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왕은 누가 쓰러뜨렸을까?: 비디오 게임에서의 플레이어와 루두스 장치

  <드래곤 퀘스트 11>의 한 전투는 이렇게 진행된다. 주인공 ‘용사’는 6개의 오브를 모아 용사의 검을 부활시킨다. 이때 그들의 뒤를 추격해온 마왕 우르노가의 부하 호메로스가 용사 일행을 습격한다. 이어지는 전투 시퀀스에서 호메로스는 ‘어둠의 오라’를 두르고 무적 상태가 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호메로스를 결코 쓰러뜨릴 수 없다. 이러한 게임 문법에 익숙한 플레이어 대부분은 그냥 패배를 하나의 서사로 받아들이고 전개를 즐기기 시작한다. 이때 플레이어들은 이 상황을 자신의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결과가 규정된, 결코 뒤집을 수 없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드래곤 퀘스트 11>의 한 장면.

 

  이는 비디오게임의 성격으로 거론되는 ‘일체화의 신화’와 위배되는 성질이다. 많은 이들이 비디오게임의 참여적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비디오게임에서의 일체적 경험에 대해 말한다. 말하자면 비디오게임에서는 ‘플레이어인 내가’ 마왕을 쓰러뜨렸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사에는 비디오게임에서의 두 주체(플레이어와 캐릭터)가 일종의 동일시된 경험을 한다는 전제가 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때에 따라서는 이 두 주체는 동일한 경험에 대해 완전히 다른 발화가 가능하다. 호메로스의 공격에 쓰러진 용사와 동료들에게 있어, 이는 충격과 굴욕의 패배일 것이다. 하지만 플레이어에게 이 패배는 단순한 스크립트의 결과일 뿐, 전략적/행위적 패배로 인지되지 않는다.

 

  발화의 어긋남은 두 주체가 가진 수행성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때로 상황의 동일시가 발생해 일시적 공명이 발생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양자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다. 박근서는 <게임하기>(박근서, 커뮤니케이션북스, 2009)에서 이런 구분을 ‘몰입’으로 정리하는데, 그는 몰입이 ‘특정한 서사적 위치에 자신의 정체성을 일치시키는 것(이입)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행위에 집중하는 과정’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두 주체의 거리감은 내러티브 비디오게임에서 언제나 뒤따라오는, 게임의 디제시스가 게임 플레이와 완전히 융합하지 못한다는 문제(소위 말하는 ‘루도내러티브 부조화ludonarrative dissoance’)와 연결된다. 이 문제에 어떻게든 화답하기 위해서는 일단 게임 플레이에서 플레이어와 캐릭터라는 두 주체의 간격에 대해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두 주체는 개념적으로 어떠한 거리감을 지닌 것인가?

 

시뮬레이션과 원본

 

  많은 비디오게임 이론가들은 비디오게임이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예스퍼 율Jesper Juule은 ‘레이싱 게임은 자동차 경주게임의 시뮬레이션이다. <피파 2002>는 축구 경기의 시뮬레이션이다.’(<하프 리얼>, 예스퍼 율, 비즈앤비즈, 2014)라고 정확히 정의한다. 하지만 이러한 발언들에서 개념적으로 고려해봐야 하는 요소들이 있다. 레이싱 게임이 ‘실제’ 자동차 경주를 목표로 하는 정확한 시뮬레이션인가?

 

 

<피파 23>의 한 장면.

