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 이후의 선전물들: 이대 시위에서 MC무현, 그리고 성재기까지

 

탈정치? 미적 정치의 재출현

 

  2016년, 이대 시위라고 이름 붙여진 독특한 정치적 사건이 출현한다. 이 낯선 정치적 사건에선 과거의 시위나 운동을 표상하던 전형적 형식인 민중가요나 저항가가 울려 퍼지는 대신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의 대중가요가 불려졌다. 그리고 시위의 주최측은 ‘운동권 총학의 참여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집단 행위가 ‘정치색을 띤 어떤 외부세력과도 무관하다’고 밝혔다. 그들은 이 사건이 흔히 생각하는 정치라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며 노골적인 탈정치화를 선언했다. 그리고 그 선언처럼 그들의 운동은 정치적이라기보단 어떤 정서적, 정동적인 활동에 가깝게 보이기도 했다. 학내의 비민주적인 의결구조에 저항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이대 시위는 우연찮게도 최순실 사태의 흐름을 타고 전국민적인 촛불시위로 전화되며 절정에 달했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촛불시위 역시나 이대 시위만큼 강렬한 정동적 분출을 특징으로 하는 생경한 정치적 풍경을 만들어냈다. 거대한 미적 이벤트로서의 정치가 재출현하는 순간이었다.

 

  이대 시위와 촛불 시위는 모두 과거의 정치라고 부르는 것과의 단절을 노골적으로 표명하였다. 그래서 그것은 새로운 정치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탈정치화 현상으로 불리었다. 예컨대 자신들의 집단 활동은 어떤 ‘정치적 행위가 아닌’,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닌’ 그저 상식적이고 ‘순수’할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어느새 정치란 불순한 것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서 정치가 의미하는 바란 그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난장에 불과하며, 정당이라고 불리우는 물화된 세력들의 싸움으로서, 그 안에 이념이나 사상적인 규정으로서의 정치적 의식이란 부재하거나 기만일 따름으로 여겨진다.

 

  이 같은 탈정치라는 관념이 더욱 당혹스러운 점은, 설령 정치적 의식이란 것이 제대로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문제로 삼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연대나 조직화를 시도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정치적 의식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각각의 사적인 개인으로 놓인 시민들은 그러한 정치적 의식에 의해서만 비로소 자신들의 사적인 이해관계를 초과하여 외부의 타자들과 연대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형성된 공동체를 우리는 정치적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사적인 이해관계 내지는 취향 따위로 묶인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역량을 갖는다. 하지만 오늘날 이처럼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타자들의 연대는 어느새 불순하고 불편한 것이 되어버린 듯싶다.

 

  한편으로는, 타자들 간의 연대가 그 자체로 운동의 약점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사적인 개인들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초과하는 일이 그 자체로 이해받질 못하기 때문이다. 사적인 관점에서는 도저히 불가해한 정치적 연대는 그저 ‘정치적 기획’에 불과한 것으로 쉽게 폄하되고 공격 받는다. 과거 20세기 정치의 산물에 불과할 것만 같은 정치적 ‘공작’은 오늘날 ‘기획’이라는 말로 세련되게 재탄생하게 되었다. 이 ‘기획’이라는 말은 어떤 복잡성을 가진 정치적 사안이든 앞서 언급한 ‘권모술수의 난장’으로 소화시켜버리는 말이다. 예컨대 그들이 펼치는 정치적 운동의 표면적인 목적 뒤에는 정치라는 말의 참된 의미인 바, ‘물화된 진흙탕 세력 싸움’이 숨어있을 뿐이라는 식이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이 ‘기획’이라는 음모론적 개념은 최근 현실정치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스캔들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말이 하나가 되었다. 그저 공적 인사의 자질을 의심케 만드는 사적인 스캔들 이면에는 사실 그를 음해하기 위한 정치적 음모가 숨어있다는 식이다. 이렇게 기획이란 개념은 오늘날 지극히 사적인 스캔들을 마치 공적인 사안으로, 지극히 정치적이고 공적인 사건은 마치 사적인 권력 타툼에 불과한 사안으로 만들며,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마구 뒤섞어버린다.

