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궁도에 관한 노트 : 예술이 한 발 앞설 수 있다면

* 본 고는 ⟪그리니치 천문대를 공격하라⟫ 전에 비치되어 있던 텍스트입니다.

 

동시대 전시의 의의

 

  ‘플랫’이라는 단어가 표상하는 세계의 골조는 실제 세계와 얼마만큼의 동조율을 지닐까. 2010년대 후반까지 여러 비평가들의 입을 거침없이 오가면서 현 시기 ‘리얼’을 담보할 수 있다는 듯 강조되던 이 낱말 이후가 논의될 수 있을까. 본 전시는 바로 이 ‘플랫’을, 그리고 그 이후를 모색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근래의 많은 전시들의 공약수는 ‘상상’이다. 현재와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도록 지시하는 매개로서의 미술관. 이러한 분기의 원시간적 지시체가 되기 위해서 공간적 은유를 동원한다. 틈새, 경계, 한계, 지평, 간극, 접경, 탈주 등 주체에 앞선 선택이라는 환경에 대응하는 담론적 구성물들은 차이를 생산하기 위해 분투한다.

 

  차이는 소각된 주체를 향한 갈망과도 같다. 선택을 자유로 위장하는 세계에서 그러한 선택마저 이미 구성되었으며 선택을 선택할 뿐이란 사실은 주체의 소멸이란 테마의 강력한 증거 형식이다. 대부분의 전시가 의식적인 수준에서 선택지를 피하는 선택을 주체화의 수단으로 삼을 때 예술가는 자유주의적으로 물신화되며, 다른 시간의 분기로 작용하려는 미술관의 욕망은 ‘동시대’라는 출구 없는 시간과 결탁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동시대란 낱말은 집합적인 시간의 출현을 억압하므로 미술관은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으로서 자기를 망각한다. 전시는 단지 ‘보여주기’를 구성하는 공간으로 탈색되어 통제된 상상만을 인큐베이팅한다.

 

  개별적이고 상상적인 시간에 머물도록 독려하는 것이 미술관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라면 어떨까. 여기서 사건이라는 이름의 다른 시간의 출현이 억압되면서 미술관의 시간성은 제거된다. 단지 ‘보여줄 뿐인’ 미술관은 이후의 실천은 작가 또는 관객의 몫으로 전가하면서 스스로의 행위 능력을 포기한다. 전시는 관료적 공간으로 재편되고 연거푸 생멸한다. 끊임없이 전시가 열림으로써 세계의 운행에 차질이 없다는 사실을 알리는 와중에 ‘어떤 전시가 열리는지’가 아니라 ‘전시가 열리는지’가 가장 중요한 화두로 전치된다. 따라서 미술관이 요체이며 전시는 허물이 된다. 한때 유행했던 ‘폐허’와 ‘플랫’은 이 외번된 전시 양태의 알레고리였다. 망가진 형식 안에서 반복되는 차이의 탐구에는 차이가 빠져 있다는 사실 외엔 아무 문제도 없다.

 

  한편 차이에 관한 전시가 분기를 일으키고 서사를 구성하는 원시간적 내러티브를 형성할 가능성은 소급적인 효과에 달려있다. 즉, 전시는 내용 측면에서 관객에게 모종의 인지적 효과를 불러일으켜야 하고, 개개의 관객이 종교적인 각성과 같은 변화된 실천을 결단할 때 성과를 논의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전시는 사태와 시간 ‘이전’으로 물러나 있으며, 전시 ‘자체’로는 평해질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진단하자면 동시대의 전시들은 스스로 어떤 시간도 조직할 수 없도록 탈구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위기로부터의 도약을 시도한다. 즉, 전시 자체를 특정한 사건이자 분기로 조직하려 한다.

 

전시가 시간을 잡아끌 수 있을까

 

  이 아찔하고 과감한 시도는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는 ‘플랫’함을 ‘지궁도’로 대체하고 넘어서려는 기획을 감행한다. 서문에서 밝혔다시피 지궁도는 2차원으로 플랫해진 지구를 사유하는 개념이다. 미술사 안에서 플랫은 간결한 뜻과는 달리 엄청난 시간적, 개념적 레이어로 집대성된 낱말이다. 그것은 자기비판을 통한 회화 영역을 존치하려는 열망의 언어였고, 문화를 향한 깊이 없음의 절망적 진단이며, 오직 표면으로만 가늠되는 공간에 대한 은유이고, 주체의 심부를 제거하고 아바타로 커스터마이징 하는 메스였으며, 사이버스페이스의 형질을 현상학적으로 묘사하는 수단이자, 정체성의 가변성을 위한 우화이기도 했다. 주체, 정체성, 회화, 문화, 사이버스페이스, 공간을 아우르는 이 혼탁한 낱말은 하나의 추상을 따라 호환된다.