 

  율이 예시로 말한 스포츠 게임 시리즈 <피파>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이 게임의 구조는 실제의 축구를 시뮬레이션한다고 말하기 모호한 구석이 있다. 물론 <피파>는 일견에 실제의 축구와 유사한 시청각적 감각을 제공한다. 문제는 플레이어가 수행하는 방식에 있다. 플레이어는 결코 ‘축구 경기를 수행하는’ 선수와 동일시될 수 없다. 모든 플레이어는 TV 방영과 유사한 버드아이뷰 시점에서 경기를 진행하게 된다. 또한 모든 플레이어는 자신의 팀 선수 전원을 조작한다. 공의 위치,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반자동으로 조작 대상이 되는 선수가 변경된다. <피파>는 ‘축구를 한다’라는 행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이질적인 감각을 준다. 그렇다면 이것은 감독에 대한 시뮬레이션인가? 선수를 ‘직접’ 움직인다는 점에서 이는 어떠한 지휘자의 감각도 아니다. <피파>를 비롯한 대다수의 축구게임이 가지는 체험적 재현 형태는 원본이라 주장되는 실제 축구와 결코 유사하지 않다. 이것은 축구를 기반으로 하는, 실재하지 않는 ‘괴상한 무언가’의 시뮬레이션이다. 율은 이 현상을 단순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말하자면 시뮬레이션은 원본을 ‘완전히’ 재현할 수 없으므로 일정량 단순화를 거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실제 축구 경기와 <피파> 간의 이 상이함을 단순화라는 개념으로 모두 정리할 수 있을까? 애초에 <피파>의 목적은 축구 경기에 대한 시뮬레이션 적 재현을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축구 경기를 기반으로 한 하나의 ‘재미있는 구조ludic structure’를 만드는 것일까? 후자가 목표라고 한다면, 이 현상은 (시뮬레이션을 위한) 단순화라기보다, (재미 구조를 위한) 변형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재차 율의 아이디어를 이용해 이 구조를 설명할 수 있다. 율은 비디오게임에서 발생하는 매체 간 이동을 실행과 각색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눈다.

 

  “실제 카드 게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이 컴퓨터를 이용한 카드 게임에서 완벽하게 재현될 수 있기 때문에, 컴퓨터를 이용한 카드 게임은 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컴퓨터를 이용한 스포츠 게임은 실행이 아니라 각색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컴퓨터를 이용한 스포츠 게임은 실제 세계를 너무 단순화하기 때문에 스포츠 게임의 세부 사항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앞의 책)

 

  이 서술은 매체 간 이동 양상에 대한 것이지 비디오게임에만 적용되는 성질에 관한 서술은 아니다. 말하자면 실행의 원본이 되는 카드 게임에도 유효한 개념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는 매우 모호한 진술이 된다. 실행의 원본이 되는 카드 게임 역시 어떠한 대상물의 각색일 수 있기 때문이다.

 

 

<카탄의 정복자>. 비디오게임 판.

 

  유명한 테이블 보드게임인 <카탄의 정복자>를 생각해보자. 비디오게임판 <카탄의 정복자>는 원본인 보드게임의 규칙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기 때문에 실행에 해당한다. 하지만 보드게임 <카탄의 정복자>는 개척행위와 상거래라는 실제 행위를 원본으로 삼는 각색물이다. 그렇다면 비디오게임판 <카탄의 정복자>와 개척행위/상거래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혹은 카드 게임인 <마블 스냅>의 경우를 살펴보자. <카탄의 정복자>와는 달리, <마블 스냅>은 원본이 되는 보드게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마블 스냅>의 몇몇 기능들이 컴퓨터 연산을 통해서만 실현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블 스냅>은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보드게임을 원작으로 삼고 있으며, 이 가상의 보드게임 역시 마블 코믹스 캐릭터들 간에 발생한 소규모 전투를 원작으로 한 각색물일 것이다. 다시금 <마블 스냅>과 가상의 전투 간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비디오게임이 규칙을 가져야 하는 한, 컴퓨터에서 재현되는 시뮬레이션은 가상으로 구성된 게임 규칙에 대한 ‘실행’이 될 수밖에 없다. 게임 규칙이 (<마블 스냅>의 경우처럼) 실행을 위해 컴퓨터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 규칙 자체는 컴퓨터라는 기계에 종속된 것은 아니다. 게임 규칙은 원본이라는 대상물을 기반으로 해석되어 나온 개념적 각색물이다. 비디오게임은 이것을 기계적으로 실현하는 시뮬레이션이다. 비디오게임은 시뮬레이션이지만, ‘현실의 대상’과 일차적으로 대응하는 시뮬레이션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비디오게임과 현실의 대상은 게임 규칙이라는 통로를 통해 이차적으로 매개한다.