 

  결국 오늘날 정치적 의식은 부재하거나 기만적이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문제로 여겨진다. 그로 인해 우리는 단순히 부재하거나 망가진 정치적 의식을 재건하자는 요구를 함으로써 사태를 수습할 수도 없게 된듯하다. 탈정치라는 독특한 의식의 출현은 이처럼 오늘날 정치라는 낱말이 처한 초라한 처지에 의해 강제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탈정치라는 말에 담긴 모호함을 감지하지 못하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탈정치라는 이 모순적인 표현은 오늘날 새로이 나타난 정치적 지형을 어떻게든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말에 가깝다. 어쨌거나 정치적 현상의 연장이기는 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낯선 정치적 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단순히 과거의 정치에 대한 반대 혹은 상식적이고 순수와 같은 말들로는 이 낯선 정치적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듯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흔히 ‘좌우 대립으로 표현되는 이념의 정치’, 또는 ‘부르주아 대 프롤레타리아’, 혹은 ‘지배자 대 민중’과 같은 계급적 집합체들의 운동으로 이해되는 정치라는 관념으로도 더 이상은 그들을 설명하기 어려운 듯 보인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 미학적 정치의 역능에 관해서

 

  정치철학자 랑시에르는 그만의 독특한 정치철학이론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란 개념을 통해서 미적인 분출로서의 정치에 관해 새로운 관점을 제안한다. 그에게 정치란 마치 이대 시위와 촛불 시위가 그랬던 것처럼, 일정하게 표명되는 이념적 대의와 구성체에 의해 조직되는 것이 아니다. 랑시에르에게 있어서 정치란, 마찬가지로 이화인과 촛불 시민들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특정한 이념의 대표자가 견인하는 당파적 주체화가 아닌 그들 자체로 발휘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인 민중의 역능, 무엇보다도 감각적인 것의 생산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랑시에르는 미학과 정치의 불가분의 관계를 강조하곤 하는데, 이에 대해 우리는 ‘미학적인 정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촛불 정치로 대표되는 K-미학 정치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이 거부한 이념적 판단의 빈자리를 윤리적 판단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미학적인 정치는 윤리와 비밀스런 화친을 맺는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그가 흔히 윤리적 전환이라고 부르는 경향에 관해 비판을 가했던 것처럼 미학과 정치의 윤리화를 거부한 바 있다. 그것은 정치를 통해서 열어젖혀야 할 해방의 공간을 윤리적 규범화를 통해 닫는 행위다. 그런 점에서 윤리적 충동이 한편에 놓여 있는 이대 시위와 촛불 정치는 자신이 선언하였던 탈정치 운동의 순수성에는 이르지 못한다. 이 반쪽짜리 미학주의 정치에서 윤리적 충동의 역할은 이들에게 부재하는 이념 대신 이들 운동의 열정을 추동하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촛불 정치의 가장 적대적인 진영으로 보이는 곳에선 마치 미학적인 정치의 순수성에 다다르고자 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이는 오늘날 또 다른 감성 정치의 한 전형이 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일베’라 불리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미학적 정치 그룹이다.

 

  흔히 일베는 애국 보수를 지향하는 꼴통 인터넷 커뮤니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의 악명을 드높인 것은 거기서 생산되는 온갖 비윤리적이고 비정상적인 표현물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나름의 미적인 생산물이기도 하다. 일베에서 생산되는 무수한 미적 생산물들, 이른바 ‘이기야노체’라고 불리는 언어적 유희부터 시작해서 ‘MC무현’이라고 이름 붙여진 어처구니없는 온갖 리믹스 음악 작업들, 그리고 ‘노알라’로 대표되는 기이한 이미지 꼴라주 합성물들까지 일베에선 민중들의 진정한 미적 역능,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 정말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갈 때까지 가버린 일베의 미적 실천은 촛불 정치조차도 도달할 수 없었던 순수한 미학주의 정치, 미학의 탈윤리화에 도달하려는 듯 보이는 것이다.

