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변死變적 실재론, 벤 우다드의 암흑 생기론 해제

"때때로 생명은 지복이라기보다는 공포로서 경험되고,

잠재적인 것의 충만함이라기보다는 철저히 의미 없는 공백으로도 경험된다"

-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위대한 가문이라니. 그저 종양 덩어리에 불과한 것을.

제멋대로 수를 불리고, 무리를 짓고, 살아가다, 죽겠지.

언젠가 별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필연의 때가 오면, 언젠가 잠들어 있던 옛것들이 다시 깨어나면,

이 연약한 대지의 껍질을 깨고 다시 부화하면, 우리의 필연적인 종말은 찾아오는 것이다.

(…) 파멸이 우리 가문에 닥쳤다" 

- 게임 '다키스트 던전' 중

 

 

  17세기에 나타나 생명 활동에 대한 기계론과 물리주의적 환원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던 생기론이 현대 사상에서 다시 출현하고 있다. 생기론은 생명이 항상 단순한 물질적 구성과 운동으로 완전히 해명되지 않는 잉여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반동 사상이었다.[1] 그 잉여적 측면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기론자들끼리도 의견이 달랐지만 생명이란 현상을 특별하게 생각했음은 분명했다. 현대 사상에서 생기론이 재소환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생명에 대한 인간중심적 지도를 다시 그리고자 하는 데 생기론이 주장했던 이 잉여적 측면이 신선한 통찰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새롭게 소환되는 생기론은 죽은 사물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활력으로 충만하게 하는 생명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벤 우다드Ben Woodard[2]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그림자가 소용돌이치는 생기론, 암흑 생기론Dark Vitalism을 제시한다. 

 

  우다드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자신의 생기론에 드리운 '암흑'을 설명한다. 첫 번째로 자연의 원인은 자연의 방대함과 시간의 두터움에 의해 인간인 우리에게 완전히 파악될 수 없기에 어둡다. 두 번째로 인간은 우발적으로 생겨났으며, 스스로 부여한 의미 외에는 어떤 본래적 의미도 없고 궁극적으로 필멸하기 때문에 어둡다. 세 번째로 자연의 파괴성은 우리에게 친화적이지 않으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인간-현상학적 존재는 미학적 차원에서 어두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3] 인지적 한계 지점에서 마주하는 어둠이란 불분명함[4]을 우리의 외부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생명 내부에서 발견하는 시도를 통해서 인간이란 특권적인 생명의 형상과 존재론적 경계가 녹아내리며 죽음과 뒤섞여 질척거리는 생명의 본래 모습인 점액질로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생명 너머의 생명(life-beyond-life) 혹은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생명을 강조하는 우다드의 암흑 생기론은 다른 사변적 실재론자들뿐만 아니라 독일 철학자 셸링의 자연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셸링에게 있어 주체와 객체의 이항대립으로 경험되는 상대적인 경험 세계와 유한한 존재자는 '자연'이라는 절대적인 근거에 기반한다. 그러나 절대적 근거로서의 자연은 그 자체로 드러나지 않으며 항상 우리가 경험하는 과정적 산물 속에서 부분적으로만 드러날 뿐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 조건 지어지지 않은 무한자(the Unconditioned) 즉 기반 없는 기반(the ungrounded ground)이기에, 이를 기반으로 생성되는 세계는 무한한 변화 과정 속에 놓여 있게 되며 이를 통해 주체와 객체, 유기물과 비유기물, 필연과 우연 등 이항대립이 극복된다.[5] 이는 바꿔 말하면, 존재의 개별화는 힘과 흐름이 물성으로 드러나는 것이며 개별적 존재는 힘의 일시적 정지 혹은 둔화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6]

 

 

holding hands, Nathaniel Benjamin, 2015, Etching.

 

  우다드에게서 생기론뿐만 아니라 그에 드리운 암흑도 또한 셸링으로부터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셸링이 독자적인 자연철학을 전개하던 당시에도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면서 제기했던 자유의지 안에 내포된 자유의지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악에 대한 정향성, 즉 "부정적인, 근원적인 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일면적 실재론에 대한 지적[7]이 암흑의 정체다. 우다드는 이 부정적 힘을 강조함으로써 일부 사변적 실재론에서 나타나는 생명을 객체들을 다시 인간중심적 영역으로 다시 불러들이거나 창조, 성장과 같은 생명의 밝고 긍정적인 일면만을 강조하는 일부 사변적 실재론들의 시도들을 "인본주의적 낙관주의"[8]라 부르며 비판하고자 한다. 

 