 

  곤살로 프리스카Gonzalo Frsca 역시 자신의 책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게임>(곤살로 프리스카, 커뮤니케이션북스, 2008)에서 비디오게임 전체를 시뮬레이션으로 규정한다. 프리스카는 에스핀 아세스Espen Aaseth의 ‘에르고딕 텍스트Ergodic Text’ 개념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시뮬레이션 이론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뒤, 시뮬레이션의 형성 구조를 비디오게임 구조에 덧씌운다. 프리스카의 텍스트에서 눈여겨볼 내용은 그가 비디오게임이 ‘현실의 지시대상을 갖지 않은’, ‘존재하지 않거나 심지어 우리 세계의 물리학 법칙들과 배치되는’ 대상들에 대한 시뮬레이션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그는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기호삼각형을 시뮬레이션의 성립 개념으로 이용한다. 시뮬레이션은 ‘대상object’에 대한 ‘해석소interpretant’를 거친 ‘재현체representamen’이라는 것이다. 또한 프리스카는 이 모델에서 ‘해석체interpretamen’이라는 개념을 끼워 넣는다. 해석소가 대상에 대해 해석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면, 해석체는 재현체에 대해 가지는 생각을 말한다. 이 모델에서 시뮬레이션은 해석자가 대상을 해석소로 한번 해석해낸 뒤, 최종결과물일 수 있는 재현체에 입각해 해석소를 구체화한다. 이때 탄생하는 것이 바로 해석체가 된다.

 

  말하자면 프리스카가 말하는 ‘해석체’가 어디에 위치하는가의 문제다. 해석체를 시뮬레이션의 과정 내부에 둔다면 시뮬레이션의 원본은 현실에 있는 대상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게임이 언제나 원본과 멀어지는 시뮬레이션이라는 사실로 귀결되어 버린다. 율은 본질적으로 완벽한 재현이 불가능하므로 단순화를 거치게 된다고 말하지만, 앞서 말했듯 게임의 변형이 ‘별수 없는 단순화’라기 보다는 ‘재미 구조를 위한 변화’로 읽힐 수 있으므로 재고의 여지가 존재한다. 도리어 비디오게임은 현실로부터 일정량 추출, 정리, 변화시킨 특정한 ‘재미 구조’를 원본 삼아 시뮬레이션한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이는 단순히 비디오게임의 매개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개별적 비디오게임이 무엇을 지향하느냐의 문제로 치환할 수 있다. 결국 현실 재현의 한계를 통해 단순화하는 것을 비디오게임으로 규정한다면 개별적 비디오게임은 언제나 실패하거나 혹은 비틀린 시뮬레이션으로 읽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시티>를 시장(市長)의 입장에서 도시 경영을 시뮬레이션하는 게임으로 규정하면 결국 <심시티>는 엉뚱한 재현일 뿐이다. 어떤 면에서 <심시티>는 시장의 행위, 실제 도시의 경영에 대한 시뮬레이션으로는 도저히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도시 경영이라는 현실 전반에서 재미 구조로 재구축한 대상물에 대한 시뮬레이션으로 이해할 때 더욱 확실하게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비디오게임은 무엇을 원본으로 하는가? 그것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로부터 선별되고 편집된 그 무엇인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원본은 애초부터 세계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저 구현의 과정에서 세계의 것들을 해석함으로 설정된다. 비디오게임의 그러한 규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원본으로 삼아 출발하는 시뮬레이션이다.