 

일베 미학에 관해서

 

  물론 일베의 미적 생산물들은 흔히 그들이 극우를 지향하는 것으로 알려저 있는 것처럼, 과거의 정치와 관계하는 ‘이념적 판단’에 종속되는 것이지 않냐고 되물을 수 있다. 일베는 노골적으로 보수라고 일컬어지는 노선, 즉 자유시장주의를 지지하고 애국주의를 수호하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베를 일베로 만든 것은 바로 그들의 악마적인 미적 생산물들 덕택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 일베의 전신은 ‘디시인사이드’라는 이름의 또 다른 웹 커뮤니티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오늘날 일베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그 독특한 악마적 미학 역시나 이미 디시인사이드에서 생산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우선 일베는 디시인사이드에서 제작된 미적 생산물들에 당파적인 맥락을 부여하고 조직화하는 시도 속에서 탄생한 공간이었다는 점을 떠올릴 수 있다. 외부의 어떤 정치 세력과도 연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대 시위의 순수성이 아이러니하게도 촛불 시위로 전화되며 조직된 것처럼, 일베는 디시인사이드에서 나타난 미적 생산물들의 순수성을 전화하고 조직화함으로써 탄생하게 되었다. 물론 그러한 시도는 오늘날 모든 것이 탈정치화해버리는 관성의 힘 속에서 일탈에 그친다. 탈정치라는 독특한 맥락으로 읽히는 순수한 미학적 작용은 각각의 기원적 순간 속에서만 일시적으로나마 반짝이며 나타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일베 이용자들의 조상 격인 디시인사이드의 유저들은 자신들의 미적 유산을 계승한 일베를 향해 유대감을 표하기는커녕 놀랍게도 경멸 섞인 선긋기를 하곤 한다. “우리는 그저 재미로 만든 것일 뿐인데, 저들은 진지하게 그것을 정치적으로 조직화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탈정치적 미학주의가 처한 운명 속에선 결코 불가능한, 혹은 끝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시도이다. 실로 최전선의 일베 미학은 그들 최대의 비판적 대상이자 동시에 그들 미적 생산의 오랜 소재일 터인 노무현 전 대통령을 도대체 비판하는 것인지 애호하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이 같은 표현과 생산을 계속하다 보니 조롱의 대상이었던 그에게 오히려 정이 들게 되어버렸다”고 실토하는 일베 유저들 또한 적지 않은 것이다. 이는 마치 순수한 미학주의의 표명이었던 바, 과거의 이념적인 정치적 구분에서 전적으로 해방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처럼 보인다.

 

  교양 있는 낭만적 지식인들은 흔히 미적인 것을 곧 정치적인 것으로 그리고 미학적 정치를 곧바로 옳은 것으로 여기길 좋아한다.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오직 순수한 영혼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19세기의 유미주의 사례는 미적인 것이 곧 세계에 대한 비판이 되었던 시기를 가리킨다. 악마적 착취로 작동하던 당시의 산업 자본주의는 동시에 메케한 공장의 굴뚝 연기와 같이 온갖 더럽고 추한 것들의 온상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아름다움을 옹호하는 일은 추한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미적인 감성을 강조하는 아이폰, 스타벅스, 나이키, 루이뷔통 등등 아름다운 상품들로 넘쳐나는 세계에선, 아름다운 영혼과 더러운 영혼 너나 할 것 없이 미적인 감성만큼은 충만한 듯싶다. 그리고 이에 호응하듯 일베 및 그들의 느슨하고 수평적인 연대자들인 ‘태극기 부대’는 촛불의 미학 정치 못지않은 어마어마한 미적 이벤트를 조직한다. 이 같은 미적 충동이 넘실대는 세계에 반응이라도 하듯 최근 몇 년 동안 시각예술 분야에서도 상기한 미적 충동의 현장을 담아낸 작업들을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태극기 시위’의 풍경 이미지는 어느덧 미술관에서 흔히 마주치는 기록물, 어떤 전형적 푸티지가 되어있다. 그리고 그들은 태극기 시위가 품은 악마적인 정치성을 비판한다거나 다큐멘터리적으로 기록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외려 예술에서 일찍이 사라져버린 강렬한 미적 분출에 매료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베조차 자신의 순수한 미학주의 정치의 자리를 확신하긴 어려운 듯 보인다. 왜냐하면 일베 미학의 주요한 동력이 바로 윤리적 정치를 위반하는 과정 속에서 피어오르는 정동에 의해 추동되기 때문이다. 이는 촛불 정치의 미학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데, 그들 또한 탈정치화하는 과정 자체가 그들 실천의 정동적 원천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촌스러운 과거의 정치라고 판단하는 것들과의 의식적인 단절을 선언함으로써 윤리적인 도취감을 완성한다. 반면 일베의 미학에선 앞선 윤리적인 정치와의 위반적인 단절감 속에서 도취감을 얻어낸다.

