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멍 난 스크린 위로 전초기지를 세우며

 

  ⟪그리니치 천문대를 공격하라로 들어가는 문에는 폭탄이라도 한 발 맞은 것만 같은 동그란 구멍이 하나 뚫려있다. 일종의 전시 해설에 해당할 <지궁도에 관한 노트>에서는 “스크린은 어떤 경우에도 파괴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폭격의 대상이 스크린이기는 할 것이다. 오늘날 스크린은 ‘플랫’과 함께 세계에 대한 설득력 있는 형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그리니치 천문대를 공격하라는 그러한 스크린에 구멍을 내고는, 안과 밖을 부단히 오가며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선제타격이 이루어진 장소에 깃발을 꽂고 전략적 요충지를 자처하고 있는 이 전시는 이들이 설정한 새로운 ‘영점’에 또 다른 예술적 실천들이 연달아 참전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스크린이라는 검은 신체는 단순한 중립지대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니치 천문대를 공격하는 이들 전위대의 난폭함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중립상태가 지니는 지형학적 미학의 기묘한 성질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

 

  스크린은 전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와 전체가 맺는 관계를 표상하고 있다. 스크린 바깥은 존재하지 않되, 그 내부를 이루는 화소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예외 없이 평등한 관계를 이룬다. 미술이 흰 종이 위에 한 붓을 그리던 공격성으로부터 디지털 화면의 평평함 위로 미끄러지기로 후퇴한 것처럼, 스크린은 하나가 전체와 맺는 관계, 개인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제안한다. 스크린은 나와 집단이 맺는 관계, 나와 세계가 맺는 관계, 하나의 예술작품이 예술 전체와 맺는 관계, 그리고 하나의 상품이 시장경제 전체와 맺는 관계들 사이의 상동을 주장한다. 스크린은 우리 세계의 지구본으로써 자신을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수히 많고 작은 화소 중 하나에 지금 당신이 살고 있다고 말한다.

 

  스크린은 오늘날 유력한 세계관적 사물 중 하나로, 사르트르의 개념을 빌자면 일종의 ‘실천적 타성태’다. “실천적 타성태는 인간의 에너지를 투여받아 인간 행위를 대체하고 인간 행위처럼 기능하는 물질”을 말한다. 그것은 “직접적 인간관계를 더 질서화된 간접적 인간관계로 대치하는, 제도처럼 기능하는 (지하철, 경찰복, 수표장, 보도, 달력 등의) 물리적 사물이다.” 실천적 타성태의 지배하에 인간이 다른 인간과 맺는 상호작용의 방식은 ‘수열성seriality’, 즉 “다른 모든 사람과의 깊은 획일성을 함축하는 통계적 익명성”이다. 물론 미술에서는 하나의 작품이 다른 작품에 대해 갖는 획일성이며, 스크린에서는 하나의 화소가 다른 화소에 대해 갖는 몰개성에 다름 아니다.

 

***

 

  물론 이것은 스크린이 역사적으로 취하게 되었던 한 특수한 양상에 불과하다. 이것이 스크린이 파괴될 수 없는 진짜 이유다. 스크린은 때로 인식의 틀 그 자체를 말하기 때문이다. 비록 스크린이 특정한 필연적인 단절(예컨대 거울 속에 비친 나와의 단절)을 전제한다 할지라도, 그 단절의 형태가 디지털 스크린이 내포한 화소 간의 단절일 필요는 없다. 더욱이, 디지털 스크린이 갖는 사실주의적 전략은 화소 간의 경계를 비가시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데 있다. 디지털 스크린에서는 분절된 화소들이 빈틈없이 점등될 때에야 시각적 리얼리티가 산출될 수 있지만 정작 그 관계만큼은 감춰져야 한다. 이러한 관계는 영화에서도 유사하다. 영화는 분절된 사진 프레임 여럿을 하나의 유기적 움직임으로 만드는 영사 기술을 사용한다. 움직임을 가능케 하는 것은 각 프레임이 갖는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연속성 속에서 차이가 소거될 때에야 영화의 시각적 환영이 재생된다. 디지털 스크린과 영화 기술의 유사함이 말해주는 것은 이들이 이데올로기적 장치라는 데 있다. 즉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 어딘가에서, 정치적인 지형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지대한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 차이야말로 시대성을 드러낸다. 보드리는 카메라 렌즈에 의한 영화적 시선이 단안원근법적 시점을 갖춤으로써 이상적인 보기의 지점, 즉 주체의 위치를 설정한다고 본다. 그러나 디지털 스크린에는 그런 시선의 위치가 없다. 디지털 스크린이 호명하는 주체는 화면상에 분절된 움직임들을 통합된 하나로 인식하고 그것을 의미화하는, 특정한 지향성을 갖는 주체가 아니다. 그것은 비정치적 주체, 혹은 주체라고도 할 수 없을 무엇을 호명한다. 그런 점에서 ⟪그리니치 천문대를 공격하라⟫가 관객에게 제공하는 다층적 공간감은 전시공간을 둘러싼 담론 싸움의 한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관객은 커튼이 드리워진 어느 한 공간으로 파고들어 가야하며, 쇠파이프로 가로막힌 좁은 위치 내에서만 움직이거나, 때로는 강요된 시선에 의해 그 너머를 흘깃 훔쳐보아야 한다. 여기서 플랫하던 전시장은 내파되고,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전(시)장이 다시금 세워진다. 물론 그 장치들을 감추지 않으면서.