 

  위 논의들의 짜임새는 어떠한 ‘단절’을 전제로 한다. 그린버그에게서 플랫함은 조각의 3차원성과의 단절을, 제임슨에게서는 주체와 문화의 심층과 표층의 단절을, 히로키에게는 서로 다른 층이 병렬이 되어버리는 위계의 단절을, 조슬릿에게서는 주체와 뿌리의 정체성의 고리의 단절을, 그리고 현실을 게임적으로 이해함에 따르는 개인과 세계의 단절을 불러왔다. 20세기는 바로 이런 단절이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시기였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쓸 수 있느냐는 질문은 시에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 즉 세계에 내가 즉자적으로 연루되는 것의 파산을 의미하는 문장이다. 주체와 객체의 단절, 이 극단적인 단절은 동시대 환경에서 스크린을 통해 확언된다.

 

  모든 논의가 스크린 안으로 수렴된다는 논의는 과장이 아니다. 이를테면 그린버그가 수호하려던 2차원의 절대적 입지는 스크린을 통해 확보되었고, 스크린 매체의 유성과 같은 속도감으로 인해 심층의 깊이감이 소실되었다. 스크린을 통한 시점의 이동을 확보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정체성은 시의적으로 생몰할 수 있게 되었고, 육체가 아닌 아바타를 움직임으로써 간극은 벌어졌다. 스크린 내부에서 조직된 병렬성은 사건들 간의 중요도라는 구분을 느슨하게 했다. 스크린의 안전하고 완벽한 거리감만큼 단절은 심화되었다. 삶은 스크린 내부를 뜻한다는 말은 이미 고전이다.

 

  일찍이 아벨 강스는 영화가 탄생함으로 인해 모든 신화, 영웅, 전설과 인물들이 스크린의 문턱 너머에서 영화화되기 위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다고 서술한 바 있다. 모든 사태가, 모든 현실이 스크린에 현상하기 위해 조직된다. 여기엔 어떤 형식상의 차이도 없다. 예술 현장에서 ‘플랫‘이 무엇인지에 대한 면밀한 논의 없이 남용될 수 있던 이유는 현실 자체가 스크린 안으로 몽땅 구겨 넣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인류를 위협하는 문제다. 스크린, 그것은 하나의 차원을 말소한다. 3차원 현실을.

 

  더 정확히는 두 차원을 복속시키는 형태를 취한다. 사물의 즉각적 3차원이 2차원 시각의 상과 4차원 시간의 율동으로 인지되는 것과 달리, 스크린에서는 3차원과 4차원 모두 2차원을 빌어서만 작동한다. 스크린이 시간은 단순한 쇼트의 배열에 따른 효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주장을 밀어붙이는 동안 물리학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적인 환상을 불식시켰다. 과학과 스크린 양자를 빌어 갖가지로 검출된 시간의 타입들은 제 스스로가 단순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보편화했다. 허구의 폭로를 통해 선형적 시간은 사라졌고, 비어버린 개념의 영토는 내전을 일으키며 전체에 통용될 수 있는 시간의 논리를 구축하는 데 영원히 실패할 준비를 마쳤다. 그런 점에서 ‘플랫’은 20세기를 관통하는 창이다.

 

