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우리에게

  서간체로 글을 씁니다. 저는 종종 비공개 블로그에 일기를 쓸 때도 서간체로 쓰곤 합니다. 그러면 일기가 연애편지처럼 쓰입니다. 사생활을 나열한 계정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자가 아니라면 그 글을 읽을 수 없을 텐데도, 저는 답장을 기다립니다. 손쓸 수 없을 만큼 고약한 심보입니다. 하지만 이번만은 정당한 심보라고 합시다. 지역성은 상호 호명과 무관하지 않으니까요. 창작자로서 지역을 호명하고, 호명을 기대하는 것은 이처럼 엉뚱하고도 정당한 심보일 수도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임지지입니다. 텍스트와 무빙이미지를 바느질해 너덜너덜한 대안 서사를 만드는 창작가입니다. 혹은 시각예술, 다원예술, 미디어 아트, 소외문학 등 다양한 예술 장르 어딘가를 표류하는 하나의 반짝이는 부표. 생계를 위해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몸 바쳐 일하는 논바운더리 기획자. ‘아름다운 나의 몸뚱이’라는 유일무이하고도 귀중한 생산수단을 소유한 문화예술 노동자. 그리고 거의 매일 성호를 그리듯 서울 전역을 넘나드는 서울시민입니다.

 

  저는 성북구문화재단과 함께 예술활동거점지역 활성화사업 〈예술순환로〉에서 약 3년 동안 활동했습니다. ‘예술순환로’는 성북구 월곡, 석관, 장위 지역에 드리워진 높은 고가도로 아래 모인 예술인들의 커뮤니티입니다. 학·석사 과정 약 8년 동안 석관동에 거주하던 저는 학교 내부와 학교에서 다루는 좁은 예술생태계 외의 세계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학업을 마무리하던 중에 학과 선배의 초대로 〈예술순환로〉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러니까 2019년 말. 아직 이름이 없던 예술순환로는 그저 불분명한 흐름 혹은 어떤 기세의 덩어리처럼 보였습니다. 당시 시범사업에 참여하고 있던 창작자들은 주변 창작자들을 알음알음 모아 인터뷰하면서 이야기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당시 인터뷰를 회상해보자면 주요한 질문은 이러했지요. “우리 지역에서 창작을 지속하며 정주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꼬박 삼 년 전 겨울, 저는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저는 (절반은 냉소적인 심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은 우정이라고요.

 

  이 답을 이제 비평해보고 싶네요. 어느 영화 제목처럼,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고. 당시 저는 공공예술과 관련된 담론들, 로컬리티와 로컬리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비판적 견해는 일부 현재도 유효합니다. 그러나 온도는 달라졌습니다. 이제 이것은 따뜻하고 또 물러설 수 없이 치열한 질문입니다.

 

  친애하는 웹진 퐁의 독자 여러분, 이제 제 소개는 마쳤으니 이 편지의 진정한 발신지를 소개합니다. 그곳 날씨는 어떤가요? 이곳은 무지갯빛 눈이 내려요. 성북구의 한 귀퉁이, 〈예술순환로〉에서 만든 웹진 믿미입니다.

 

  웹진 믿미(meetme)는 〈예술순환로〉의 온라인 플랫폼 팀에서 기획하고 제작해 운영해 온 계간지입니다. 〈예술순환로〉의 다양한 활동 기록을 아카이브하고 리뷰하며 동시에 특집 칼럼 코너(팽팽)와 문학 코너(오독오독)을 운영하며 등단·비등단 여부를 가리지 않고 지면이 목마른 창작자들을 위해 경계 없는 텍스트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창작가들이 모여 고군분투, 우여곡절을 겪으며 2년 동안 펑크 없이 발간됐는데요. 3년짜리 예술활동 거점지역 활성화 사업이 종료됨에 따라 이번 달 발간하는 겨울호를 마지막으로 종료되었습니다. 8개의 알록달록한 믿미를 보고 또 보다가 아직 흐릿한 믿미의 시즌2를 상상해보기도 합니다. 이 문을 열었고 또 직접 닫게 되어 감개무량한 저는 이제 상속을 준비합니다. 믿미의 2년 그리고 제가 성북에서 활동했던 지난 3년간의 세월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로컬리즘의 가능성, 그 에센스 한 방울을요.