 

루두스 장치

 

  하지만 비디오게임의 재현 방식은 그저 재미구조를 연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비디오게임은 재미구조를 기반으로 그래픽, 사운드, UI/UX, 플레이어 피드백, 촉각 장치 등 더 다양한 구성물들을 통해서 구축된다. 현실로부터 구축된 재미구조가 비디오게임의 원본이라고 말하더라도, 결국 시뮬레이션은 더욱 다양한 요소들의 복합적 구축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비디오게임은 원본을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감각을 통해 우회 전달하는 시뮬레이션이며, 플레이어는 시뮬레이션이 제공하는 요소들과 접촉하며 원본을 상상하게 된다. 그래서 원본이 되는 재미구조를 구체적이고 정형화된 무언가로 규정하는 것 또한 오류이다. 이것이 감각적 총체로 해석될 수 있는 한, 비디오게임의 원본은 명백히 규정되지 않는 부정형의 무언가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제작자에 의해 현실로부터 추출되긴 했으나 최종적으로 플레이어의 감각에 의해 개별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또한 사후적이다.

 

 

<하우스 플리퍼>의 태블릿형 UI(좌)와 노트북형 UI(우).

 

  예를 들어 집의 인테리어를 실행하는 <하우스 플리퍼>의 경우 인테리어에 사용되는 도구들, 인테리어의 부속품들, 그것들의 가격, 그것들의 성능, 의뢰를 받고 해결하는 방법, 집을 사고 되파는 방법 등이 구체화되어 플레이어의 경험으로 작동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플레이어가 다루는 개별적 가옥의 구조들, 인테리어 아이템들의 형태, BGM 혹은 사운드 효과, 개별적 행위를 발생시키는 UI의 형식(<하우스 플리퍼>는 대부분 가상의 노트북 혹은 태블릿 화면을 띄우는 방식으로 UI를 구성시킨다.) 같은 요소들이 더해져 <하우스 플리퍼>라는 게임에 대한 경험의 총체를 이룬다. 이 게임을 그저 ‘인테리어 시뮬레이션’이라고 선험적으로 일축할 수도 있겠으나, 현실의 인테리어라는 현상으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추출해왔는가는 경험의 결과로만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만큼 비디오게임은 부정형의 원본을 다종의 감각을 통해 전달하는 구조화된 시뮬레이션 장치다. 이때 이것이 재미구조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 장치를 루두스 장치ludic machine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율이 주장한 상태 기계state machine와 유사하게 들릴 수 있지만, 상태 기계는 시뮬레이션이 재현하고 있는 ‘상태’들만을 포함하는 데에 반해 루두스 장치는 재미 구조를 지향하는 모든 재현들을 통합한다는 점에서 상이하게 규정할 수 있다.

 

내러티브의 원본성과 루두스 장치

 

  그렇다면 내러티브 비디오게임에서의 내러티브와 루두스 장치는 또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을까? 내러티브 역시 비디오게임이 가지는 비정형의 원본에 위치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 비디오게임의 내러티브는 언제나 사후적으로 생성되기 때문이다. 단, 소위 ‘이야기를 만드는’ 같은 레토릭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러티브의 원본성을 전제한다는 것은 그것이 설령 부정확한 형태라고 하더라도 게임 플레이 ‘이전에도’ 존재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구성적으로 만들어간다는 ‘스토리텔링’의 환상은 이 관점에서 결코 동의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비디오게임의 서사란 어쩌면 수복의 과정으로 제시되는 것일 수 있다. 이는 부정형의 원본을 게임 플레이 경험을 통해 서서히 구체화해나간다는 관점에서 적합한 표현이다. 스파이크 춘 소프트의 사운드 노벨 시리즈에 속하는 두 작품 <거리: 운명의 교차점>과 <428: 봉쇄된 시부야에서>가 이러한 관점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예시가 된다.

 

 

<428: 봉쇄된 시부야에서>(좌)와 <거리: 운명의 교차점>(우) 의 재핑 장면.