 

재기하라! 미학주의 정치 생산물의 작용에 관해서

 

  탈정치라고 불리우는 역설적인 지형 속에서 정치와 미학이 마구잡이로 뒤섞이는 와중에, 우리는 그러한 미학주의 정치의 진정한 요구를 도대체 어떻게 구분할 수가 있을까? 그것이 담지한 진리란 대체 무엇인 걸까? 실제로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이들의 미학이 있고 악마적인 영혼의 미학이 있을 뿐인 것일까? 오늘날 촛불 정치의 미학과 일베의 미학으로 대표되는 미학주의 정치는 과거 이념적 정치라는 것과의 단절을 표방하며 나타났다. 이 탈정치화된 미학주의 정치는 실로 그들이 과거의 정치에 안녕을 고하는 것처럼, 즉 이념적 당파성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처럼 보인다. 흔히 ‘밈’과 ‘드립’, ‘짤방’이라는 독특한 미적 형식으로 생산되고 있는 이 미학주의 정치의 생산물들은 전염성이 아주 강력하다. 이것들이 가진 전염력은 이념이라는 면역력을 너무나도 손쉽게 무력화시켜버린다.

 

  ‘재기’. ‘재기해’, ‘재기하다’란 신조어의 선풍적인 유행 이후로 우리는 더욱 고인 드립을 도덕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의식의 토대를 잃어가고 있다. 오늘날만큼 상식적인 도덕적 호소가 이렇게나 무력한 날이 또 있었을까 싶다. 이렇게 ‘재기하다’란 말이 폭발적으로 유행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역시나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존의 윤리적 규범을 위반하는 데에서 오는 강렬한 정동적 자극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이 같은 말들을 내뱉으면서 느껴지는 쾌감은 이 말들이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특정한 정치적 판단-이를테면 저열한 남성성에 관한 여성주의적 비판의 구호라던가-보다도 우선한다. 그리고 이 ‘재기하다’의 유행에도 역시나 지독하리만큼 미적인 요인이 뒷받침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재기하다’ 혹은 ‘재기해‘라는 말이 지닌 고유의 시적 어감과 운율의 매력적인 울림이 바로 그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재기하다’라는 표현은 몇 년 전 등장한 메갈리아에서 워마드로 이어졌던 독특한 여성주의 진영에서 만들어졌다. 흔히 한국 남성들의 몰상식을 조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탄생한 이 용어는 과거 ‘남성연대’라는 조직의 대표이던 ‘성재기’씨의 우스꽝스러운 죽음을 어원으로 갖는다. 그러나 주지하듯, 이 용어의 사용은 이를 생산했던 특정한 진영에서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일반적 대중들에게까지도 널리 전파되었다. 말 그대로 유행어가 된 셈이다.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말 특유의 시적 운율과 어감에서 기인하는 듯 보인다. 떠올려보자면 고인의 이름이 곧 일반명사처럼 사용되는 밈과 드립의 탄생, 특히나 자살에 관해서는 ‘재기하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같은 고인 드립은 마치 이를 제작하는 공장이라도 있는 것처럼 무수히 새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2018년 온갖 성추문에 휩싸이다 끝내 법적 책임을 지지 않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배우 조민기씨 또한 사후 ‘민기하다’라는 끔찍한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리며 새로운 드립의 어원이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고인 드립들은 지금까지도 수없이 파생되고 있다. 그러나 오직 ‘재기하다’만이 오늘날처럼 크게 유행하며 살아남게 될 운명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 낱말의 어원이 된 특정한 인물인 ‘성재기’라는 인물의 고유한 삶에 얽힌 특별한 맥락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목을 매단 조민기씨와 달리, 성재기씨는 한강에서 다이빙 퍼포먼스를 하다 그만 불행한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 둘 각자가 삶을 마감한 맥락은 전혀 상이하다. 그러나 두 용어는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그 누구도 각각의 단어가 만들어진 어원의 맥락을 따져가며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 둘은 의미상 완벽하게 호환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재기하다’만이 여기에 담긴 고유한 언어적 운율과 어감의 미학, 그리고 특히나 재미있다는 이유로 동일한 의미를 가진 무수한 말들 사이에서 살아남아 지금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 같은 독특한 미학주의 생산물의 작용은 살펴본 바와 같이 어떤 측면에서는 정말 섬짓한 지점이 있다. 특히나 그저 재미만 있다면 거리낌 없이 수용되곤 하는 이 정동 정치의 역능은 바로 그들이 겨냥했던 과거의 이념적 정치 사이의 경계를 실제로 가뿐히 횡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베가 만들어낸 끔찍한 언어적 유희 ‘이기야노체’는 실제로 좌우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그저 재미있고 운율이 좋다는 이유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다. ‘재기하다’ 또한 이것이 생산된 여성주의 진영에 국한되지 않고 널리 사용되며 유행어가 된 것처럼 말이다.