 

  다시 3년 전 겨울로 돌아가 봅니다. 아직 사무국도 마련되지 않았고, 이름도 없는 채로 우리는 봄을 맞이합니다. 저는 아주 다양한 크기와 모습의 라운드 테이블에 다녔습니다. 소정의 회의참석 수당과 그리고 샌드위치나 커피 같은 간식을 먹기 위해서요. 어떤 매뉴얼도, 어떤 비즈니스 모델도 없는 이상한 사업이었지요. 거기서 이 도시의 많은 사람을 처음 보았습니다. 여러 사단법인과 협동조합들, 제각기 독특한 이름의 예술인 단체와 네트워크, 극단, 도서관, 그리고 예술인들과 활동가들. 지금은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하나하나 헤아릴 수 있습니다. 말 한번 섞을 기회가 없었더라도 그들의 발자취와 별명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아니었지요. 물론 그들에게 저 역시 ‘청년’과 ‘시각예술가’ 어딘가를 애매하게 맴도는 앳된 하나의 피상이었을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 테이블 위에서 오고 갔던 말들은 결코 뭉툭하지 않았습니다. 벼린 칼처럼 빛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단단히 잘못 깨진 유리 파편처럼 날카로웠습니다. 지역의 예술인들이 주체가 되어 지역 공동의 자원을 발굴/생산/운용하고 담론화와 실험을 통해 장차 우리 동네를 예술하기 좋은 동네로 만드는 것, 예술순환로의 목표를 정하기까지도 오랜 시간과 수많은 가치의 다툼들이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업은 골방에 홀로 틀어박힌 예술가를 단순 지원하는 사업이 아닙니다.”

왜인지 조금 상처받은 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성북구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내 명의의)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족이나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닌 예술가들을 어떻게 이 지역의 예술가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예술인들의 창작과 삶의 터전을 단순한 행정 관할 지역으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 서울에서는 앞문과 뒷문의 ‘구(區)’가 다른 경우도 있는걸요. 지방이면 모를까, 성북구만 똑 떼어내서 지역성을 사유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거들었습니다.

“그건 지역이기주의죠.”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술인을 향한 묻지마 식의 현금성 지원에 반대합니다. 이 사업에서 예술인은 주체적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이 예산은 세금이니까요. 그런데 왜 우리 거버넌스에 지역 주민 대표는 없는 것인가요?”

누군가가 말을 이어 붙입니다.

“우리 동네의 주인은 소수의 예술가들이 아니라 다수의 시민입니다. 이곳에 거주하고 이곳에서 먹고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이요. 그들을 소외시키고는 지역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곧바로 발끈한 불평도 터져 나옵니다.

“예술인들에게 더 이상 열정 페이를 강요하지 마세요. 예술인들은 지역의 환경미화를 담당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가 아닙니다.”

저는 이제 확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립니다.

“예술은 보편적인 것입니다. 보편적이라는 것은 그 앞에 어떤 예외 없이 모든 존재를 소환한다는 의미입니다…….”

 

  라운드 테이블 위의 논쟁이 풍요롭고 첨예해질수록 저는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진지해질수록 심해졌죠.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3년이라는 시간, 그리고 수십억의 예산이었습니다. 그 돈을 두고 점차 노골적으로 뒤엉키는 이해관계를 보며 때때로 풀이 죽고 비관적이거나 냉소적으로 굴곤 했습니다. 제가 의지를 잃자 질문들 역시 생기를 잃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저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고 있네요.

 

  3년 동안의 이야기는 마법 같지만 한편 아주 지루하고 답답한 로맨스 영화 같기도 할 것입니다. 제가 마음을 열기까지도 오래 걸렸고, 진심이 되기까지는 더 오래 걸렸으며, 그런데도 여전히 연약한 확신과 난데없는 의심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챕터를 짚어보며 오늘날까지 이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Chapter. 1

행정 구분을 넘어 생태계를 보기

 

  〈예술순환로〉는 단지 지역의 문화를 부흥시키거나 혹은 예술을 통해 지역을 부흥시키거나 하는 평면적인 사업이 아닙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것을 거부했죠. 우리의 소망은 명료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곳을 떠나지 않고 오래 머물며 창작과 생계를 지속할 수 있을까?” 서로를 향해 점차 상세해지는 질문을 거듭하며 필요한 것들의 목록이 마련되었습니다. 점유할 수 있는 물리적/비물리적 공간, 공유할 수 있는 물질적/비물질적 자원, 스터디와 담론화를 통한 역량 강화, 생산과 유통이 선순환할 수 있는 생태계, 그리고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섯 개의 워킹 그룹이 만들어졌습니다. 각 그룹은 개인 창작자와 민간 기획자들을 주축으로 민·관 협업 형태의 거버넌스와 사무국의 지원으로 각자의 프로젝트를 실험했습니다. 그사이 많은 대화가 있었고, 밀물과 썰물처럼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졌습니다. 어떤 프로젝트는 성과를 냈고, 어떤 프로젝트는 실패했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몸집은 커지며 우리는 로컬리티를 사유하는 것에 대해 실무적인 문턱을 함께 넘었습니다.

