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범 사이를 미끄러지는 변명들: 고요손 개인전 《섬세하게 쌓고 정성스레 부수는 6가지 방법》에 부쳐

  근래 부쩍 늘어난 식음료 브랜드와 미술의 협업을 보면 이는 정체된 동시대 미술에 있어 매우 쉽고 간편한 그리고 매력적인 대안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매체 이후를 상상하는 전략은 매체의 질적 완성 이후에 와야 할 터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양상은 손쉬운 도피로 그치는 탓이다. 이것은 낯선 영역에 대한 시도를, 확장이란 미명 하에 쉬이 긍정해버리는 미술 비평의 나태에 기인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섬세하게 쌓고 정성스레 부수는 6가지 방법》 전시 포스터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모더니즘 회화를 정초한 이후로, 이 땅에 완전하고도 새롭고도 완전한 미학 체계를 제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다양한 형식으로 발현되는 제도비판이나 참여적인 상상력들, 혹은 관계미학이란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네트워크 형성은 모더니스트들에게 있어서는 일련의 우회로 탐색뿐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린버그의 미학은 ‘a가 A라는 매체에 담길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형식으로 끊임없이 동시대 미술에 회귀한다.

 

  그러나 매체의 자기지시성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자답하는 모더니즘의 연옥에서도, 새로운 미술과 매체는 계속해서 등장한다. 새로운 매체를 미술로 수용하거나, 상이한 여러 매체를 접합하여 하나의 장르로 만들어내는 것은 이미 하나의 어법이 되어 있다. 이것은 현대 미술사의 가장 큰 흐름 중 하나이며, 동시에 가장 진척이 느린 분야이기도 하다. 뉴미디어가 나날이 만들어짐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매체적 필연성을 작업의 내러티브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흔치 않고, 쉽지 않다. 이는 이론적 차원에서도, 수행적 차원에서도 적합한 논리를 만들어내기가 어려운 탓이다.

 

  따라서, 그린버그의 자장 안에 있는 이러한 작업들은 보통 기존 매체에 대해 재고하여 변형/확장시키는 태도를 더욱 빈번히 보인다. 한국 동시대 미술의 조각 유행 속에서 주목받는 고요손의 작업 또한 이에 속할 것이다. 그는 2022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조각충동》 전시에서도 이러한 서사에 대한 관심을 보여왔다. 《조각충동》은 그 이름과 기획에서도 쉬이 유추 가능하듯이, 동시대 미술에서 조각(의 존재성)에 대해 질문하고 탐구하는 일련의 작업을 모은 전시였다. 이 전시에서 고요손은 무대화되어 있는 공간에 조각을 올리고, 그 무대 단상 위에서 조각과 함께하는 퍼포먼스를 기획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조각’이라는 매체가 갖는 존재의 터를 동작의 시간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조각에 대한 새로운 감각의 확장, 이것이 최근 고요손이 채택한 어법인 듯하다.

 

   그의 2번째 개인전 《섬세하게 쌓고 정성스레 부수는 6가지 방법》에서 시각적, 촉각적 상관물인 조각은 미각적 상관물이 되길 원하며, 구강 구조 내에서 감각되는 더욱 내밀한 촉각적 상관물이 되려는 시도 또한 동시에 진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울 내 여섯 곳의 디저트 가게와 협업하여 이른 바 ‘먹는 조각’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관람객-고객은 가게에 직접 찾아가서 하나의 조각-플레이트를 주문하고, 이 디저트가 서빙되면 직접 부수며 먹게 된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완성되는 조각은 기존 미술관의 조각과는 꽤나 큰 차이를 지닐 수밖에 없다. 고객 수에 맞춰 개별적으로 제작된 이 조각들은 식사라는 맥락에서 개인으로서의 관객에게 오롯이 독점적인 소유물이 된다. 관객은 이 조각을 파괴할 권리와 섭취할 권리, 그리고 그 결과로써 조각을 소화하게 되고, 이는 가장 1차원적인 의미에서 관객과 조각의 일체화일 수 있을 것이다. 미술(관)에 음식 자체가 작업으로 등장한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으나, 조각임을 강하게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음식으로 소비되었다는 것이 고요손 작업이 지닐 수 있는 고유한 위치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기획의 지지기반이 너무 미약한 탓에 설득력을 너무 쉽게 잃고 만다. 현대미술이 아이디어 싸움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타당할지 모르나, 대부분의 경우 발상의 허무맹랑함을 옹호하거나 조소하기 위해 채택되는 수사에 불과하다. 그렇지 아니하다면 동시대의 미술관은 계약서와 기획안으로 가득 찬 캐비닛으로 환원되어야 할 것이다. 미술관이 아직도 다양한 형태의, 시청각적으로 감상 가능한 작업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은 미술이 단순한 아이디어 이상이어야 함을 방증한다. 이 전시에서 ‘먹는 조각’ 작업들은 관객을 설득하기 전에 먼저 미끄러져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남은 관객은 당황스럽다.