 

  물론 여전히 이와 같은 악마적 미학의 비윤리성에 거북함을 느끼고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려는 이들 또한 있다. 그러한 말들이 지닌 끔찍한 저열함 탓에 아예 입에 담지도 않으려 하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특히나 교양있는 지식인층은 이 같은 이상 현상 앞에서 더욱 큰 곤란을 겪고 있다. 이에 관해서 그들은 도저히 형용하기 어려운 역겨움을 느끼는 탓에 그것들을 그저 도덕적이고 상식적으로 규탄하는 데에 그치거나,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베 현상을 다루는 지배적인 관점 중 하나는 아예 무시하기였다. 도저히 상식 바깥으로 보이는 이 현상은 그저 예외적인 것에 불과하며, 그러므로 그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사라지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시간이 지난 후 어떻게 되었을까? 일베적 미학은 오늘날의 탈정치적 미학주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 실천하는 어떤 전형이자 최전선이 되어버렸다. 한편으로 교양 있는 지식인들은 마치 일베를 제대로 비판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인지 오늘날의 미학주의 정치의 윤리적 버전에 다름 아닌 쪽에 전력으로 투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정치를 미학화하는 방식으로 동일한 탈정치의 지반 위에 서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가능한 정치적 실천은 오직 더욱더 정동적인, 특히나 재미있는 이벤트 혹은 미적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일뿐인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그런 미학주의 정치 자체에 반감을 가진 이들이라고 해서 사정이 딱히 나은 것 같지는 않다. 일베의 악마적 미학을 향해서 우리가 가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비판은 그저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도덕적인 규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을 부정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충분하지는 못해도 당연히 옳은 일이기는 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같은 규탄의 에너지는 오히려 비난의 대상인 일베의 악마적 정동이 분출되는 것을 저지하기는커녕 이를 카니발적으로 부추기는 힘으로 전환되어 버린다. 도대체 왜 이런 놀라운 마술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오늘날 미학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감성 정치의 원인이자 결과 자체가 정동의 자극과 분출로 귀결되는 것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이진 않을까? 일베의 미적 생산물의 작용에서 당파적 판단은 중요치 않게 되었다. 그것은 그저 더욱 충만한 정동을 분출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곧 정치적인 성공인 셈이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편에선 재미와 희열로, 저들의 편에서는 혐오와 증오로 여겨진다. 이 같은 정동의 충돌은 감성정치의 지형 위에서 서로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뒤섞인다. 그들이 일베의 미적 생산물에 역겨움을 느끼면 느낄수록 외려 그만큼 이로부터 작용하는 희열 또한 더욱 커진다. 때문에 그들을 향한 비판과 비난은 목적과는 정반대로 작용하며, 오히려 그들의 감각적인 생산을 부치기는 불쏘시개가 되어 버린다. 그런 점에서 일베를 상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저 무시하기라고 했던 것도 일부분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슬프게도 정동의 생산에 있어서 윤리적인 분출로서의 미적 생산물들은 오늘날 악마적 미학의 생산물들의 힘에 훨씬 못 미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교양인들의 규탄 에너지가 역설적으로 야만인들의 카니발적 분출로 승화되듯, 또 야만인들의 열정이 우세해지면 우세해질수록 우리들의 윤리적인 도취감 또한 나란히 상승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오늘날 촛불정치와 일베정치로 대표되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통한 정동 정치가 처한 딜레마이지 않을까.