 

  이 두 게임의 구성, 진행 방식 등은 일본의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인 ‘노벨 게임’의 전형이다. 화면 전체에 텍스트로 서사가 진행되며 서사의 일정한 단계에 도달하면 캐릭터의 행동을 결정하는 선택 지문이 등장하고,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이후의 전개가 달라진다. 그런데 이 두 게임은 결코 게임 오버를 피할 수 없는 전개가 발생한다. 앞선 선택지를 아무리 바꿔도 이 결과를 뒤집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때 이 게임들은 재핑zapping이라는 시스템을 해설해 준다. 게임에는 여러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사실 한 캐릭터의 선택이 다른 캐릭터에게 영향을 주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한 인물의 이야기가 어디선가 정지될 때, 다른 캐릭터의 이야기와 선택을 통해 해당 문제의 활로를 열어줄 수 있다. 결국 이 두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해야 하는 일은 모든 캐릭터가 게임 오버를 겪지 않는 길, 즉 ‘완전한 서사’를 구축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 두 게임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경험하기에 앞서 ‘모두가 행복해지는’ 완전한 상을 미리 제시하고 있다. 이 게임들의 플레이란 정확히 ‘수복하는 일’이다.

 

  물론 이러한 구조는 이 두 게임의 특별한 루두스 장치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여타의 내러티브 비디오게임들 역시 이런 구조를 열어서 보여주지 않을 뿐, 결과적으로는 일정량 시작과 끝이 정해진 서사를 수복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단 이 내부에서 발생하는 어떠한 가변성에 따라서 최종적 서사의 형태가 일부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유동적이며, 플레이어 경험에 따라 형상이 일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불균질하다는 것뿐이다. 결국 이 변화무쌍한 부분의 틈새를 메워주는 것이 내러티브 게임에서 루두스 장치가 담당하고 있는 역할이다.

 

  박상우 역시 비디오게임의 내러티브를 이와 유사한 구조로 본다. 그는 게임의 내러티브를 ‘현시적 내러티브expressive narrative’와 ‘구조적 내러티브structure narrative’로 나눈다. 현시적 내러티브는 이미 게임에서 규정해 정형화된 서사의 부분을, 구조적 내러티브는 게임 플레이라는 경험을 통해 습득하는 서사의 부분을 말한다. 그는 현시적 내러티브는 강렬하지만 일견 부재의 공간이 있으며, 플레이어는 구조적 내러티브를 통해 그 부분을 메꾸어나간다는 이론을 펼친다. 이를 현재의 글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현시적 내러티브는 비디오게임 내러티브의 부정형한 원본에, 구조적 내러티브는 루두스 장치를 통해 수복해나가는 사후적 양태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자발적 편집자로서의 플레이어

 

  이를 통해 루도내러티브 부조화에 대해서도 해설해보자. 또다시 <드래곤 퀘스트 11>의 한 장면을 예시로 들 필요가 있다. 세계 북부에 있는 클레이모란 성에 도착한 용사 일행은 주민 대다수가 황금상(像)으로 변해버린 모습을 본다. 그들은 성에서 동료 중 한 명인 ‘카뮈’와 면식이 있는 한 사제를 만나고 그와 함께 성 밖으로 나가 잠시 대화를 나눈다. 이때 마왕의 부하들이 클레이모란 성에 침공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용사 일행은 급하게 클레이모란 성으로 향한다. 적들의 공세는 전형적인 컷씬cut-scene의 형태로 출력이 되며, 성까지의 이동은 플레이어가 직접 조작해야 한다. 하지만 성에 도착하는 즉시 전투 시퀀스가 발생할 것을 고려해서인지, 이벤트가 발생하는 장소와 플레이어의 위치 사이에는 캐릭터를 회복시키는 스폿인 캠프 장소가 존재한다. 문제는 본 게임에서 캠프에서의 휴식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소한 일정량의 시간을 보내야 하며, 선택에 따라서는 하루를 내리 쉬어도 무방하다. 원한다면 (결과적으로는 무의미하겠지만) 여기서 며칠이고 쉰다는 커맨드를 선택해도 된다. 어차피 이곳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든 성의 침공에는 제때 도착하게 된다. 사실 스크립트는 용사 일행이 정문에 도착해야만 작동하도록 짜여있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그곳에 도달하지 않는 한 이 침공 행위는 정지되어 있다.