 

 

사진 1-1, 1-2. <방법 3(어려운 진실)>

 

사진 2-1, 2-2. <방법 6(머물며 무너지는)>

 

  본질적으로, 이 전시에서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것은 작업의 퀄리티이다. 작품의 직접적인 제작 과정을 조수와 어시스턴트에게 넘기는 것은 현대미술만의 일도 아니고, 유구하게 있어 왔던 일이기에, 고요손이 여섯 가게와 협업하여 작업을 기획했다는 사실은 작업을 평가하는 데에 그 어떤 부정적 영향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협업한 가게를 명시하고 있으며, 이 작업이 오롯이 자기 몫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여섯 개 가게에서 제공되는 작품의 퀄리티가 너무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고, 어느 ‘먹는 조각’들은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요컨대, 카페 무너미에서 제공되는 <방법 3(어려운 진실)>(사진 1-1)과 수르기의 <방법 6(머물며 무너지는)>(사진 2-1)이 주는 감각의 차이는 너무나 극명하다.

 

  무너미에서의 작업 <방법 3>의 외형 그리고 그에 덧붙여진 문구 “조각의 단면, 골조, 광물, 어려운 진실” 등을 보았을 때, 본 작업은 부러진 조각의 단면 혹은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것들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며, 나아가서는 폐허에 버려진 기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치즈 케이크를 엄지손가락 두께로 썰고, 그를 세로로 세운 뒤 이것을 벽면으로 삼아 초콜렛 케익 파우더를 바른 기다랗고 구불구불한 튀김과자나 젤리 등을 박아 넣었다.(사진 1-2) 조형적으로는 설득력 있을지 모르나, 이 조각이 야기하는 미각적 자극은 그 시각적 외양을 감당하지 못한다. 단맛의 밸런스는 전혀 잡히지 않아 이 케익을 두 번 이상 입에 넣기는 힘들었으며, 식감의 분배 또한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것을 먹을 때 혀는 질척임과 딱딱함이라는 불쾌한 자극을 동시에 받아야만 했다. 이에 반해 수르기에서 제공되는 <방법 6>은 해당 가게가 그간 쌓아온 명성을 충분히 감당하는, 상당히 괜찮은 맛을 내었다. 흑임자 무스가 맛의 중심을 잡고 그 주변의 향을 초콜릿과 바닐라가 채우며, 튀일과 부드러운 케익이 식감을 한층 다양하게 잡아간다. 나뭇가지 모양 초콜릿이 바닐라 소스 위로 점차 녹아가는 모습은 시각적으로도 흥미롭다.(사진 2-2) 수르기의 경험은 디저트가 ‘먹는 조각’이 되었을 때 제공할 수 있는 경험을 충분히 제시한다고 보여지지만, 무너미에서 제공되었던 케익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더욱이 실망스러운 것은, <방법 3>의 처참함이 특정한 의도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량 부족에서 드러나는 작업 간의 퀄리티 격차는 먹는 조각 연작의 설득력을 현저히 떨어트린다.

 

  작가의 작업 퀄리티가 고르지 못하고, 개별 작업 간의 간극이 막대한 것은 분명 비판받을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 대해 혹자는 이 ‘먹는 조각’이라는 형식에 대해 식문화-음식 비평적인 접근과 해석이 옳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본 전시의 서문이라 할 수 있는 글에서는 “‘이것’은 ‘조각’입니다”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는 바 이를 미술비평적인 방법론으로 제한하여 접근하는 것이 옳다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먹는 조각’이라는 매체에 대해 음식비평적인 접근이 옳지 않다고 말하거나, 이것의 조각성을 강조하는 일은 옳은 반박이 될 수 없을뿐더러, 기이하다. 만약 이 ‘먹는 조각’들을 적극적으로 음식으로 대우하지 않겠다고 말하면 이 조각이 ‘먹을 수 있는’ 형태를 띤다는 것에 대한 필연성을 잃는다. 세상 모든 조각은 사실 ‘먹을 수 있는’ 조각이기 때문이다. 콘크리트든 석고든, 레진이든 무엇으로 만들어졌든 간에 맛이 없고, 소화하기 힘들 뿐이지 만약 사람이 이를 먹고자 하면 얼마든지 ‘먹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1] 그러나 보통의 작가와 관객은 이를 먹으려 하지 않을 뿐이다. 따라서, ‘먹는 조각’의 ‘가식성ediblity’이 유의미할 정도로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작업이 조각성과 함께, 단순한 가식성을 넘어서는, 음식으로써 미식적 경험을 제공해야 했을 것이다. 세상 대부분의 조각은 원래부터 그저 ‘맛없는’ 조각이었기 때문이다.[2] 예컨대, 먹을 수 있는 그리고 먹고 싶은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 조각들은 먹는 조각이라고 불릴 이유가 없다. 지난 광주비엔날레에 전시되었던, 바지날 데이비스(Varginal Davis)가 빵으로 만든 <부정한 마리아>는 먹을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테이블이 아닌 벽에 걸리며, 누구도 이 작업을 미각에 대한 확장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은 이에 기인한다.

