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의 재구성

  수전 손택은 질병에 대한 환상이 질병으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이해하고 의미를 빼앗으려 했지만, 근래의 풍경은 “질병은 질병이며, 치료해야 할 그 무엇일 뿐이다”라는 그녀의 공식을 무심하게 건너뛴다. 감염성 질환은 신체 간의 물질적 교환이나 그녀가 반대했던 질병-의미의 사슬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 전체에 증상을 지핀다.(식별불능에서 비롯되는 공포, 일상의 상실에 대한 불안, 사회적 분위기의 극단적 침체) 그녀의 시도는 애초부터 환상이 질병의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의 무지에서 비롯된다. 은유는 질병의 겸병효과이며 물신성은 그녀의 예견과 달리 과학을 통한 인과관계의 규명에도 불구하고 발호한다.[1] 오늘날 손택은 덧없다. “질병은 질병이다”라는 주장은 “A는 A다” 식으로 승인될 수 없다. 질병은 언제나 치료해야 할 그 무엇 이상의 무엇이므로.

 

  해석에 반대하는 손택의 방식은 올드 뉴스가 되었으니 폐기하자. 의미의 결핍은 일시적이다. 예상 불가능한 (다른)의미의 충혈은 외려 곤란함을 부추긴다. 차라리 대항의미를 통해 기존 의미경로의 혼란을 야기하는 시도에 걸어볼 기대가 남아 있다. 그것은 이접, 침식, 해소 불가능한 교란을 일삼는다. 어디까지나 유예책이지만, 원의미에 달라붙어 끊임없이 진동하는 대항의미의 반감기가 질병의 감쇠기까지 지속된다면 동시에 해결책이 될 수 있다.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보들레르마저 전유하지 못했던 성병을 쥐고 흔들어보려 한다.[2] 성 매개성 질환은 양성을 막론하고 추악한 의미와 연관된다. 그것은 침실 위를 가로지르는 금지된 상상을 지껄이며 문란함, 방탕함, 추잡함, 불결함과 같은 도덕적, 위생적 타락을 표지한다. 그러나 성병이 여타의 질환과 마찬가지로 나노교환에 국한되지 않고 의미(또는 이미지)를 형성한다면 최후까지 단일한 상상에 매여 있기가 불가능한 법이다.

 

 

보균적인

 

  이별 직후엔 누구나 상대에게 영원히 기억되길 원한다. 아니, 기억을 넘어 각인되길 원한다. 그가 나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고, 때론 나로 인해 괴로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로 인해 바뀐 어떤 습관이 유지되기를 바라고, 그 안에 내 모습이 남아있기를 바란다. 미련은 이 야속한 소망들을 비할 데 없이 심화시킨다. 사랑했다면 응당 스쳐갔을 사고들은 성병을 통해 보상될 수 있다. 만약 상대방이 심적인 정리를 마친 상태라면 그의 기억 속에서 나는 설 자리를 잃는다. 하지만 인유두종 바이러스(HPV)나 매독과 같은 균주라면 이별과 무관하게 그의 신체 일부가 되어 살아갈 수 있다. 위의 추상적 바램들은 실제 이행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어렵고, 설령 추궁한다 해서 진실이 들려오리란 보장도 없다. 이런 불확실함과 달리 보균은 확률에 기대지 않는다. 그는 정기적인 검사가 있을 때마다 나를 떠올릴 것이다. 나는 균으로 말미암아 그의 기억 속에서 매번 되살아난다. 때로는 나(의 균으)로 인해 괴로워할 것이고, 그 안에 내 일부가 남아있을 것이다. 행동습관들이 연애 도중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변화되는 것과 달리, 보균은 연애 후의 행동습관을 변화시킨다. 그는 피임 도구에 더욱 민감해질 것이며, 어쩌면 그것이 그의 인생에서 더 나은 결과를 만들 것이다.