 

 

<드래곤 퀘스트 11>의 클레이모란 성 앞의 한 장면.

 

  이는 전형적인 루도내러티브 부조화의 사례다. 긴급히 다뤄야 할 사건이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끝도 없이 미루어져 그 긴장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임을 플레이한 후, 플레이어들은 이 장면을 그런 맥없는 장면으로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 장면은 ‘긴급하게 뛰어 들어간’ 장면으로 재편되고, <드래곤 퀘스트 11>의 서사에 (침공을 눈앞에 두고 캠핑존에서 며칠이고 놀고 자고 시간을 때운) ‘괴상한 장면’은 없었던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 일탈적 행위를 했다는 사실이야 기억하고 그게 꽤 유머러스했다는 추억을 남기기야 하겠지만, 고작 하나의 해프닝으로 남을 뿐 <드래곤 퀘스트 11>이 가져다준 서사의 응집에 포함하지 않는다.

 

  게임의 서사가 플레이어가 체험한 모든 것을 포함하는 구조라면 이런 사건들은 계속 흠결로 작동할 것이다. 소위 뛰어난 서사 구조를 가졌다 평가되는 게임들에도 이런 사례들은 왕왕 발생한다. 그저 사후에 최종적 서사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 쉽게 제거될 뿐이다. 이런 부조화를 서사성의 내부로 포함하지 않겠다고 모든 플레이어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는 내러티브 비디오게임에 있어 플레이어가 무엇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꽤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플레이어는 루두스 장치를 통해 받아들인 요소들로 게임의 원본을 구체화하는 활동을 반복하며, 서사 역시 이런 구조에 포함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원본의 서사를 재구축하는 과정에서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요소들을 자발적으로 ‘편집한다.’ 숨겨진 아이템 찾기, 지도를 100%로 클리어하기, 도감 채우기, 한 곳에 캠핑하며 레벨을 올리기, 새로운 포켓몬 포획하기, 긴급한 상황에 일시 정지하여 정비하기… 이런 행위와 시간은 전형적인 삭제의 대상이다. 결국 내러티브 비디오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게임 진행자임과 동시에 자발적 편집자의 자리에 들어선다. 룬 클레비어Rune Klevjer는 “<GTA III>에서 (...) 이탈리아 조직의 보스가 이다음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만약 제대로 해결된다면 어떻게 신뢰를 줄 수 있을지 말해줄 때, 다가올 이벤트는 <좋은 친구들>과 <밀러즈 크로싱>의 일반적인 세계 안에 놓이게 된다.”(<In Defense of Cutscenes>, 2002)고 서술하며 비디오게임 내러티브의 사후적 편집에 대한 가능성을 내비친다. 이때 그는 플레이어들이 게임 내부의 컷씬들과 타 매체의 장르적 서사 구조를 상호참조함으로 서사를 개념적으로 완성한다는 이론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언제나 논쟁의 도마 위에 올라와 있는 ‘컷씬’ 역시 루두스 장치의 일환으로 쉽게 이해된다. 컷씬은 플레이어가 비디오게임의 서사를 편집하기 위한 기준으로 제시되는 셈이다. 무엇을 어떻게 선별하고 제거할 것인가, 어떤 경험들이 서사적으로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가. 게임의 제작자가 미리 결정해서 알려주는 서사의 편린인 컷씬은 플레이어 수행에 유효하게 작동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컷씬은 게임의 루두스 장치에 충분히 편입될 수 있는 성질을 가진다. 따라서 루도내러티브 부조화의 문제는 재정의할 수 있다. 이는 루두스와 내러티브라는 이원화된 문제라기보다는 루두스 장치 요소 간의 부조화라고 봐도 무방하다. 재미 구조라는 원본 표출을 수행함에 있어 상호 간의 오작동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탐험과 전투라는 전형적인 성장 체계를 가진 게임에서 가장 주요한 국면들을 낚시로 처리해야 한다면 어떨까? 물론 성장의 요소들이 낚시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는 비디오게임이 원형을 올바르게 구체화하지 못한 사례이며, 그 결과가 루두스 장치에 투영된 결과가 된다. 내러티브 역시 루두스 장치의 내부로 편입함을 전제한다면, 이 부조화는 그저 루두스 간 부조화interludic dissonance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마왕은 누가 쓰러뜨렸을까?