 

 

 

***

 

  환상은 우리의 인식에 언제나 수반되는 것으로,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한 개인이 자기 자신을 둘러싼 가장 근본적인 의미의 결정하는 장소가 바로 이 환상, 정확히 말하면 최초의 환상인 ‘원환상’에 있다고 말한다. 원환상은 부모의 성관계에 대해 아이가 품는 무의식적 환상이다. 이 환상을 토대로 할 때 비로소 아이는 자신의 삶을 (부모의 사랑, 자신의 삶의 이유 등등) 의미화 할 수 있게 된다. 그리니치 천문대를 공격하라에 설치된 군용 천막은 은밀한 부모의 침실로 들어가는 느낌을 주는데, 그 내부에는 대각을 향해 솟구치는 DNA, 기계적인 반복 운동, 관음적인 뷰파인더가 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의록의 <Merry-Go-Round>는 우주와 인간의 시선을 잇는 전파망원경의 유려한 움직임을 좇는다. 과학기술을 통한 광학적 이미지의 생산은 인간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이미지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만들어 낸다. 보드리는 “과학적 실천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광학기계의 기술적 특성 때문에, 광학적 도구가 이데올로기 생산에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숨겨질 뿐만 아니라 광학기계 자체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효과 또한 숨겨지는 것은 아닌지” 질문한다. 과학 이미지는 지향성 없는 평평한 이미지의 세계를 구축한다. 거기에는 그 어떤 시선도, 중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Merry-Go-Round>는 그러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전파망원경의 부산한 고갯짓 자체를 천천히 영상 속에 담아낸다. 광학적 이미지의 생산과정을 추적하는 이의록의 이미지는 객석에 앉아 고개를 뒤로 돌린 관객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 시선의 이동은 주체적 해석이 향하는 능동적인 방향성(혹은 언제나 방향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때때로 이런 시선은 커튼 뒤에 숨어 있는 영사기를 발견하게 해 준다. 투명할 줄로만 알았던 과학 이미지로부터 사람의 손때를 발견하는 것처럼.

 

  구자명이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은 웹사이트가 갖는 매끈한 표면이다. 자연이라는 일차적 대상을 갖는 영화와 달리, 디지털 스크린은 새로운 종류의 리얼리티를 생산해낸다. 그것은 원본 없는 리얼리티, 셀 수 없는 종류의 코드들이 상호 지시하는 붕 뜬 공간이다. 이의록이 과학 이미지에 수반되는 지향성에 주목했다면, 구자명은 그러한 지향성을 자신의 무기로 삼는다. 건축과 웹사이트, 물질 및 신체와 웹사이트가 갖는 유비 관계는 웹사이트가 조건 짓는 플랫함을 내파하는데 동원된다. 그것의 물리적 형상은 복잡한 DNA 구조를 연상시키는 3차원 구조다. 가상과 현실의 의미를 잇는 분자 구조는 플랫함으로 추상화된 공간을 꿰어 뚫는 창이자 디지털 회로로 이뤄진 환영의 잠금장치를 열어젖히는 열쇠로 기능한다.

 

  조해나의 사물들은 그리니치 천문대를 공격하라의 전시적 성격을 알레고리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들이 폭격한 스크린의 표면은 인식적 환상을 고쳐 잡는 정치적 공간인 동시에, 수복해야만 하는 외상적 자욱이다. <Blue shift>은 중심을 갖는 듯 갖지 않는 영원한 반복 운동을 보여준다. 주체의 외상은 그대로 말해질 수 없는 대신, 그 주변을 이루던 관계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을 통해 그 자신을 증언한다. <White hole>은 고정된 주체의 시선 틀을 제공하면서도, 흔들리는 파도 속에서 언제나 찰나밖에 보여주지 않는다. 찰나를 좇는 주체의 고갯짓은 상연되는 환상을 향해 아이러니한 움직임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니치 천문대를 향한 폭격은 미술 내에서 스크린을 둘러싸고 벌어지던 퇴행에 대한 새로운 상징적 개입이다. 지궁도는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물리적 지형의 표면 위에 세계를 향한 새로운 인지적 지도를 표시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지도를 이루는 추상적 기호들과 표기들, 즉 개념적 도구들은 우리의 세계는 평평하지 않음을 당연하다는 듯이 과시할 것이다.

 

 

 

***

 

  그러나 폭격을 통해 스크린의 두께가 확인되는 것은 아주 잠깐의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스크린의 가상성,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점으로 한 본초자오선의 작위성을 폭로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깨어진 의식을 꾸준히 이어가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 전장은 물신주의적 부인 “나는 엄마에게 남근이 없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식의 수사학으로 전환된다. 단호한 상징적 인식, “나는 안다” 뒤로 “하지만….”이 뒤따라오게 되는 이유는, 사회적인 차원에서 (미술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도착증적 집착이 물리적이고도 실재적인 차원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화폐가 사실은 단순한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모두가 화폐를 통해 가치를 교환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찢어버리거나 내다 버릴 수 없다. 나는 우리의 세계가 평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평범한 군중 속의 한 명으로서 행동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할 도리가 없다.

 

  미술에서의 이러한 집단적 무기력은 미술관이 중립지대임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전략적 요충지로 선언할 때에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 이를 통해 미술관은 평평한 스크린의 역할을 벗어나 정치적 투쟁의 각축을 벌이는 입체적인 장소로 기능한다. 이러한 지형은 예술가들에게 미학적 실천을 위한 새로운 물리적 여건을 선사하는데, 평평한 스크린 위에서 분열된 화소로 점멸하던 수열체적인 예술 실천들은 새로운 역사적 지평과 관계 맺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니치 천문대를 공격하라가 제안하는 지궁도는 새로이 설정된 경도와 역사적 시간성의 수립을 통해 미술에서의 정치적 지형을 창안하기 위한 개념일 것이다. 그 시작은 작은 전시장 한켠에서 이미 이뤄진 것 같다. 그곳에 전초기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