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액질의 존재론적 전회 The ontological revolution of slime


糸瓜咲いて/痰のつまりし/佛かな
수세미 피어도/가래 응어리졌고/후불이려나 [1]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플루타르코스는 질료, 형상, 결여privation로 대변되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세 가지 원리를 신화적으로 해석했다.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신화에서는 필멸과 부조화의 악신인 세트 또는 튀폰이 상징하는 결핍steresis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엠페도클레스는 이 선한 원칙을 '우정' 또는 '친근감'이라 부르기도 하며, 종종 화합Concord을 "차분한 표정짓기"라고 부르고, 악한 원칙을 '저주받은 싸움'과 '피로 얼룩진 갈등'이라고 불렀다. […] 그러나 아낙사고라스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정신과 무한을 상정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결여를 상정한다. […] 그래서 영적 지성과 이성에 있어 모든 선한 것의 지배자이자 주인은 오시리스이며, 우주 만물에서 계절, 기후, 전회의 주기들로 대변되는 규칙적이고, 체계적이고, 건실한 것들은 오시리스가 발산하는 기운이자 그가 반영된 이미지다. 그러나 튀폰은 쉬이 흔들리며,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이자 반항적인 영혼의 일부이며, 비정상적인 계절운행과 기후 그리고 일월식으로 대변되는 병들고 무질서한 신체부위, 이를테면 방종과 난동을 포함한다. 그리고 튀폰의 또 다른 이름인 '세트'에서도 이러한 측면을 찾아볼 수 있는데, "세트"는 '압복', '압도'란 의미를 지니며, 많은 경우 '되돌아가기' 또는 '뛰어넘기'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렇다.[2]

  플루타고라스의 저술에서 철학은 신화와 결합된다. 오시리스는 형상, 이시스는 질료, 세트는 결여다. 마이모니데스도 뱀이라는 결여로 인해 아담이라는 형상의 필멸성이 생겼다고 주장하며 동일한 논리를 펼친다.[3] 그러나 우리는 고대 이집트인들은 세트를 특별히 부정적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며, 역으로 왕의 보호자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기독교 사상의 발전에 있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이 영향을 줬다. 물질 자체가 악마적으로 여겨진 것이 아니라 그것이 파괴와 불안정성에 노출됐다는 점만이 악하게 여겨졌다. 구원과 불멸을 얻기 위해서는 죄 많은 육체가 그리스도의 성체처럼 되어야 하고, 결여로서의 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예수를 '육신의 주님'이라 부른다.[4]

  말씀조차도 육신의 기관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목적의 추구, 재능, 그리고 노동, 과업, 기능의 수행처럼 이루심도 육신이란 수단을 필요로 한다. 영혼의 생명력은 온전히 육체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생명이 끊어진다는 것은 영혼의 입장에서 볼 때 육신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죽음 그 자체도 육신의 영역에 속하며, 생명도 마찬가지다. 또한, 만물이 육신을 경유하여 영혼에 종속돼 있다면, 이는 만물이 육신에도 역시 종속됐음을 뜻한다. 무언가를 사용하고자 할 때, 동시에 그 무언가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도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육신은 영혼의 시종이자 하녀로 여겨지지만 또한 영혼의 동반자이자 공동 상속자임이 분명해졌다. 만일 이것이 한시적인 것에도 그러하다면 영속적인 것에도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5]

  기독교인들은 물질을 무시하기는커녕 물질을 기독교 강령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영혼의 구원은 물질적 실존의 중단을 뜻하지 않으며, 물질이 변형됨으로써 타락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는 질병과 노화, 죽음이 없는 영원한 육체에 관한 종교다. 최후의 심판 이후, 파괴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온전한 세계와 분리되어야 한다. 육신은 타락하지 않게 되고, 모든 재와 먼지는 지옥에 모일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의 용어들을 적용하자면, 그리스도가 이브(질료)를 구제하고, 결여(죄)를 종식시키고, 아담(형상, 영혼)을 구원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는 어떠한 형상도 허용치 않는 주권적이며 통제 불가능한 질료, 고정되지 않으며 변화와 부동(浮動)에 지배된─로고스가 아닌 카오스, 불멸이 아닌 죽음을 우선시하는─질료에 대한 두려움의 견고한 토대가 되었다.