 

  다시금 시작부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내러티브 비디오게임에서 게임 캐릭터와 플레이어 간에는 개념적으로 어떤 거리감이 존재하는가? 결국 비디오게임 내부에서 디제시스 요소들 모두가 내러티브 원본 내부에 편입된다면, 캐릭터 또한 사후적인 하나의 상image으로 완성된다. 이는 박근태가 ‘이입이 아닌 몰입’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동질화와는 무관한 형태의 양립이 된다. 그러므로 플레이어는 행위자라기보다는 명령자에 가깝다. 설령 플레이어의 입력에 대해 즉발적 행동이 발생하는 게임이라 할지라도 양자 간에는 (박상우가 ‘지연된 표상’이라고 정리한) 개념적 거리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캐릭터가 검을 휘두른다는 원본성을 확인하기 위한 명령어의 입력일 뿐이다. 디지털 기술에 의해 그 피드백의 속도와 행위가 아무리 좁혀진다 해도, 플레이어는 원본의 그 존재가 완전히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명령자의 위치에만 남을 수 있다. 따라서 결국 내러티브 비디오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의 위치는 타 매체의 독자/관객들보다 특권적이지 않다. 물론 비디오게임의 공간은 여전히 주체적인 활동의 공간으로서 특별하다. 하지만 동질화, 이입, 공동 달성의 수사로 대변되는 완벽한 일체화와는 역시나 거리가 멀다. 플레이어는 철저히 자신의 물리적 위치에서 캐릭터의 활동을 ‘지켜보며’ 그를 사후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거리를 둔다. 따라서 플레이어 수행은 스타니슬랍스키 적이기보다는 브레히트적인 활동이 된다.

 

  다르샤나 자이만Darshana Jayemanne은 비디오게임의 플레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게임에서 미메시스는 단순히 그래픽 ‘리얼리즘’을 통해 경험의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놀이를 통해 이질적인 구조에 적응하는 과정이다.”(<Performativity in Art, Literature and Videogames> Jayemanne, 2017) 플레이어가 완전히 캐릭터가 되고, 세계의 법칙이 동일하게 작동하며, 일체화된 관점으로 세계를 유랑한다는 전제는 어디까지나 비디오게임 세계를 유령처럼 떠도는 환상이다. 이것은 (바쟁Andre Bazin의 언어를 빌리자면) ‘완전 게임’에 대한 환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환상에 대비하여 개별의 비디오게임을 논하는 것은 결국 올바른 좌표 설정이 될 수가 없다. 내러티브 게임은 오디오비주얼 내러티브에 일체화라는 기술적 진보성을 투영한 특권적 매체가 아니다. 내러티브의 사후적 구성, 그것은 전적으로 미지의 원본을 구성하기 위해 플레이어가 체화한 기존의 내러티브 체계를 작동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때문에 내러티브 비디오게임의 수용자성은 다른 매체의 수용자성을 참조해와야만 작동하며, 비디오게임(과 루두스 장치)은 매체 간 상호참조의 교차적 허브가 되기 때문에 특권적일 수 있다.

 

  그래서 그 마왕은 누가 쓰러뜨렸을까? 그것은 용사 자신의 힘으로 이룬 성취이며, 플레이어는 명령자이자 최초의 목격자로 그 광경을 함께 했다. 명령자인 플레이어는 당당히 ‘내가 마왕을 쓰러뜨렸다’라고 선언할 수 있다. 그리고 루두스 장치에 대한 이해는 여기에 ‘내가 그의 영광스러운 장면을 목격했다.’라고 외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준다. 비디오게임을 플레이한다는 행위의 즐거움은, 이 두 선언을 동시에 외칠 수 있다는 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