 

  ‘무엇을 지역으로 규정할 것인가?’, ‘누구를 초대할 것인가?’, ‘어떻게 지역의 담론을 생산하고 순환시킬 것인가?’ 우리는 피드백과 동행했습니다. 짧지 않은 사업 기간 지치지 않고 ‘지속가능성’을 꿈꾸기 위해서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 모인 이유. 우리가 다루는 지역. 분명 이것은 서울특별시 성북구라는 행정 구분의 영역을 넘어서기 시작한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또 다른 우리의 이름이 필요했습니다. 성북구, 석관동, 월곡동, 장위동이 아닌 다른 이름이죠. 그것은 우리 머리 위를 지나는 거대한 고가도로처럼 멈추지 않고 우리가 순환할 수 있는 길. 〈예술순환로〉였습니다. 이것이 우리 로컬리티의 정체였습니다. 먹고사는 것과 창작이 맺고 있는 긴밀한 연결구조를 논의할 수 있는 장소. 창작과 향유, 유통이 순환하는 구조. 창작자가 지역의 자원을 이용하고, 그들이 생산한 예술 작품이 또다시 지역의 자원이 되는 고유한 경로. 바로 지역 문화예술생태계입니다.

 

  어떻게 하면 아름답고 지속가능한 지역 문화예술생태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이것이 우리의 다음 질문이었습니다. 안전하고 장벽이 낮아야 하고요 무엇보다 풍요롭고 다채롭다면 더 좋겠죠.

 

  그 꿈을 위한 가장 첫 번째 단계는 예술인, 활동가 한 명 한 명이 시민 주체가 되어 생태계의 일원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당연한 명제에 합의하는 것이었습니다.

 

 

Chapter. 2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많은 예술인은 ‘예술인’이라고 호명됨과 동시에 ‘시민’으로 호명되기 어렵습니다. 그건 뭐랄까 민원을 해결하는 공무원도 사실 주민이라는 사실만큼이나 당연하지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감수성인 것 같지요. 사실 이것은 등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일종의 소마트로프(thaumatrope) 놀이처럼 빠르게 뒤집히는 동안에만 하나로 겹쳐질 수 있는 이미지일지도 모릅니다.

 

  지역의 다양한 문화예술 사업의 행정과 현장의 괴리에서 종종 느껴지는 예술가를 향한 미묘한 적대감은 어쩌면 여기서부터 비롯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역공동체는 예술인을 시민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권리를 보장해야 하죠. 마찬가지로 예술인은 스스로 시민 주체를 자각하고 그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술가/시민 주체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진보적이고 생산적인 합의 위에서 모두의 시민력이 함께 성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예술이 보편적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지역공동체에서 예술의 생산과 유통을 공공의 문제로 다뤄야 합니다.

 

  이런 합의에 이르는 과정은 지난하고 까다롭지요. 그런데 저는 줄곧 큰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술이 보편적이고 공공의 문제라는 사안에 대해 설득하는 것이 비예술인에게 몹시 어려울 것이라고요. 그러나 실상은 저 또한 예술이 무한히 자유로운 고유성을 보장받아야 한다고만 여기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어느 날, 아마도 예술순환로에서 있었던 무수히 많은 라운드 테이블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예술 각 장르의 씬(scene)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저는 시각예술가로서 당연히 시각예술 분야의 씬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시각예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과 전시 그리고 담론입니다. 그런데 작품을 생산하는 생산자와 생산구조, 전시를 만드는 자본의 원리와 노동 환경, 담론의 편차와 유통 과정은 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도 쉽게 은폐됩니다. 누가 누가 더 아름답게 은폐했는지도 경쟁이 붙은 것처럼요. 전시장은 비인간적이고 작품의 감각은 초월적이기도 합니다. 미술관의 비정규직 인력들이 고상한 전시를 위해 얼마나 과로하며 얼마나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지 예술은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몸을 베베 꼬면서 덧붙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해결하는 것은 창작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인 것 같다고요.

 

  그러자 누군가 끼어들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예술 창작은 정치적 시도이지요.”

 

  네, 그렇죠. 왜 진작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예술을 하며 먹고살겠다고 결심한 것 자체가 정치적 선언이었지요. 창작의 시간을 보장받기 위해 비정규직을 자처하겠다고 내가 말했었지요. 세상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겠다고요.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가장 비효율적이고 가장 비생산적인 방식으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연약한 형상을 가장 아름답다 여기겠다고. 가장 비정치적인 언어로 가장 정치적인 얘기를 할 수 있다고.