 

 

<서던 리치>(2018), 알렉스 가랜드, 한 장면.


  《공포의 탐구An Investigation of Horror, Исследование ужаса》에서 오베리우OBERIU[6]의 주요 이론가 레오니드 리파브스키Leonid Lipavsky는 이러한 감정의 존재론적 전제에 머물지 않고, 기본적으로 현상학적으로 접근하여 그 계보를 밝힐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의 작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촉발된 기독교 민족의 가장 큰 두려움은 하늘과 초원, 바다와 같이 길을 잃을 수 있는 열린 공간에 대한 두려움과 피가 솟아나 몸 바깥으로 흘러나와 여러 갈래로 흐르는 것─"녹음의 풍경 속 붉은 식물"이 되어, "갑작스레 우리 내부의 장기들이 갖는 식물성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7] 자신들의 정체성과 형태를 잃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리파브스키는 공포가 위험에 대한 직감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율적인 것이라고 지적한다. 더욱이, 그는 어떠한 대상이 갖는 무서움은 색상이나 윤곽과 같은 객관적 특질이라고 단언한다.[8]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과도 근접하다. 실제로, 리파브스키는─그가 사물의 특질로 여기는─무정형성에 대한 다양한 예시를 들며 이를 공포의 감각으로 인식한다.


  무정형성의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사상가들 중에는 히포 레기우스의 주교였던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있다. 그에 따르면 "형상이 부여된 것들이 무형의 것보다 더 낫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9]  창세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무정형의 질료는 다른 모든 것들보다 먼저 창조되었지만 이 우선성이 영원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가치에 있어서는 질료가 최종적인 산물인 사물들보다 먼저라고 할 수 없지만, 질료로부터 사물들이 나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마치 질료가 형상보다 '시간적으로' 먼저인 것처럼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10] 이러한 무형의 질료는 시간이 만들어지기 전에 생겨났는데, "형상을 부여받은 사물들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시간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11] 선행하는 카오스 속에서는 시간도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혼합물의 일종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혼합물은 원초 물질의 더께로부터 분리되지 않았기에, 말하자면 현재과거미래presentpastfuture가 합쳐진 상태였다.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이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무정형성 안에서 쇠약해 가는 모종의 창조물이 있었다는 낯설지만 흥미로운 생각을 제시한다.


  창조의 첫날에 주님이 "빛이 있으라"고 하셨더니 "빛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나는 이것이 영적인 피조물이 이미 모종의 삶을 살고 있어서, 주님이 거기에 빛을 비추어 주셨음을 이렇게 서술된 것이라고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영적인 피조물은 주님께 자기를 창조하셔서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시라고 먼저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때에도 먼저 나서서 주님께 자기에게 빛을 비쳐 주시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적인 피조물은 아직 빛이 되지 않아서 무형의 질료로 존재하고 있었을 때에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존재가 아니었지만… [12]

  아우구스티누스는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태를 "심연의 어둠"[13]이라 불렀다. 그는 하느님에 의해 빛을 받고 빚어진, 창조가 이뤄질 때 있었던 최초의 상태가 무엇인가에 대한 주제로 무형에 대해 오랫동안 사유했다. 처음에는 이상하고, 거칠고, 무서운 이미지들이 떠올랐지만 그는 곧 이 모든 것들이 차별화된 이미지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고 가변성의 원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변화하는 것들의 '가변성'이라는 것은 그것들이 변화해서 될 모든 '형상들'을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합니다. 이렇게 가변성을 지닌 무형의 것은 대체 무엇이 드러난 것입니까? 영soul입니까, 사물body입니까? 영이나 사물의 한 종류이기는 한 것입니까? 그것은 "무(無)인 어떤 것" 또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기꺼이 그런 말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고 형체가 있는" 것들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 이러한 가변성을 지닌 무형의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에서 와서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들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만큼 더 주님을 닮지 않게 되는데, 내가 여기에서 차이가 난다 하고 말하는 것은 공간적인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여, 주님은 여기에서는 이런 존재이시고 저기에서는 저런 존재이신 그런 분이 아니시고, 어디에서나 항상 동일하신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전능하신 '주 하느님'이십니다.[14]

 

 

Andy Warhol, <Oxidation painting>, 1977-78, Work on Canvas.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에서 절대적 무정형성은 가변성 그 자체이며, 비항구성의 원리가 깃든 어두운 심연이되, 하느님은 일정하고 안정된 빛이다.