  또한 ‘플랫’은 철저하게 현상학적인 낱말이다. 그것은 세계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낱말이었지만, 동시에 작금 예술이 처한 무능을 보여주는 증상이기도 하다. 현재에 대한 직관적인 기술 이외에 어떤 정치적 작동도 일으키지 못하는 이 무미건조한 낱말은 그저 입에서 입으로, 지면에서 지면으로 옮겨 붙으며 현실을 파생된 것으로 매다는 데 일조했다. 플랫의 무지성적 확산과 부유는 더는 지식이나 실천을 통해서 시간이 작동할 수 없다는 무능감에 기인한다. 아방가르드에 내재되어 있던 시간성은 미래를 선취하려는 일군의 노력을 통해서 맹렬하게 작동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모더니즘이라는 시간대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이제는 스크린에 기대어 무한히 영사되는 과거에 침잠하고 ‘동시대’라는 무책임한 낱말 사이에 섞여 미래 시제를 사유하려는 노력을 방기하는 동물들만이 스크린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그렇기에 시간의 형틀에 홈을 파내는 전략을 구상하는 일이 정치적으로 요청된다. 균열을 내는 일은 공간을 빌어 활성화된다. 지궁도는 2차원으로 수렴되어 스크린과 접착된 세계상을 나타내는 낱말임과 동시에, 2차원에 3차원 거리감을 투사함으로써 스크린이 강화하고 은폐하는 동시대적 단절을 드러내기 위해 스크린 자체를 무대화한다. 스크린은 그저 영사될 뿐인 공간으로 나타나며 자신의 형식적 이데올로기는 불기소되기에 이를 미술관에서 대질해야 한다. 이와 같은 작업은 직접적인 실천 없이는 지극히 공허한 기획으로 산화하고 말기에 개념과 조응하는 전시가 요구된다.

 

매개물로서의 그리니치 천문대 

 

  1830년 맨체스터와 리버풀을 연결하는 철도가 완성되면서, 서로 관계하지 않던 로컬 타임들이 불화를 일으킨다. 영미권은 점차 각 지역들의 시간을 통일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이는 본초자오선을 통한 경도의 지정에 관한 계쟁으로 비화된다. 1884년, 워싱턴 D.C에서 국제 자오선 회의가 개최된다. 이 회의에 26개국 41명의 대표가 참여한다. 결의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현존하는 여러 본초자오선들을 하나의 본초자오선으로 통일한다.

② 경도를 측정하는 기준인 본초자오선을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자오선으로 정한다.

③ 본초자오선을 기준으로 서경을 -로 동경을 +로 표기한다.

④ 편의를 위해 세계시를 통일한다. 단, 원하지 않는 지역은 채택하지 않을 수 있다.

⑤ 세계시를 12시간 단위에서 24시간 단위로 한다.

⑥ 하루의 시작을 정오에서 자정으로 바꾼다.

편의를 위해 공간과 시간 부분에서 십진법을 응용하기 위한 학문적 연구를 확장한다.

 

  이날 천지가 개벽했다. 세계시가 탄생함으로써 전 세계의 로컬타임이 휘발되었고, 하루가 태동하는 기점이 바뀌었으며, 이후 경도가 갖는 이론상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날짜 변경선이 표기되고 요일이 재편되었으며, 단순히 시간값만이 아닌 경도와 위도를 위한 위치값까지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일이 단지 저 하늘 어딘가에 추상적인 선 하나를 긋는 것으로 인한 결과였다. 세계시의 등장은 곧 제국주의적 권력의 현현처럼 간주되었다. 관련된 문화적 대응물로는 1907년 출간된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밀정』이 있는데, 소설은 그리니치 천문대를 폭파하라는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밀정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는 중앙집권화된 공적 시간을 파괴하고 시간을 무정부화하기 위함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루스트를 위시한 사적 시간, 개인적인 시간은 보편적인 공적 시간의 대두로 인해 촉진되었다. 세계시가 규정하는 공적 시간과 주체가 경험하는 사적 시간 간의 불일치는 각종 문화적인 형태로 표현되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 예랄 수 있다. 이는 모더니티에 관한 보들레르의 전설적인 시간관을 상기시킨다. 모더니티는 일시성과 영원함 모두를 포괄하는 시간적 개념이라는 그의 진술은 마치 그리니치 표준시 이후 도래할 상반된 시간을 예증하고 있던 듯하다. 어느 하나의 시간도 제거할 수 없으며, 어느 하나를 제거한다면 마찬가지로 다른 하나도 제거된다는 사실을. 마찬가지로 스크린을 폐지한다면, 현실 또한 여지없이 파괴될 것이다.

 

  이윽고, 대안은 없다는 닳고 닳은 한계에 봉착한다. 세계와 스크린이 더 이상 분리 불가능한 지경으로 협착되었기 때문에 스크린을 폐지하는 일이 세계를 포기하는 일이라면 예술은 스크린에 다른 이미지를 영사하는 일 외에, 근본적으로 어떤 다른 시도도 불가능한 걸까.

