문대를 공격하라⟫ 서문・스테이트먼트

 

  바빌로니아 목동들이 수놓은 밤하늘의 별자리는 우주 공간을 2차원 캔버스로 간주할 때 가능했던 시각 기반의 유희로, 우주론이 3차원으로 상승한 순간 고대인의 낭만적 자취로 퇴조하였다. 반면 수없이 많은 신화, 전설, 영웅, 괴물, 이념, 서사 등을 탄생시키던 지구는 황폐한 플랫으로 변모하였고, 만물은 스크린 안으로만 수렴하는 흐릿한 궤적 내지는 표상의 문제를 지난하게 만드는 잔상으로 전락했다. 천공과 대지가 이룬 차원 변화는 인식의 변화를 촉구한다. 이를테면 현 상황은 인류로 하여금 지궁도地宮圖를 상상해내도록 주문한다.

 

  지궁도는 동시대 미술에서 긴요하게 다루어지는 정치적 사안들에 호응한다. 그것은 현재 미술계가 천착하는 시간과 공간의 문제에 불쑥 개입할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지궁도의 원관념적 짝패인 천궁도를 뜻하는 horoscope는 '시간의 관찰자'를 뜻하는 그리스어 ‘오로스코포스’로부터 유래하는데, 점성술이 운행하는 천체의 특정 시점을 포착해 운명(시간)을 가늠했다면 지궁도는 포스트-인터넷, 포스트-리얼리티, 수퍼플랫 등의 수사들이 묘사하는 당대의 허수적 공간 자체를 유영하면서 ‘처해 있는 현실’이라는 이 시간대를 다단하게 표상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즉 시공간에 대한 유무형의 탐색을 촉발하면서 이종의 작도법을 제시한다.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이 빛의 속도를 절대적 상수로 시인할 때 용납되듯, 공동체의 안위가 -1의 적대를 상정하면서 효과적으로 보존되듯, 상품이 화폐를 상품 중의 상품으로 등록하면서 제 스스로를 관철하듯, 천궁도가 지구로 응축된 시야를 통해 회전하듯 지궁도 또한 어떤 축 x를 통해서 작동할 것이다. 그 x의 정체는 불분명하기에 우리는 그리니치 천문대를 타격하고자 한다. 그리니치 천문대는 제 정수리를 지나는 자오선에 본초의 격을 부여해 행성의 시간을 정벌하고 공간을 호령하는 날실 중의 날실, 시공간의 영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조준은 애초부터 빗나가 있다. 현실을 직조하는 추상을 담지하는 대상물이 없다면 시공간은 사라지겠지만 그것은 천문대가 품은 신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니치 천문대는 커다란 왜상적 은유, 다시 말해 시공간의 당대적 양태와 효과, 그것을 구성하는 중층적 네트워크를 포괄하는 낱말에 해당한다. 시공간에 관한 작가들의 고민은 각자가 계측한 좌표의 영점을 향해 가속한다. 문제를 표상적-핵으로 집중시킴으로써 시공간 자체를 사유할 장을 열어젖히고, 붕괴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현재를 슬쩍 잡아당겨 세계상을 교란시킬 작정으로.

 

  어쩌면 우리의 탄환은 너무 늦게 채비되었다. 국제도량형총회(CGPM)에 의해 만물의 척도들이 허물을 벗고 추상계로 우화하며 절대성을 획득하고 있다. 본초자오선의 평균태양시인 그리니치 평균시 또한 1972년 협정세계시로 이행하였다. 이는 전 세계의 400개 이상의 원자시계의 시간평균값으로 구체적인 대상시가 아닌, 차이를 통해 절충되는 추상시이다. 전략은 수정되어야 한다. 우리 앞엔 지구상의 원자시계를 몽땅 폭파시키던가, 그리니치시와 협정세계시 사이의 균열 x를 공격하던가 하는 두 선택지만이 놓여있다. 우리의 대답은 후자로 기운다. 우리는 질문을 탄도학적 절차에 따라 쏘아냄으로써 문제를 언어의 군사학을 아우르는 영역으로까지 비화시킨다. 표적 x는 미지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대상의 존재를 표지하는 감지의 기호이다. 우리는 바로 이 x의 존재로 인해 사실에 근접할 동기를 발견한다.