 

  리파브스키가 설명하는 동질성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는 사물들은 정확히 어떤 것들인가? 갯벌, 굳은 지방, 진흙, 침, 점액, 창자, 허파, 심장, 다른 모든 내장기관, 분비물, 살점, 정액이 여기에 포함되고, 리파브스키는 정액에 특히 관심을 쏟는데, 왜냐하면 이것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동질성이 무엇인지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원생동물과 해양생물은 "거의 액체"이기 때문에 끔찍하다.[15] 마찬가지로, 이러한 대상은 질퍽거리고, 쩝쩝거리고, 빨아마시는 소리처럼 과잉과 모호한 생명, 농도의 표현과 연관된 특정한 소리들도 존재한다.[16] 모든 퍼져있는 것들과 거품 또한 무섭다. 거미, 기생충, 문어, 두꺼비, 애벌레, 게, 엉덩이, 젖가슴, 종기, 그리고 지네. 이것들은 모두 거품, 과팽창, 혹은 과팽창한 거품과 연관된다. 부정형 물질은 그 자체로서 두려움을 자아내는데, 만일 아이가 젤리를 두려워한다면 그 이유는 살아 있지만 형상이 없기에─로고스가 박탈된─되살아나는 물체이기 때문이다. 살아있지만, 규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리파브스키는 이를 "부당한 생명성"[17]이라고 부른다. 모호한 생명은 정말 공포스러운 것이다. 거품이 가장 무서우면서 에로틱한 이유는 무아(無我)의 원칙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18] 리파브스키는 손톱이나 머리카락의 생장으로 나타나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갖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무서운 것이라고 말한다. 죽은 자의 삶은 부패의 과정이다.[19] 이제 우리는 공포가 무엇인지 거진 이해하게 된 셈이다. 리파브스키는 반세기 앞서 유럽 문화의 향방을 예견했다. 마침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중점적 관심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공포가 매력적이기 때문에 공포영화를 본다. 5세기에 요한계시록이 정경으로 인정받았을 때,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기독교 세계의 문화적 원형들 사이에 위치하게 되었다.


  벤 우다드Ben Woodard는 레오니드 리파브스키의 작품과는 친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점액질 동역학: 발생, 변이, 그리고 생명의 전율Slime Dynamics: Generation, Mutation, and the Creep of Life》에선 리파브스키의 어떤 작업도 참조하지 않는다. 두 철학자가 쓴 글들이 모두 점액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이기에 비교하기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우연성은 매우 놀랍다. 두 작품 모두 거품, 시체, 젤리, 점액 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둘 다 공포가 위험감과 직접적으로 관련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대부분은 아마도 극심한 역겨움에서 비롯할 것이다.


  공포는 혐오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는 실질적인 의미를 가진 어떠한 것으로도 야기되지 않는다. 이는 미학적인 것이다.[20]