 

감수성 정치에 관해서

 

  감성 정치의 한복판 속에서 모두가 맞장구라도 치듯 인권 감수성, 성인지 감수성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OO 감수성 같은 말들을 지어내는 일은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버렸다. 심지어 환경 감수성이니, 프로토스 감수성이니 하는 말까지 들려온다. 이제 사회정치의 문제는 특정한 이념적, 당파적, 계급적, 의식적, 이성적 판단에 의한 것이기 보다도 랑시에르가 강조했던 것처럼 말 그대로 감성에 의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 같은 감수성 정치 속에서 정치적 반대자는 그저 의견이 다를 뿐인 것이 아니라 감수성 자체가 메마른 사이코패스 냉혈한처럼 여겨지는 일이 부지기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반대편에선 외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너희들은 일베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말이다. 사실상 일베가 자신들의 미적 생산물과 정치적 실천을 대하는 태도는 모종의 감수성을 결여하고 있기보다는 감성적으로 매우 충만하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그들은 참을 수 없는 웃음과 희열, 또는 적대자들을 향한 이글거리는 증오와 분노심, 그리고 때로는 자기와 같은 지지자와 취향의 공동체를 향한 깊은 유대감을 보여주며 충만한 감수성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실천을 나눔한다. 그건 가히 일베 감수성이라고 불려 마땅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일베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 넷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익명적 타자들을 향한, 또 그러한 타자들에 의한 무분별한 폭력적 정동의 분출은 이미 큰 사회적 문제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이 같은 폭력성의 분출 원인을 심리학적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 또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요약된다. “넷상에서 폭력성을 스스럼없이 분출하는 이들은 흔히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공동체에서 사랑받지 못한 애정결핍자이자 반사회주의자다. 때문에 정상적으로 타인과 관계 맺는 법을 모르며, 그러한 자신들의 내적 결핍을 충족하기 위해서 비뚤어진 방법으로 타인을 향해 공격성을 표출한다”는 것이다. 또 “그들은 자신의 공격에 의해 타인이 격한 반응을 보이면 보일수록 반성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통제하고 있다는 우월감과 희열에 빠져든다.” 이 같은 이야기는 흔히 ‘프로파일러’나 ‘심리학자’들이 곧잘 들려주는 반사회적 인격자들 혹은 소시오패스의 심리적 기제로 잘 알려져 있다. 제법 설득력 있게 들리기도 하다.

 

  그러나 짚어보아야 할 점은 오늘날 그러한 폭력성의 분출이 단순히 인간적인 관계를 넘어 물화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내적 결핍은 단순히 ‘한 익명에 의해서’, 또 ‘특정한 대상을 향해서’ 폭력적으로 분출되는 것이 아니라, ‘노알라’, ‘MC무현’, ‘재기해’ 등과 같이 미적인 생산물로써 표현된다. 그것은 이제 생산된 원인을 넘어서 이 같은 생산물들이 수용되는 새로운 감각의 작용 지대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최초에는 내적 결핍에 의한 증오적인 폭력성 또는 윤리적인 도취감에 의해 만들어졌을지는 몰라도 이젠 물화된 형태를 갖고 유통되며, 무엇보다 미적이고 재미있는 것으로서 수용된다, 이러한 과정 안에서는 그들만의 독특한 미적인 공동체가 나타나기에 이른다. 일베는 촛불 시민들처럼 정치적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미적인 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들은 더 이상 내밀한 내적 결핍을 가진 익명의 개인이 아닌 셈이다. 앞서 촛불 지식인들이 일베 무시하기를 제안했던 것처럼, 심리학자나 프로파일러들 또한 자신들이 분석한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들을 상대(치료)하기 위해서 몇 가지의 솔루션을 제시한다. 그들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주어 폭력성의 원인인 내적 결핍을 해소하도록 하거나, 아니면 폭력성의 결과인 ‘타인에 대한 통제력에서 오는 우월감’을 얻을 수 없도록 아예 그들을 무시하도록 권고한다. 그러나 물화된 형태로서 나타나는 미적 생산물의 유통망 사이에선 더 이상 그와 같은 조야한 심리학적 해결책 역시나 무력할 수밖엔 없게 된다.

 

  이 같은 정동 정치의 세계에서 정치적 판단의 기준은 다름 아닌 정동적 분출의 강렬함 혹은 진정성의 척도와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이제 옳은 정치란 곧 깊이 있거나 강렬하게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른바 마음의 과학이라고 하는 신경생리학이나 표정 인식 AI 기술처럼 인간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수량화하는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곧 정치성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시대에 와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이제 정치의 척도는 객관적인 자연과학으로써 수량화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과학의 실재와 자연과학의 실재는 포개어진다. 실제로 최근 몇 년 동안 신경생리학적 자연과학 혹은 과학 기술, 특히나 디지털 알고리즘 기술의 도입이 기존의 사회학뿐만 아니라 정치 절학의 자리까지 대체하고자 하는 시도가 숱하게 있어 왔다. 정치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그러한 객관적 자연과학으로서의 정치학의 출현을 향해 꾸준히 비판을 가해 온 인물 중 하나일 것이다.