 

  사랑이 동등함에 관한 불가능한 열망이라면, 보균은 그것을 기꺼이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박테리아 수준에서 속류 유물론적 사랑을 완수한다. 정념적으론 불가능한 것을 기저에서 빠꼼히 해낸다는 점에서 속류적이라는 표현은 언제까지 비하적일 수만은 없다. 균은 육안으론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랑의 속성과 일치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련을 흠뻑 머금은 위의 사념들로부터 서서히 자유로워지듯, HPV 역시 대부분이 수년 내에 사멸한다. 회상의 퇴색이 쌍방에게 유효한 일이듯 그에게서 내 흔적을 차츰 지우고 싶다면 HPV가 대안이 될 수 있다. 만약 그가 파트타임 러버가 아니었다면 매독 옵션을 고려해볼 수 있다. 커플 타투의 생물학적 버전으로서의 보균.

 

  성 관계는 세 가지 층위에서 교환을 가능케 하는 매체로 활용된다. 추상적으론 교감을, 육체적으론 성애를 나누며, 생물학적으론 균을 나눈다. 낭만주의적인 사랑은 교감을 탐미하고, 현대적 사랑이 성애에 집중했다면, 이제 우리는 성병이 남녀관계에 합류하는 방식을 재고할 수 있다. 교감과 전염은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단 한 순간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가능하듯, 단 한 번의 관계로 전파가 가능하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원나잇으로 인한 성병의 감염도 불가사의한 변수에 의존하기에 우연적이다. 더욱이 이는 신체에 통일적으로 조직되길 거부하는 흐름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사랑이 분명히 내가 겪고 있는 것임에도 나를 초과하는 그 무엇으로서의 기후학적 마력을 갖는다면, 균 역시도 내 신체 안에 존재하면서도 나의 일부로 통합될 수 없는 대상으로 간주된다. 이때 신체와 균의 극명한 체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항은 건강과 질병이라는 추상적 대립 안에서 등가를 형성한다. 내 안에서 지독히 사소하나 나를 바꿔버리는 그 무엇.

 

  보균은 이별 이후보다 연애 도중에 더욱 강력한 구속력을 갖는다. 정기적인 성병검사는 상대방의 불륜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단으로 기능한다. 불륜의 리스크는 법적, 경제적, 신체적인 층위 등 다양하게 포진해 있다. 위자료의 청구, 그로 인한 경제적인 손실, 보균으로 인한 발각의 가능성 등은 귀책사유에 대한 경종을 울리며 불륜의 좌절인자로서의 효험을 드러낸다. 특히 보균은 단순한 처벌의 기제만이 아니라 탐지의 도구로도 활용된다. 상대방의 일탈을 감시할 방법은 많다. 그의 소지품을 훔쳐볼 수도 있고, 지출 내역을 살펴볼 수도 있다. 여차하면 그를 미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엔 알리바이가 간섭할 여지가 존재한다. 균의 경우는 다르다. 이전에 없던 균의 검출은 어느 한쪽이 결백하다면 불륜을 간파할 강력한 물적 표징으로 자리한다. 여기선 어떤 거짓말도 박멸된다. 면역학적으로 균은 위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부의 마이크로정조대가 될 수 있다.

 

 

단기적인

 

  임질이나 클라미디아 등의 몇 가지 성병은 짧은 잠복기를 거쳐 염증, 변형, 소양증 등의 증상을 나타낸다. 연애 중 증상의 표출은 이별로 직결될 수 있기에 위협적이다. 증상은 종말론의 형국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이미 와있으되 내 안에서 불쑥 솟아나는 것. 고름이 기만 속에서 유지되던 관계의 폭로자가 되어준다. 연애 중 드러난 성병이 밀고의 성격을 띠는 것과 달리 이별 직후에 나타나는 고름은 고지의 양상으로 흘러나온다. 동일한 균이라 하더라도 성차나 면역에 따라 증상이 유발되거나 잠복하기에, 감염의 지각은 비대칭적일 가능성이 높다. 이별 직후 다시 잘해볼 마음이 없는 상대에게 연락해야 할 신체적 케이스가 두 가지라면 하나는 성병, 다른 하나는 임신이다. 일반적으로 임신은 축복이고 성병은 저주이지만 이별 직후의 연인에겐 각자가 가진 의미가 뒤집힌다. 이때는 임신보다 성병의 타전이 차라리 축복이다. 오히려 이별에 확신마저 줄 수 있으니.