  우다드는 '암흑 생기론dark vitalism'의 개념을 도입하고, "가혹한 우주에 대한 메스꺼운 깨달음"과 "균(菌)의 공포와 생명에서 비롯되는 소름 끼치는 느낌"에 대해 썼다.[21] 파괴, 마모, 노화에 겁을 먹은 그는 이언 그랜트Iain Grant의 《존재와 점액Being and Slime》을 언급하며 "우리의 존재는 오직 부패의 퇴적, 적충(滴蟲) 덩어리, 원형질, 혹은 창조적이되 썩은 통일체일 뿐"임을 확인한다.[22] 우다드는 자신의 생기론적 비관론을 옹호하면서, 각각 데카르트적, 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는 세 가지 주장을 제시한다. 우선, 우리의 정신은 자연의 신비를 발견하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두 번째로, 생기론은 결국엔 모든 것이 파멸할 것이라고 예측하며 "나쁜 소식"을 전한다(종말론). 세 번째 주장은 정액으로부터 생겨난, 거품이 일고 흘러다니며 박테리아와 곰팡이가 득실거리는, 리파브스키가 일찍이 악몽과 같이 묘사한 생명의 숨겨진 바탕이 미학적으로 수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리파브스키와 우다드는 "인간적이지 않은 자연 발생적인 생명"에 대해 동일한 두려움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발효 과정에서 관찰할 수 있으며, 장력과 에너지로 이뤄진 응어리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반(半)액체의 비유기물 덩어리. 자신의 형상이 변하는 것과 퍼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거품으로 섞인다"는 사실로 공포에 사로잡힌다.[23]


  리파브스키에 비해 우다드는 좀 더 신경증적이다. 왜냐면 오늘날에는 불안정한 물질에 대해 예민한 감수성을 발달시키는 정교한 컴퓨터 게임, 소름끼치는 영화 그리고 괴기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 이 불안으로 가득 찬 우다드의 점액 공포증적인 책에 반영되어 있다. 저자는 자기 자신이 세계에 대한 특권적 접근을 옹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사변적인 실재론자들에 대한 공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특히 인간을 묘사하는 감정들은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마도 우다드는 사르트르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로부터 출발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리파브스키가 사르트르의 책 《존재와 무》에서 발췌한 내용, 즉 가스통 바슐라르의 정신분석학적 유물론에 따라 사물의 성질은 우리의 기투에 의존하지 않는 어떤 정신적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을 발췌한 점을 지적하고 싶다.


  또 한편으로 그만한 상태에 있어서 고려된 이른바 '끈적거림'은 우리에게 실제로는 해로운 것으로 나타날 수 있을테지만(왜냐하면 끈적끈적한 실체는 손이나 옷에 들러붙어 그것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혐오를 일으키는 것'으로서 나타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사실 우리는 끈적거림이 불어넣는 혐오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끈적끈적한 것poisseux의 상징적인 가치를 알아내기 위한 이른바 수업 같은 것이, 거기에 있어야 할 것이다.

 

 

<서던 리치>(2018), 알렉스 가랜드, 한 장면.

 

  그러나 관찰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로는, 극히 어린아이들도 끈적끈적한 것 앞에서, 마치 그것이 '이미' 심적인 것에 의해 오염되어 있는 것처럼 반발을 나타낸다. 또한 그 관찰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로는, 어린아이들은 말을 배우자마자 '부드럽다'니 '낮다' 등의 말이 감정의 기술에 적용된 경우의 가치를 '이해한다.' 마치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이 우주에서는 감정과 행위가 모두 물질성을 지니고 있고, 실체적인 소재를 가지고 있으며, 글자 그대로 부드럽다, 평평하다, 끈적끈적하다, 낮다, 높다 등등인 것처럼 보인다. 또 거기서는 마치 모든 물질적인 실체가 본디 하나의 심적인 의미작용을 가지고 있고, 그 의미작용이 그런 실체로 하여금 '혐오를 일으키게 하는 것', '공포를 일으키게 하는 것', '마음을 빼앗는 것'이 되게 하는 것 같다. 투영 또는 유추에 의한 어떤 설명도 여기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24]


  사르트르는 아이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하며 다소 의아한 논거를 제시한다. 여기서 유아심리학을 다루지는 않겠지만, 사르트르의 주장과는 달리 흔히 아이들은 다양한 더러운 물질들을 가지고 놀 때 어떤 두려움이나 구역감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 우다드와 리파브스키는 우리가 경험하는 공포가 잠재적인 위험과 관련이 없기에 실체적이라고 확신한다. 동일하게 사르트르는 끈적끈적한 것들에서 유래하는 불쾌한 인상과 그것이 수반할 수 있는 피해를 분리해 낸다. 사르트르의 존재론적 심리주의는 우리를 형이상학의 오래된 문제로 다시 돌아오게 한다. '존재'와 '무'의 범주는 유대-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속한다. 우리는 0에 조응하는 무의 개념을 구약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실존주의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존재의 도치이며, 아우구스티누스 계열의 기독교적 해석에서 무는 그 자체로 질서가 없는 부정형 물질과 동일하다. 사르트르가 끈적거림의 부정적인 성질을 객관화하는 작업은 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존재론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사르트르의 작품에서 실존주의자의 순수한 무는 무정형으로서의 무와 혼동되기 때문이다. 《구토》에서 사르트르가 로캉탱을 통해 그려낸 생생한 존재론적 전회가 오늘날에는 오래된 질료형상론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