 

  치열하게 정치적일 것. 지치지 말고. 어쩌면 이것은 시민으로서의 주체성도, 예술가로서의 주체성도 모두 아우르는 명령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로컬리티에 대한 논의가 마냥 답답하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마찰 없는 달리기처럼 공허하게만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어요.

 

  그렇다면 정치와 예술이라는 바늘과 실을 손에 들고 지역과 예술을 어떻게 엮어 사유할 수 있을까요?

 

 

Chapter. 3

대안 장르로서의 지역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 저는 석사 과정 중이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그 시간을 학사의 연장선으로밖에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긴 학업의 기간이 지루했죠. 어서 학교를 떠나 창작 현장에 진입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저는 현장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각자의 이상적인 현장에 진입하기 위해 예술가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으며 심지어 현장 대부분이 유연하고 즉흥적이며 신기루처럼 위태롭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예술가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아주 완만한 미끄럼틀을 타고 있다고 착각했죠. 모든 것이 관성적으로 여겨졌습니다. 사실은 마찰력이 없는 비정형의 궤도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처절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저는 (영영 갚을 길이 없어 보이는) 취업 후 상환 학자금대출과 애처로운 금박이 입혀진 학위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죠. 다만, 이제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나,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만 어리석지 않은 내가 홀로 있을 뿐이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이미 한참 전에 취직한 친구들, 유학 간 친구들, 사업자를 낸 친구들, 몇 개의 지원사업에 동시에 선정되어 숨 가쁘게 사는 친구들, 그리고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소식을 알 수 없는 친구들. 그리고 저처럼 각 장르의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는, 어떤 소속도 없고, 어떤 안전망에도 걸리지 못한 흐릿한 불빛들.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생계를 위해 ‘저’를 사용하고 갈고 닦기 시작했습니다. 좋게 말하면 유연하고 나쁘게 말하면 파편화된 비정규직 노동 시장에서 저는 나름 잘 팔렸습니다. 젊고, 야무지고, 여성인 데다가 문화예술 전공자라는 허울도 좋았죠. 그러다 시간이 나면 자취집 한켠에 마련한 작업실 책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수많은 지원서를 썼습니다. 책 읽고 글을 쓰고, 드로잉을 하고, 이것저것 작업을 구상했지요. 소소한 지원금을 타내면 마음먹고 싱글 채널 비디오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2인전도 했고, 단체전도했지요. 돈은 언제나 플러스마이너스 제로. 소소한 저축과 소소한 빚의 시소 타기. 그러다 종종 겁에 질렸습니다. 더 이상 젊지 않으면, 더 이상 ‘내’가 팔리지 않으면, 그 무엇도 내일을 보장하지 않는 삶. 오로지 내 몸 하나가 나를 먹여 살리고 돌보는 아슬아슬한 홀로살이.

 

  이 불안과 두려움에 가장 먼저, 가장 깊게 공감하고 함께해 준 것은 성북에서 만난 〈예술순환로〉의 친구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만든 민·관 거버넌스의 공무원과 활동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생활문화예술인”이라 말할 수 있는 시민들이었습니다. 쓸쓸하지만, 〈예술순환로〉의 끈끈한 원동력 일부는 이 불안과 두려움에서 기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서로의 불안과 두려움에 공감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보다 그 불안과 두려움이 발생하는 구조 속에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누군가의 사적인 곤란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 여겨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모였습니다. 누군가의 곤란을 우리 모두의 함께 헤쳐나가야 하는 고난이라 여기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는 상상합니다. 우리만의 대안 장르. 우리만의 대안 씬. 우리가 씨를 뿌리고 무엇인가 수확할 수 있는 마당. 터. 무대. 빈 땅. 공유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로컬을.

 

  〈예술순환로〉의 3년은 올해 끝이 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북문화재단에서 추진하던 예술활동거점지역 활성화사업에서 독립하여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사단법인이 될지, 협동조합이 될지, 임의단체가 될지, 혹은 독특한 커뮤니티, 독보적인 네트워크, 혹은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아름다운 다면체의 집단이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무엇도 내일을 약속해주지 않는 삶. 그러나 어김없이 도착하는 서로를 향한 안부인사처럼, 때때로 내가 멈춰도 나를 지속하게 하는 서로의 관성력. 이것이 내가 배운 로컬리티입니다.

 

* 예술순환로와 웹진 믿미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한 경로
: https://artsoonhwan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