 

  지궁도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상을 획득한다. 작가들이 쏘아낸 질문의 궤적이 인간의 인식과 현상들을 관통하며 별자리에 대응하는 가상점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 궤적은 플랫한 세계에 빗금을 긋는 일이 되면서 이내 스크린의 균질성을 대질하고 지구의 비균질성을 지각시킬 촉매가 되어 줄 것이다. 이제 오로지 파괴되기 위해 그려지는 개념적 왜상이자, 자세를 고쳐 앉을 리얼리티의 태명인 지궁도를 들여다보라.

 

 

<Merry-Go-Round> 단채널 비디오, 컬러, 42분, 이의록, 2020.

 

이의록 

 

  철학자들이 출현하기 전의 저 먼 시기, 최초의 현자들은 동시에 천문학자였기에 과거의 관측 행위는 사유와 밀착해 세계를 구상하려는 시도를 거듭해 왔다. 오늘날 관측 행위는 과학과 결합해 관측소를 잉태했고, 사변적 추상에서 벗어나 물리적 천체에 관한, 유기적이고 무기적인 모든 운동, 물질과 화학, 우주를 관통하는 응시가 되었다. 우주 관측은 망각된 자신의 기원으로 가닿는 동시에 인류가 봉착한 현재의 기술적 조건을 바탕으로 세계상을 탐사한다. 따라서 관측소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결착하며, 우주의 기억과 인간의 기록이 교차한다. 지각을 위한 수단들을 총체적으로 동원하는 장소로서 관측소는 뮤지엄과 닮아 있다. 변화하는 사물들의 관계 속에서 불가분한 전체를 파악하려는 노력의 정수를 담은 두 공간은 이의록의 작업 안에서 공명파를 일으킨다.

 

  <Merry-Go-Round>는 전파천문학에서 우주의 이미지를 채집하는 과정을 다룬다. 여기서 우주의 이미지는 ‘추측’과 ‘출력된 값’의 변증법을 통해서 구성된다. 천체는 직관적인 시야의 차원에서 탈피해 ‘선별된 기호’로서의 세계를 우리에게 준거한다. 세계가 기표들이 회절하는 공간으로 드러날 때 천체가 지고한 곳에서부터 지상으로 낙하해 뮤지엄에 착지한 이유가 밝혀진다. 자연과학이 자연사의 단순한 반복이 아닌 자연에 관한 인간적인 재현이며, 관측소가 인류가 보는 방식의 첨단이라면 우주를 응시하는 일은 또한 인류를 바라보는 일이니까.(우주선은 오히려 지구를 전체상으로 인식하려는 욕구를 충족시켰다.) 비로소 비밀 하나를 찾아냈다. <Merry-Go-Round>는 생생함과 진정성, 감각적 충만함으로 가득하기는커녕 수식으로 한 겹 덮여 있는 세계의 가장자리를 발견하고 돌아온 정찰병이다.

 

  과학이 독자적 지위를 획득하면서 우주는 통제된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이미지에 대한 즉각적인 호응은 속는 일이 된다. 허나 이미지로부터, 기호로부터 탈주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일을 대안으로 여길 수도 없다. 그것은 단순한 충동이 아닌가. 우리가 할 일은 전복적 수식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관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정중위 지구, 탈레스의 물 위에 뜬 지구.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얼마나 멀어졌으며 새로운 세계관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물과 별들이 낙하하고 위치를 바삐 옮겼는가? 이와 같은 진술이 관측소가 아닌 뮤지엄에서 흘러나올 때 기존의 낡은 우주 개념은 융해되며 우주와 관계하는 이미지는 당신에게 미완의 수수께끼가 잔존함을 알린다.