 

  시각예술 현장에서 또한 이 같은 동시대 정치철학의 흐름을 반영하는 작업들이 나타나고 있다. 작년 2021년 데이터셋을 주제로 한 전시 <포킹룸21>의 리서치랩 파트에서 발행된 장영민 작가의 연구물 <유쾌한 골짜기>는 말 그대로 객관적인 기계적 분석을 통해 일베적 미적 생산물들이 발휘하는 정치성의 정도를 산출하는 시도를 한다. 이는 감정의 분출 그 자체가 옳게 된 정치로 여겨지는 미친 세계에 대한 충실한 반영처럼 보인다. 작가는 능청스럽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진다. “변증법적 사유는 기계 학습이 가능한가.” 그는 이어서 말한다. “짤방 또는 동시대 프로파간다를 위한 데이터셋 리서치”를 진행하며 “탈진실 시대를 분석할 수 있는 표본적인 데이터셋을 구성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본 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고. 주목할만한 점은 ‘짤방’ 혹은 ‘밈’, ‘드립’과 같은 형식으로 제작되는 오늘날의 미적 생산물들이 일종의 프로파간다를 목적으로 제작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윤리적인 불쾌한 지점을 넘어서게 되면 이것은 놀이가 되고 충만한 만족감을 느낀다. 초현실주의자들의 해방적 모티프였던 언캐니는 오늘날 더 이상 억압되지 않고 짤방, 밈, 드립이라는 형태로 뒤집힌 채 실현된 듯이 보인다.”

 

 

<유쾌한 골짜기>, 리서치 자료집(왼쪽), 장영민, 2021. 출처: https://www.forkingroom.kr/%EA%B8%B0%EB%A1%9D-2021

 

노알라, 재기해, 촛불, 선전 이후의 선전물들

 

  ‘재기해’, ‘한남충’, ‘자들자들’, ‘봊나’ 등 쟁쟁한 저항과 위반의 용어를 생산해낸 특정한 여성주의 경향은 순전히 우연히 출현한 듯 보였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K-남성들은 그 이전까진 결코 이런 방식으로 조롱받아본 적이 없었다. 이 충격적인 현상의 출현 앞에서 한남충들은 온갖 반응을 보였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반응 하나는 “저들이 결코 여자일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여자들이 결코 저런 저속하고 창의적이며 신랄하게 비윤리적인 패드립과 비난의 표현을 구사할 리가 없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자인척 하는 남자들”이란 것이다. 이 같은 반응은 일베의 비윤리적 위반의 미학이 단순히 대상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징표처럼 여겼다는 점을 알려준다. 그것은 저열한 미적 생산(물)을 중심으로 하는 향락과 도취감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는 마치 한 때 좌파들이 입에 담길 좋아했던 ‘느슨하고 수평적인 취향의 공동체’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들은 과거의 이념적 정치를 비판하며, 그에 대응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정치적 조직체들의 형태 또한 문제로 삼았다. 그들이 볼 때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 조직체의 형태는 ‘수직적이며 중앙집권적이고 견고하며 배타적인’ 특징을 가지며, 이 역시나 다분히 문제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념적 정치가 아닌 새로운 정치의 시공에는 그에 마땅한 새로운 조직의 형태 즉 ‘수평적이고 느슨한 취향의’ 공동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조직체들이 바로 그 이념의 빈자리를 대신해서 공동체의 기반으로 삼은 ‘향락’과 ‘도취감’이라는 정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이 같은 정서는 일종의 무아지경 상태를 만들며, 이러한 상태에 빠져들게 되면 향락의 원인과 내부 이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게 된다. 이 같은 특징 때문에 그러한 도취감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는 조직의 형태가 느슨하든 수평적이든 상관없이 실은 그 어떤 공동체보다도 견고하고 배타적인 측면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같은 위반적인 향락은 오직 (비)윤리적인 우리들만이 나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메갈리아의 출현은 그와 같은 비윤리적인 향락이 실은 그들만의 것이 아님을 알린 가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언뜻 보기에 앞서 묘사한 동시대의 미적 생산물들은 마치 과거 정치적 풍자물이란 이미지 형식의 계보를 따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둘이 작용하는 방식은 전혀 상이하다고 볼 수 있다. 지난 박근혜 정권 시기에 제작되어 새삼스러울 정도로 큰 추문이 되었던 홍성담의 정치적 풍자화 <세월오월>은 드믈게도 여전히 고전적인 프로파간다 문법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 고전적인 회화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 캔버스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비판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맥락의 묘사이다. 그림은 세월호 사태를 중심으로 박근혜 전대통령의 유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과거 군부정권에 대한 묘사까지 빼놓지 않는다. 그러나 일베 미학의 가장 대표적인 생산물들, 이를테면 ‘이기야노체’, ‘노알라’, ‘mc무현’ 등에선 놀라우리만치 비난의 대상이자 소재에 대한 맥락은 묘사되지 않는다. 이 같은 점이 바로 밈적 표현물들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가장 큰 당혹감 중 하나다. 도저히 이 이미지들을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전달되는 지각의 충격만은 무엇보다도 생생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생산물들 내부에서는, 이를 통해 벌어진 충격적인 지각의 출처를 읽고 독해할 수가 없다.