  질료가 형상을 따름으로써 인간의 신체가 꽃피지 못하게 하는 개별화와 차이화를 획득하지만, 마찬가지로 암흑 생기론(혹은 리파브스키가 앞서 말한 식물적 유동성)이 형상의 억압 속에서 꿈틀댄다─피는 그저 녹색 식물들 사이에 있는 붉은 식물이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생각을 《존재와 무》에서 마주하게 된다.


  이런 액체성은 그 자체가 과일즙이나 인간의 피와 비교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피 자체도 우리의 은밀하고도 생명적인 액체성에 비할 수 있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이 액체성이 우리에게 가리키는 것은, '알갱이로 된 치밀한 것(이것은 단순한 즉자의 어떤 하나의 존재 성질을 지시한다)'이 '등질적이고 무차별적인 유동체'로 변화할 수 있는 끊임없는 가능성이다.[25]

  벤 우다드가 자신의 철학 블로그를 "사변적 이단Speculative Heresy"이라고 칭하는 것은 징후적인데, 왜냐하면 끝까지 헤아려보았을 때 그의 모든 두려움은 순수하게 교조적인 지반 위에 정초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인간이 우주의 암흑 생기론 속에 편재하는 점액의 희생자라고 주장하는 한, 그는 우리가 곰팡이 피고, 소름끼치는 세균적 힘에 직면했을 때 느끼는 끔찍한 불쾌감을 상기시켜 준다. 이것이 바로, 비록 비관적일지라도, 그를 인간중심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다드는 형상의 독재로부터 질료를 해방하고, 질료의 전제정치를 구상하지만─가령 전복된 존재론에서 새로운 창조적 잠재성을 펼친 들뢰즈와 달리─이를 기꺼이 내세우지는 않는다.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에서 반전된 질료형상론의 원리를 적절하게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장인은 특정 종류의 섬유를 찾고자 할 때 나무의 의지에 굴복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장인과 질료, 형상적 본질과 기질)에서 가장 흔히 인용되는 비유이지만, 여기서는 역전되어 오히려 장인이 수동적인 역할을 맡게 됨으로써 필리다적Phillidian인 철학적 주제로 나타난다. 더 이상 복종시키고 억압적인 형상(장인, 데미우르고스, 작가)은 필요치 않으며, 표면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법칙에 종속된 질료보다는 노모스를 가진 질료성에, 질료에 특성을 강요하는 형상보다는 다양한 변용태를 구성하는 표현의 물질적 특질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26]

  앞서 언급한 '필리다적'이란 용어는 필리다(Philida, Pancaste, Phyllis)란 이름으로 알려진 고급 창부에 대한 고대 전설에서 나왔다. 필리다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그녀를 등에 태워주고 채찍질하기를 재촉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와 함께 제시되는 여러 삽화[27]는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내세운 원리를 뒤집는다.


  그러나 어떻게 형상 또는 형상의 결여가 실제로 형상을 갈구할 수 있겠는가? 형상 그 자체는 그러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이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상에 대한 대립자인 결여 또한 그러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대립관계의 항목들은 상호 파괴적이어서 서로를 갈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질료를 남성을 갈구하는 여성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아름다운 것을 갈구하는 추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갈구함은 추함 그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으로 추하거나 또는 여성인 어떤 주격대상에서 기인함에 틀림없다.[28]

  점액은 어떤 형상도 필요로 하지 않은 물질이다. 게다가 우다드가 묘사한 해로운 세균적 점액은 형태의 파괴에 기여한다. 우다드의 혁명적 메시지는 질료가 결여를 가지고서 형상을 배반하고 통제 불가능하고 카오스적이며 위험한 존재가 된다는 반전된 존재론적 원리에 있다.