 

<cd /웹사이트 구조의 편집과 활용/rmg.co.uk> PLA 필라멘트, PVB 필라멘트, 카본필름, 아연 각파이프, 각파이프 연결 조인트, html, Javascript, Aten-LCD 콘솔 모니터, Dell-1U 서버, NETGEAR-스위치 허브, LS-5E UTP 랜선, 아크릴 가변크기, 구자명, 2021. 이미지는 프로그램으로 구현된 일부.

 

구자명

 

  사이버스페이스의 실존은 무엇으로 담보될 수 있을까? 웹사이트의 도메인은 ‘주소’로 불린다. 가상공간을 사유하는 방식은 여전히 현실을 토대로 삼고 있다. 만약 웹사이트가 하나의 건축이라면? 그렇다면 웹사이트의 물성을 사유할 수 있을까. 인류는 네트워킹 시스템을 통해 가상세계와 시각, 청각, 촉각을 동기화한 상태지만 그곳의 물성에 관해서는 여전히 둔감하다. 더 정확히는 소프트웨어의 물성을 사유한다는 방식 자체가 아직 너무나도 낯설다. 프로그래머는 코드를, 부호화된 언어를 통해서 별도의 공간들을 축조하는 건축가들이다. 그들에게 사이버스페이스는 응당 활자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미술가들에게 그 세계는 순수 코드로만 인식되지 않는다. 벤야민이 주석가와 비평가를 불 앞의 화학자와 연금술사로 비유했듯, 프로그래머는 코드를 읽어내겠지만 미술가는 코드를 통해 구성된 세계의 형상을 읽어내려고 시도한다. 대다수 미술가들은 그 세계를 시각에 기초해서만 육박할 테지만 구자명은 한 켠에서 웹의 유령적인 그리드를 현실로 적출하는 과정을 수행한다.

 

  그는 실측된 것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 고안될 수 있는 분자구조까지도 3차원으로 구현할 수 있는 몰레큘러 그래픽(molecular graphic) 화상처리 프로세스를 차용한다. 이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웹사이트를 구성하는 여러 수치들을 그에 조응하는 값으로 치환해 분자 유닛을 구성한다. 분자의 형태는 웹사이트의 각 조건에 따라 상이하게 조형되고 출력된다. 디지털스케이프에 유전자 크리스퍼 가위를 적용해 일부를 절제한 후 현실로 검출한 환원불가능의 조형물은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는 성서의 반反신화적 모티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웹을 생검biopsy함에 따라 기술과 자연이라는 이분법은 무화되며 논의는 기술화한 자연으로 이동한다. 조형물은 인체 시냅스의 노드처럼 보이기도 하고, 웹의 전기 신호를 연결하는 통로처럼도 보인다. 신체도 소프트웨어도 전기 신호를 통해 반응하고 통로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상동이다. 이윽고 조형물은 유투브, 구글, 넷플릿스, 웹 광고 등 여러 플랫폼들이 상호 매개하며 주체 대신 지각과 취향의 다발을 이루는 당대의 물신 가득한 주객전도의 은유-형상처럼 읽히는 독특한 사물이 된다.

 

  작가는 그리니치 천문대 웹사이트를 해킹하고 그리드를 훔쳐 이 장소에 놓아둔다. 이때, 어쩌면 본초자오선이 인지적 오류를 일으켜 세계 어딘가에서 재난이 일어나고 있진 않을까? 이것이 오늘날의 빗금의 형태는 아닐까? 작업은 현실 공간에 파열을 내는 이질적 균열 그 자체처럼 보인다. 3차원의 장막을 찢고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난데없이 출몰한 반-사물. 그 균열로부터 다른 무언가가 계속해서 쏟아질듯 한 파열된 빗금연속체. 공간은 체험을 가능케 하는 주변에서, 고민되어야 하는 객체로 아득히 멀어진다. 누군가는 선험이라 착각할 만큼 익숙한 공간에 이질적 대상을 삽입함으로써 양 차원에 대한 고민이 심화된다. 지궁도는 이러한 빗금에 의해서 새겨진다. 매끈한 세계에 흔적을 남기고 균열을 일으키면서.