 

 

⟪그리니치 천문대를 공격하라⟫ 전시 무빙포스터

 

우리의 혁명은 추상에서 완수될 것이다

 

  무빙이미지로 제작된 전시 포스터를 바라보면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뷰파인더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원과 스크린, 그리고 그리니치 천문대는 중층적인 관계를 갖는다. 손가락-스크린-천문대의 관계에서 조우하는 것은 손가락과 스크린임에도 파괴되는 것은 천문대이다. 스크린은 어떤 경우에도 파괴되지 않는다. 스크린 없이는 손가락과 천문대의 반응은 일어날 수 없다. 스크린 없이는 천문대라는 대상을 식별해낼 수 없으며, 대상을 폭파할 수도 없다. 스크린은 반半물질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터치를 담아내는 동시에 피격되지 않는 유령적인 신체이다. 매개항이자 비관계항. 이것이 스크린의 단면이다. 그렇다면 스크린에 약점은 없는 걸까.

 

  시도해볼 법한 전략은 스크린의 ‘단면’을 다른 개념으로 사유하는 일이다. 당장 무릎을 탁 칠 묘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스크린이 영사하는 바대로만 현상하는 세계의 조직 원리를 재검토함으로써 다른 방식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물리적인 차원에서 수행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애초에 전시가 축 x로 가정했던 그리니치 천문대는 왜상이다. 그리니치시가 1972년에 협정세계시로 이행하면서 전 세계의 시간연구소가 보유한 원자시계의 평균값이 세계시가 되었으며, 따라서 시간은 보다 완벽한 추상성과 불멸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국제 표준단위계 또한 추상화되며 원기를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지점으로 이동시켰다. 이미 모든 것이 지나갔다. 그렇다면 그리니치 천문대를 타깃으로 삼는 기획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당신이 너무 늦게 도착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이제 와서 무엇을 폭파하고 무엇을 반대한들 달라질 게 없다. 정확히 말해서 우리가 거부해야 할 대상들은 이미 추상 너머로 도주하였다. 거꾸로, 그 덕에 문제는 꽤나 수월해졌다. 이제 우리의 혁명은 추상에서 완수될 것이다. 인류는 단순한 선 하나로 시간과 공간을 창출했다. ‘그것’이 추상 너머에 있다면, 추상의 경로를 바꾸면 된다. 단지 그뿐이다. 언어가 보편적인 추상이라면 ‘플랫’이라는 힘없는 낱말을 ‘지궁도’ 개념으로 대체할 때 전시는 단순한 현현태이자 소급적으로만 드러나는 시제적 무능으로부터 벗어나는 동시에, 공간의 유영이 아닌 전유의 형태로 작업을 대자화할 수 있게 되며, 결과적으로는 시공간의 성격을 파악할 양식화된 인식의 테두리를 갖게 된다. 시공간과 인식 사이의 경로, 그것을 형식화하는 추상의 문제가 긴요하다. 매개된 현실을 대자적으로, 비판적으로 기획할 수 있는 공간은 예술밖에 남지 않았다.

 

  스크린을 무대화하는 동시에 전시를 정치화하기 위해 구자명, 이의록, 조해나 작가의 작업들을 큐레이션한다. 전시의 복합적인 작용에 의해서 여러 의미가 획득된다. 구자명의 작업은 그리니치 천문대의 웹 그리드를 훔쳐 공간에 현출시키면서 시공간을 교란하는 해킹을 시도했다. 그로 인해 2차원 사이버스페이스와 3차원 현실 사이에 초차원 포탈을 열였다. 이의록은 선별된 기호로 출력되는 이미지의 문제에 다가가며 현상과 이미지 이상의 문제를 지각할 것을 요구한다. 조해나는 사물의 운동을 탐색함으로써 그것을 움직이는 힘의 규명은 좌표계의 자의적 설정에 달려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보는 이’로서의 주체의 자리의 비자의성을 한꺼번에 인식하라는 상호모순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작가들의 분투는 각자 고심하는 문제를 드러내는 동시에 지궁도의 형상화에 기여한다. 플랫해진 세계, 스크린으로 수렴된 세계의 도판, 저 찬란한 성좌의 개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무채색의 심연. 난반사되는 스크린의 농연에서는 ‘올려다보는’ 일이 더 이상은 가능하지 않다. 3인의 작가는 빛나는 별 따위는 자취를 감춘, 유령이 출몰하는 어둠을 헤집는다. 이제는 고개 아래의 도판에 달라붙어 창을 내고 앵커를 박으며 그것들을 이어 추상의 선을 긋는다. 성좌가 그려지는 고고한 하늘과 일별하고 스크린으로 낙하해 끊임없이 가상점을 그려내고 정박점을 만들어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