 

 

Aristoteles and Phyllis, Pieter de Jode I, Late 16C, Etching.


  브루노 슐츠Bruno Schulz의 〈마네킹에 관한 논설Treatise on Tailor's Dummies〉 연작은 필리다적 존재론에 대한 훌륭한 도식을 제공한다. 작품 속 아버지는 질료의 자족성과 창조에 대한 데미우르고스의 부정한 독점에 대해 담론을 펼친다. 비록 그가 창조하는 방법은 이해할 수도 없고 모방할 수도 없지만, 거기에는 질료 그 자체로부터 비롯된 어두운 데미우르고스의 부당한 작용이 있다. 그 작용들은 미묘한 영향, 진동하는 표면, 흐릿한 전율, 응고된 긴장, 흐릿한 미소, 깜빡임, 꿈, 물렁한 모양과 같은 것들이다.[29] 질료의 변화하는 구조는 파괴되기 쉽고 충동적으로 변형되므로, 아버지가 말하는 어두운 데미우르고스는 이러한 특성을 활용한다. 이와 같은 두 번째 창조에는 내구성이 있거나 견고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이 미완성 상태이고 우발적이며 한 순간에만 유효하다. 몸짓은 따로따로 분절되고 신체 기관들은 단일 부위를 형성하지 않는다.[30] 여기에는 종이반죽, 색종이, 뱃밥과 톱밥 같은 대상을 향한 경향이 존재한다. 순간적이고 분해될 수 있는 모든 것들에서 질료가 가진 복슬거리는 털과 구멍들의 성질을 분명히 볼 수 있음에도, 데미우르고스는 이를 세계의 조화 속에 감추고자 한다. 생명의 주기적이고 조화로운 활동은 기체(基體)의 특성이 완전히 현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삐걱거림, 저항, 서투름, 곰 같은 어색함, 그리고 힘겨운 노력이다.[31] 그러므로 슐츠의 글이 갖는 주요 구성 요소는 오감이 합쳐지고 원시적 감각기관의 반죽 덩어리로 뒤섞인 감도에 대한 공감각적 총배설강cloaca이며 졸졸 흐르는 것에 대한 은유학이다. 슐츠는 우글거리는 텍스트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흥미롭게도 슐츠의 작품에서 필리다적인 모티브는 비관주의나 불안으로부터 자유롭다. 슐츠는 자신의 시적 문체에 어울리는 자신의 어두운 데미우르고스를 충분히 즐기고 있다. 여기엔 우다드의 《점액질 동역학》에서 보이는 흥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우다드가 디드로와 마찬가지로 같은 '마법화된 유물론enchanted materialism'[32]의 노선을 추구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변적 실재론자인 벤 우다드는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두려움과 비관적인 감정을 갖는 경향이 있고, 그렇기에 그의 접근방식은 기본적으로 인간중심적이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다.

 

안톤 블라디슬라보비치 잔코프스키 Антон Заньковский, Anton Vladislavovich Zankovsky는 신학자이자 사변적 BDSM 리얼리즘의 맥락에서 꽃과 인간의 성행위 탐구자로, 점액과 주술사와 불안장애 존재론을 연구한다.
역자 강현은 독립연구자로, 주요 분야는 일본과 한국의 서브컬처에 대한 문화연구다. 공포와 괴이를 통한 사상과 비평들에 관심이 있다.
역자 김종현은 경제학 석사 취득 후 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Pnyx)에 연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마르크스경제학과 비주류화폐이론을 공부하고 있고 다양한 사회과학 분야의 글을 번역하는 데에 참여했다. <그리스 채무위기와 시리자의 부상>, <팬데믹 이후 세계경제> (책갈피)등의 출판물에 공역자로 참가한 바 있다.