 

 

<Blue Shift> 복합매체, 기계장치, 가변크기, 조해나, 2020.

 

조해나

 

  조해나의 <Blue shift>는 전시 안에서 태양계의 운동을 단박에 축소한 모빌처럼 보여진다. 축대는 어쩐지 태양계에 대한 학습된 관념을 은유하는 듯 보인다. 우주 공간에서 운동은 단순히 횡축의 운동만을 반복하지 않는다. 태양계의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며 횡축을 그리는 동시에 태양계 자신도 은하를 모항성으로 두고 공전하고 있음을 떠올려라. 그때 태양계의 행성들은 나선을 그리며 전진한다. 그렇다면 <Blue shift>는 우주의 율동에 대한 대다수의 무지를 단적으로 시각화하는 셈이다. 흔히 원심력과 구심력은 길항 관계에 놓인 힘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원심력과 구심력은 좌표계에 따라 하나만 관찰되는 규칙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회전하는 물체의 운동을 주관하는 관성력은 좌표계의 규정에 따라 결정된다. 이제 복잡한 과학의 렌즈를 빼고 당신의 육안을 빌려 잠시 좌표계로 쓰자. 당신이 보기에 따라 <Blue shift>는 영원한 처벌을 체현하는 시지프스의 사생아일 수도, 무한 궤도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엑소더스 강박일 수도 있다. 이때 작업은 대상을 판단하는 선택의 문제들 다시 주체에게 반환시킴으로써, 흩어진 주체의 위상을 복원한다.

 

  한편 그의 다른 작업 <White hole>은 <Blue shift>과 전면으로 배치되는 인식을 요구한다. 구자명의 좌대로 인한 물리적인 제한이 아니더라도, 각 모니터의 통일된 상을 보기 위한 특정한 시점이 사전에 고안되었기에 관객은 작품이 요구하는 눈높이에 스스로를 동조시킬 수밖에 없다. 이는 감상하는 주체의 자율적인 관람권을 일시적으로 박탈하면서 일찍이 작가가 구상한 특정한 경로로 볼 것을 지시한다. 이때 작가의 시선은 관객의 시선을 압도한다. 두 작품의 상반된 요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둘 사이의 긴장을 포기하지 않고 인정하면 된다. 주체의 시각은 비자의성과 자의성 사이를 부유하도록 강제되어 있다. 어느 하나라도 포기하는 순간 인식은 저 멀리 도망간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정해 보자. 한 사람이라도 긴장을 늦추는 순간 대화는 소멸한다. 상대방이 언제 말을 꺼낼지, 어떤 말로 응할지, 어떤 시점에서 반응하고 중단할지는 두 사람 모두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주체의 시각,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 역시 긴장의 테마를 유지할 것을 촉구한다. 시각의 자율성. 스스로가 무엇을 볼 것이냐의 문제는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보도록 하는지에 관한 두 겹의 사유를 통해서 모종의 자율성을 갖게 한다.

 

  화면의 시퀀스는 선에 관한 시각적 은유를 제시한다. 선은 경계를 긋는다는 점에서 자주 부정성에 연루된다. 마치 공동체를 동강내는 폭력이라는 듯. 그러나 경계 없이는 인식도 없다. 차라리 요구되는 것은 분명한 선긋기이다. 접경을 사유하고 평면을 접어 다른 선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예술이 타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어떤 선을 그려내느냐에 달려 있다.

 

 

<White hole> 모니터, 편광필름, 삼채널 영상설치, 4분 26초, 조해나,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