 

  <방법 3>이 조각의 외적 모습에서 드러나는 ‘폐허’를 입 안에도 미각적으로 재현하려는 시도였다고 한다면, 이것이 ‘디저트’라는 형식을 가질 이유는 없는 것이다. 가식의 범위에 아스라이 걸쳐 있는 목재와 건축 자재 등을 얼기설기 역어 제공했다면 충분했을 것이다. 디저트라는 형식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맛이 처참한 수준이었다는 것은 작업 간의 퀄리티 차이와 더불어 이 ‘먹는 조각’이라는 아이디어에도 큰 흠결을 내는 셈이다.

 

 

사진 3, <방법 4 (툭!)>

 

  퀄리티의 문제는 토오베에서 제공된 판나코타 작업 <방법 4 (툭!)>에서도 두드러졌다. 판나코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풍미가 약했으나, 그것보다도, 견과류의 풍미를 미숫가루처럼 보이는 견과 분말로 형성하였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액체에 녹지 않는 가루로 맛을 내는 것은 식감과 풍미를 모두 방해하기에 가장 최후에 사용되어야 하는, 가장 최악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빈 접시와 뚜껑 닫힌 작은 컵이 하나의 트레이 위에 올려진 채로 나오고, 고객/관객은 컵을 뒤집어 시럽과 함께 판나코타를 꺼내게 된다. (사진 3) 이때 판매되는 제품마다 다른 형상, 다른 소리로 푸딩이 부서질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며, 이는 흥미로운 발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 풍미 없는 판나코타와 입에 겉도는 가루의 텁텁함은 홍시 시럽의 들척지근한 탄닌과 만나 더욱 강해진다. 만약 이 ‘먹는 조각’이 디저트로의 존재성도 담보하고자 했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조합인 셈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것’은 ‘조각’”이기에 미식 판단을 거부한다면, 이것은 스스로 정당성을 유기하는 변명뿐이 되지 못한다. 못 그린 것을 추상화라 변명하지 않고, 못 만든 것을 그로테스크라 부르지 않는 것이 미술(사)의 윤리임을 기억할 때, 확장된 감각의 체험을 제시하는 작업의 미각적 수준 낮음은 조각이라는 변명으로 무화되지 않을 것이다. 질적 차이와 도드라지는 미각적 불쾌함은 ‘섬광’과 ‘원형들’을 방문하지 않게 만든 가장 큰 이유 주에 하나이기도 했다. 이 가게들에서 제공될 조각들의 맛은 너무 자명하게 예상되는 탓이다. 이러한 차원에서도 해당 조각들의 가식성은 단순한 장식적인 것들이 되어버리고 만다. 명백한 질적 차이를 모른 척하면서 복수의 작업을 하나의 궤로 묶어 ‘좋다’고 표현한다면, 이는 작업을 면밀히 감각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아질 터이다.