 


[1] 역자주 ─ 일본 근대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마사오카 시키(1867-1902)가 죽기 직전에 쓴 마지막 하이쿠로 알려졌다. 죽기 전까지 폐병을 심하게 앓다가 죽었는데 그 심정을 담은 하이쿠다. 민간에서 기관지에 좋은 약재로 알려진 수세미가 피었지만 폐병(가래)에 씨름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하구에 쓰인 불(佛)은 여러 의미를 가지는데, 첫 번째로는 가래가 낀 자신의 기관지를 일컫는 후불(喉佛)이며, 두 번째로 생명이 꺼져가는 자신의 모습이 이미 죽은 사자(佛, ほとけ)를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구원과 내세를 기대하며 미륵불(後佛)을 찾는 의미기도 하다.

 

[2] Plutarch (1936), Moralia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v. V, p.119 123.  (참조 링크)

 

[3] 러시아의 번역가이자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The Guide》의 주석가로 알려진 미하일 슈나이더에 따르면 마이모니데스가 여성을 사탄, 죽음의 천사, 잘못된 동기이자 보편적 악의 근원으로서 질료와 결여의 상징이라고 보았다고 한다. (Maimonides, The Guide, Gesharim, 2010)

 

[4] Tertullian (1922), Concerning the Resurrection of the Flesh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p.3 다음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 있다. (링크), (역자주-이와 비슷한 대목을 다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떼르뚤리아누스, 《그리스도의 육신론》, 분도출판사, 1994, p.113, 7절)

 

[5] Ibid., p.19–20

 

[6] 역자주 ─ 실재적 예술을 위한 협회Association of Real Art, 1920~1930년대 러시아 미래파로 구성된 전위 예술 단체이다.

 

[7] 레오니드 리파브스키, 《공포의 연구 Исследование ужаса(An Investigation of Horror)》, 로고스 저널 vol.3 no.4, 1993

 

[8] Ibid., p.80–81

 

[9]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9, p.448 제12권 29장

 

[10] Ibid.

 

[11] Ibid.

 

[12] lbid., p.457. 제13권 3장 (lbid., p.371), 의미전달을 위해 번역 수정

 

[13] lbid., p.461. 제13권 8장 (Ibid., p.374), 의미전달을 위해 번역 수정

 

[14] lbid., p.416-417. 제12권 6-7장 (Ibid., p.335–337), 의미전달을 위해 번역 수정

 

[15] 리파브스키Lipavky, Ibid., p.82

 

[16] Ibid.

 

[17] Ibid., p.81

 

[18] Ibid., p.82–83

 

[19] Ibid., p.83

 

[20] Ibid., p.85

 

[21] 벤 우다드, 《점액질 동역학: 발생, 돌연변이, 생명의 오싹함Slime Dynamics:Generation, Mutation, and the Creep of Life》, Zero Books, 2012

 

[22] Ibid.

 

[23] 리파브스키, Ibid., p.85

 

[24] 장 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2009, p.976-977

 

[25] lbid, p.970

 

[26]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1, p.782

 

[27] 올레크 보스코보이니코프Oleg Voskobojnikov, 《천년 왕국. 서양 기독교 문화의 고찰. 300-1300The Thousand-year Kingdom. Review of the Western Christian Culture. 300-1300》, Moscow, 2014, p.372

 

[28]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읽기》, 부크크, 2020, p.74 (Aristotle, Physics, (링크), part 9).

 

[29] 브루노 슐츠, 《브루노 슐츠 작품집》, 을유문화사, 2013, p.44

 

[30] 역자주─"그들의 성격은 단순하지. 가끔은 하나의 몸짓, 하나의 단어만을 위해서도 우리는 공들여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할 거다. (…) 그 피조물이 사람이라면 예를 들어 하나의 윤곽만을, 하나의 손, 하나의 다리, 사지 중에서 제 역할을 다 하는 데 필요한 것 하나만을 주는 거지." lbid, p.47

 

[31] Ibid. p.47–48

 

[32] 엘리자베스 드 퐁트네Elisabeth De Fontenay, 《디드로 혹은 마법화된 유물론Diderot ou le materialisme enchanté》, Grasset,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