 

 

<세월오월>, 걸개그림, 홍성담, 2021. 출처:http://damibox.com/bbs/view.php?id=work1&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39

 

  ‘노알라’, ‘재기해’, ‘촛불’ 등은 모두 표면적으론 정치적 목적을 가진 표현물이다. 정치적 목적을 갖는 미적 표현물을 우리는 흔히 선전물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것들은 오늘날 탈정치라는 독특한 지형 위에 놓여 있다. 여기선 각자의 순수성을 증명하는 일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외부 세력과의 연대는 불편한 것이다. 그것은 각자의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나타나는 기이하고 기만적인 행위다. 그렇다면 동시에 외부세력을 포섭하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특정한 요구를 알리고 설득하는 행위인 ‘선동’은 금기시 된다. 우리들뿐만이 아니라, 외부의 타자들 또한 각자의 순수성을 지닌 개별적 단위이며 그 자체로 부동해야만 하는 것이다. 연대를 통해 이 개별적 단위를 침범하는 일은 금기시된다. 선전 또한 이 같은 운명에 처해있다. ‘정정당당하게 선동과 날조로 승부하지 않고 비겁하게 팩트로 승부하다니’(물론 역설이다)라는 웃기는 드립이 우리들의 마음을 크게 울릴 정도로 ‘선전’과 ‘선동’은 곧 거짓된 날조와도 같은 선상의 것이다. 하지만 과거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선전’이란 정치적 행위의 정수였을 것이다. ‘선전’이란 특정한 정치적 의제, 이념, 목소리 등을 알리는 일련의 당파적 행위이며, 한때 우리는 그러한 정치적 주체화의 과정을 의식화라고도 부르곤 했다. 그렇게 의식화된 주체는 이젠 이전과는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마치 자신이 아니라 세계가 변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실은 ‘선전’은 정말 날조와 거짓과 같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란 이름의 세계 안에선 소외된 이들과 자본을 소유하는 이들은 전혀 다른 사실을 가진 채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 동일한 세계가 서로에겐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거짓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하나의 사실, 바로 자본주의라는 실재로부터 파생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모순과 적대 사이로 갈라진 세계 속에서 같은 눈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조정하는 것이 다름 아닌 정치적 선전이란 행위의 미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노알라’, ‘재기해’, ‘촛불’ 등으로 대표되는 탈정치적 선전물들은 자신들의 특정한 정치적 관점을 알리고 설득하고자 하는 선전의 미덕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반대로 이 미적 표현물들이 작용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이를 도저히 수용하지 못하는 저들과의 차이를 강조하고 확인하는 기능을 하며, 한편으로는 이를 함께 소비하는 이들끼리 자폐적인 향락과 도취감에 빠져들게 하는 것. 이것은 차라리 반선전물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이 같은 모습이 오늘날 탈정치화라는 독특한 지형 속에서 정치적 이미지가 처한 초라한 운명이며, 선전물로써 생산된 미적 생산물의 이율배반적인 작용이 만들어내는 모순적인 정치적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