 

  개별 작업 간의 퀄리티 격차와 도드라지는 맛없음이 이 전시의 설득력을 떨어트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본 전시의 발문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발문에서는 먹는 조각을 구성하는 재료와 관객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물질 단위에서 예전부터 마주쳐 왔고, 이후에도 다시 마주칠 것이라는, 물리학적으로 자명한 사실을 주지한다. 나아가서 그 글은 관객-고객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당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때의 ‘정당함’이 무엇인지는 작업의 맛없음 앞에서 쉬이 이해되지 않는다. 돈이 오갔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한다면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삼라만상은 모두 정당해질 것이다. 제발 이러한 정당함이 아니길 빌며 새로운 ‘정당성’이 무엇인지 탐색해 볼 때, 이 전시가 전제하는 정당성의 근원은 미술 혹은 미식에 있을 것임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이때 구매절차를 통해 얻은 정당성이 미술작품에 대한 소유권한이라고 본다면, 이 전시의 맥락은 너무 얄팍해진다. 구매된 모든 작업은, '정당하게' 걸리거나 시연되고, 혹은 (대부분은 그리 하지 않겠지만) 버려지거나 파괴될 수 있는 탓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당신”이 “소유하였”다는 것은 너무 맞는 말이라 오히려 그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따라서, 이 전시를 더욱 실험적인 미술로 이해하기 위해 이 정당성을 디저트로써의 ‘먹는’ 조각에 있는 것이라 보려 한다. 음식을 사서 먹을 때 사람이 정당하다고 느낄 때는 무엇보다, 주문한 음식의 맛이 예상과 일치하거나 상회하고, 충분히 만족감을 줄 때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음식의 가격과 무조건적으로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본 전시의 작업들에서는 이러한 차원에서의 ‘정당함’은 찾기 어려웠다.[3] 게다가 협업 가게마다의 현저한 퀄리티 차이에도 불구하고 작업의 가격들이 비슷했다는 점은 이 ‘정당함’을 더욱 의뭉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의문들에도 불구하고 발문이 먼저 이 경험들이 ‘정당하다’고 선언함으로써 관객은 난처해진다. 관객-고객이 조각을 먹고 맛없음을 느껴 이것이 정당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을 때, 이미 선언된 정당성은 이 작업들의 전략을 혼탁하게 하여 판단 준거를 없애버린다. 이 작업들이 지불한 대가에 비해 맛이 없어 부당하다고 생각할 때 이 작업은 ‘음식이 아니라 조각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하다’는 식의 수사를 형성하여 판단의 잣대를 비켜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완전한 변명이다.

 

  이 전시가 만들어내는 불편함은 이러한 변명들에 있다. 조각의 범주를 미각적 차원까지 확장시키려는 시도가 설득력 있기 위해서는 이 작업들이 조각인 동시에 디저트임을 미술적/미식적 차원에서 높은 완성도를 갖춰서 보여야 했을 터이다. 그러나 고요손의 작업들은, 미술사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려 하면 발생하는 고루함을 음식이라는 변명을 통해 피해가고, 미식적 차원에서 작업의 퀄리티를 평가하려 하면 이러한 판단을 미술-조각이라는 변명으로 도망친다. 이러한 변명과 회피들 앞에서 관객은 무력해진다.

 

  고요손은 이 전시에서 먹는 조각을 통해 기존의 조각 규범을 벗어나려고 하지만, 미각적 처참함이 고개를 들 때에는 다시 이것이 조각임을 강조하며 기존 미술사의 자장 속에 숨으려 한다. 미식 판단을 제하고 이를 조각적으로 판단하려 하면 그의 조각들은 다시 기존의 조각성의 외연과 그리 크게 구분되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때 다시 이 조각들은 가식성을 빌미로 “오래도록 범접할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 시도로 포장한다. 그러나 미각적 경험의 불쾌함은 기존 조각과 먹는 조각을 유의미하게 벼려내어 주지 않는다. 이렇게 이해하면 발문의 “‘이것’과 당신이 만난 건 분명 처음은 아닙니다”라는 문구는 이것이 기존 조각과 다를 바가 없다고 강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조각 기획을 유의미한 시도로 만드는 미각으로의 확장은 작업 속에서 그 컨셉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변명의 수단으로만 잔류하는 것이다. 이 조각을 왜 먹어야 하는가?

 


[1] 이는 조각뿐 아니라 그림에도 적용된다. 살면서 종이를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이들은 오히려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모두 아무 탈 없이 잘 살고 있다. 종이에 올라간 그림 또한 ‘먹을 수 있는’ 매체이긴 하다.

 

[2] 이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가식성은 절대적 기준에 의해 분류되지 않는다. 석회는 대부분의 대륙의 식수에 포함되어 있고, 철분이 부족하면 사람은 쓰러진다. 기존의 조각들은 충분히 맛이 있지 않을 뿐이지, 먹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다.

 

[3] 미술 작가와의 협업 하에 만들어진 작업이라고 하여도, 무너미와 토오베에서 제공된 작업들의 가격이 일만 원이 넘는다는 것은 2022년의 다른 유수의 디저트 가게 제품들의 가격을 고려할 때 쉬이 납득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