 

  마리아의 수태고지가 캔버스 안에서 재현되어 왔을 때, 그것은 성령으로 충만한 영광의 재현에 전적으로 충실했다. 로제티로 넘어오면 사정은 조금 달라진다. 이제 마리아의 재현은 한 소녀가 가지는 임신에 대한 공포와 수태고지를 대하는 순간의 당황과 두려움을 향한다. 이전까지의 수태고지가 가지는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하나, 성모의 신분적 우위를 드러내기 위해 화폭 안에서 천사보다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둘, 천사의 얼굴과 자세에선 복종이 표현된다. 셋, 마리아는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성모의 격에 걸맞은 담대함으로 고지를 받아들인다. 로제티의 회화에서 이와 같은 모든 특징은 전복된다. 하나, 성모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다 못해 침상 귀퉁이에 쪼그리고 있다. 이때 천사는 보다 캔버스 가까이 위치해 더욱 크게 그려지며, 마리아의 머리보다 훨씬 높이 위치한다. 둘, 천사의 얼굴은 윤곽만 그려져 그가 어떤 표정을 취하는 지 알 수 없으며, 이 모호함이 고지 자체의 혼란스러움을 배가시킨다. 셋, 마리아의 얼굴엔 그 어떤 결의도 없으며, 거기에 있는 건 당혹감에 찬 한 명의 소녀이다.

 

  그에 비하면 대략 일주일간의 약물로 치유될 수 있는 성병의 고지는 차라리 심플하다. 고름은 의학적 관점에서 병인을 표지하는 이로운 증상으로 이해된 지 오래다. 클라미디아의 경우 남성은 50%, 여성은 7-80%에 무증상에 그친다. 그러나 균을 치료하지 않을 경우 심하게는 불임으로까지 이어진다.[3] 따라서 고름은 그것에 병행하는 변형, 비롯되는 악취, 눈살 찌푸려지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반길 만한 현상이다. 이제 고름은 문화적 의미의 차원에서도 로제티의 관문을 통과한다. 마리아와 천사의 위상이 뒤집히듯, 고름과 태아의 위상이.

 

 

Dante Gabriel Rossetti, <the Annunciation>, 1850

 

장기적인

 

  재래식 사랑의 최고 관념은 평생을 사랑한 부부가 한 날 한 시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 사례는 여태까지 실없는 판타지로 취급되어왔지만 이제 우리는 성병을 말미암아 이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진실로 상대방과 한 날 한 시에 사망하길 원한다면 HIV 감염을 셈해볼 수 있다. 80년대 샌프란시스코 게이 커뮤니티를 강타하고 이윽고 혹독한 탄압을 낳게 했던 에이즈의 전구기 바이러스는 여전히 무분별하게 악용되며 게이-항문섹스-에이즈-죽음이라는 단순하지만 끈질긴 의미의 채찍을 휘두른다.[4] 여기서 우리는, 에이즈는 동성애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에이즈에 걸린 동성애자의 삶과 고통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감산의 형식을 취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차라리 에이즈에 대항의미를 산입해, 미국 바이블 벨트가 죄악시한 의미의 버클을 움켜잡고 무수히 많은 홀을 뚫어 정위를 흩어버릴 참이다. 그럴싸한 계획 하나. 에이즈를 사랑의 묘약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98%가 극복되었다고 알려진 에이즈가 완전히 정복된 미래를 예비하는 환영사다. 아마 그날에 우리는 HIV를 사랑의 순도를 증폭시킬 촉매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불가항력으로 맞게 되는 죽음과 선택적인 죽음의 무게는 완전히 다르다. 극복가능해진 에이즈는 다소 가벼워져 그것에 대한 얼마간의 농담을 허용하게 할 것이다. 에이즈가 갖는 죽음의 부피는 그만큼 줄어든다. 반대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순간의 (예수의 마지막 기도와도 같은)거룩함을 떠올려보면 에이즈는 비할 데 없이 무거워진다.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면 내겐 어떤 가치도 없다는 선언의 증명을 위해 성병을 촉매로 동원하는 것. 그와 같은 시도는 에이즈에 대한, 확고했던 의미들에 폭격을 가해 완연했던 중성대[5]를 해체시켜버린다. 아마 우리는 한 날 한 시에 죽기로 결심하면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HIV에서 에이즈로 이르는 병기의 조절을 통해. 그때 우리는 원하는 만큼 살고 원하는 대로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상대방과의 동시적 파괴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이제 사랑의 최고 단계는 에이즈라는, 숱한 추문과 박해를 낳았던 이 질병에 의해서 구현 가능한 모델로 다듬어진다. 험악하게 사랑하기. 허슬 충만한 채로 넘나드는 후회와 재확신. 수렁에 빠졌다가도 파멸적 구원에 이르는 사랑. 더 이상의 수사는 필요 없어. 이제 에이즈는 사랑의 교황이다.

 

 

용법적인

 

  서구의학을 둘러싼 담론체계 안에서 질병이 군사학적 용어로 점철된 것과 달리, 약물의 처방은 경제의 논리를 따른다. 일반적으로 약물은 사용에 따른 작용이득이 부작용의 급부를 넘어서는 경우에 사용한다. 그러나 이는 여전치 질병을 치료의 대상으로 놓고 있는 범주에 한한 이야기다. 부작용을 적극적으로 즐긴다는 발상은 전혀 예사롭지 않다. 우린 이미 평생에 걸쳐 알콜의 부작용을 즐긴다. 매한가지로 성병 역시 빗나간 각도에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성병의 연금술. 이를 위해선 각 질병의 증상과 메커니즘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자궁경부암의 주요 인자로서의 HPV, 매독이 야기하는 성기 경성하감과 이후 병기의 진행에 따른 신경계 손상과 더불어 태아에 미칠 요인, 에이즈 블로커로서의 복용 약물인 빅타비 등 질환들이 야기할 영구적 손상에서부터 드럭 칵테일에 이르기까지 신경 쓸 것이 많다.

 

  너무 겁낼 필요는 없다. 균은 이미 친숙한 대상이다. 의무교육 단계에서부터 버섯이 균을 옹호하는 바를 우린 학습했으며, 발효식품은 우리에게 균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심리적 장벽을 얼마간 허물었다. 직관적으로 해로운 것들의 이로움을 재인식하는 논리는 성서부터 현대과학에까지 도도한 지류들을 형성해 왔다. 성병도 이와 같은 강줄기를 따라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마이크로정조대, 기만적 연애의 처형인, 낭만주의 죽음과 사랑의 메시아. 아멘.

 


[1] 바로 이 ‘불구하고’가 물신성의 조건문이다.

 

[2] "뼛속까지 스며드는 매독처럼, 공화주의라는 정신이 우리 모두의 핏줄 속까지 스며들어 있다 ㅡ 우리는 민주화됐으며, 성병을 앓고 있는 셈이다." Baudelaire, "Sur la Belgique", 1876.

 

[3] 여담이지만 사회적 불임이 한창 촉진되고 있기에 이제 신체적 불임은 큰 리스크가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4] 임상의학적으로 에이즈의 정복은 2030년이면 완수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지만, 에이즈에 관한 전지구적인 사회문화적 편견은 언제가 되어야 극복할 수 있을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

 

[5] 건물화재가 발생하면 연소열에 의해 온도가 상승하여 부력에 의해 고온의 기체가 천정에 축적되고 기체가 팽창해 실내외의 압력이 달라진다. 그 사이의 실내외의 정압이 같아지는 경계면을 중성대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