  그런데 우다드의 이러한 비판의 내용은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다. 그가 저작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정신분석학에서의 '죽음충동'과 지젝이 논했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는 분명 우다드의 암흑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지젝은 《나눌 수 없는 잔여The Indivisible Remainder》(1996)에서 셸링의 신비주의적 관념론을 재해석하며 탈관념론-새로운 유물론자로 읽어내고자 시도하는데[9], 나아가 셸링의 자연(지반 없는 지반)을 라캉의 실재계에 대입하고자 한다. 삶과 세계에 대한 고찰로서의 학문으로 셸링이 주창한 '긍정철학'은 세계의 실존 이유에 대해 탐구하며, "실존은 사유의 체계 속에서 결코 해명되지 않으며 사유의 영역 너머에서 제시되어야 하고 경험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10]는 점에서 실재계와 의미적으로 상통하는 점이 있어 보이기에 이런 지젝의 시도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다드의 생기론이 지젝의 정신분석학적 논의와 유사성을 띠더라도 중요한 점은 현대사상계에서 이뤄지는 신유물론과 사변적 실재론 논의에서 죽음과 변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의도와 그로 인해 빚어지는 효과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다드가 《점액질 동역학Slime Dynamics》에서 '생명'을 통해 예외적이고 특권적이라 여겨지던 인간이란 신체와 그 경계를 해체했다면 이어지는 《지반 없는 지구에 관하여 On An Ungrounded Earth》에서는 생명이라는 해체의 원리 그 자체를 탐구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작업은 상보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전자가 수평적인 해체라면 후자는 수직적 해체에 해당한다. 인간의 특권적 위치가 녹아내려 흐릿해졌다면 우다드가 보기엔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중심주의(란 의심을 갖는) 사유들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정치성에도 '구멍을 내어'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지구에 대한 사유가 시급한 이유는 "우리가 기어 다니는 혼원구는 특히 지구가 우리의 물질적, 문화적, 정신적 존재의 모든 측면을 규정해 왔기 때문"[11]이며, 우리 존재는 지구 바깥에서 손쉽게 새로운 착취적 대상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직면하는 숙명─'우리(의 존재와 사유)는 지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새로운 지구철학을 주창하는 우다드의 '지구'에 대한 탐구에서 셸링뿐만 아니라 유진 새커와 레자 네가레스타니, 이언 해밀턴 그랜트 등 비관주의적 성향으로 구분되는 철학의 영향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중에서 신비주의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사변적 실재론을 펼치는 새커는 책 《이 우주의 먼지 속에서》에서 우주적 관점을 통해 인간이 전유하는 '지구'와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사유한다.[12]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와 지구의 근간이 되는 지반은 스스로의 지반을 갖지 않고 그렇기에 불안정하지만 우리는 이를 쉽게 망각한다.[13] 우리가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던 지반이 실제로는 무지반에 근거한다는 사실에 입각한 새커의 우주적 존재론이 지구에 대한 인간중심적 상관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는 지점에서 우다드의 기획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새커의 우주론적 관점이 세계와 지구 그 사이의 경계 내부에서 발견되는 초월적 논리('행성')를 경유하여 다시 인간적 시좌로 되돌아오지만[14], 우다드는 한 발 더 나아가 새커가 잉여로 포착되는 '행성'을 도출하는 과정을 역전시켜 《점액질》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존재의 출발점에 '근거 없는 근거'로서의 행성을 놓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와 지구의 이분법은 흐려지고 '자연'이자 요동치는 힘과 빠져나가는 구멍들로 나타나는 행성이 나타난다. "지구는 극적인 외재화(우주적 확장)를 통해, 또는 미생물, 바이로이드 등을 통해, 공포스러운 내재화의 심화를 통해 지구에 대한 우리의 개념에서 항상 자기 외재화된다."[15]

 

  암흑의 생기로 들끓는 지구를 발견하더라도 우다드에게 이것이 인간 존재의 비관적 종말이나 허무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지반 없는 지구》의 정치적 함의는 여기서 출발한다. 새커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 즉 자본세로 일컬어지는 자본주의 체계에 의해 포섭되고 그 '생기'가 부분적 제한되어 개발되고 착취되는 '행성'으로부터 죽음과 해체, 파괴의 힘을 개방시킴으로써 영속화하는 자본주의적 낙관주의─일면적 실재론─삶과 죽음이란 '순환적 우회'의 굴레를 파괴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창조적 파괴'를 독점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창조적 에너지를 자가생산에 투입하는 자본주의란 영원한 시스템으로부터 창조적 파괴의 진정한 파괴를 일으켜 자본주의적 논리에 의해 스스로 내파되는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주론적 구도에 대입한다면 자본주의 시스템은 태양계(solar system)에서 태양과 지구가 맺어온 관계─태양 경제라 할 수 있으며 이를 정지시키는 힘은 다름 아닌 태양 그 자체가 꺼지고 차갑게 식어 '검은 태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검은 태양은 태양이 썩어 지구로 떨어지기를 바라는 희망이고, 어두운 지구는 지구가 구멍 뚫린 모나드처럼 태양을 향해 돌진하여 파괴되기를 바라는 꿈이다."[16]

 

  그런데 이와 같은 우다드의 가속주의적 목표는 정치적 운동으로 조직되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암흑 생기론이 그랬듯이 '암흑'이란 그림자의 형태로 간접적으로 제시된다. 그는 현대 사상에서 존재론을 바로 정치에 다시 도입하는 방식에 대해 회의적이며 오히려 존재론적인 이해보다 미학적 이해, 즉 "생태학적 개입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지구에 대한 착취적이고 신화적인 허구화의 역사와 관련된 자연의 미학"이 더욱 문제적이라 보기 때문에 암흑 생기론에 기반한 '반미학'을 통해 미학적-인식론적 차원에서 이를 갱신하고자 한다.[17] 그렇기에 《지구》에서 우다드가 다른 신유물론 철학 혹은 사변적 실재론 철학에 대해 비판하는 지점도 그것들에서 발견되는 인식론적 한계에 집중되어 있다. 

 

 

객체에 구멍내기, 어둠의 힘을 통한 사변적 실재론 비판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셸링을 따르는 우다드에게 지반 없는 지반(생기, 자연, 생명, 힘)은 초월적이지만 경험적으로만 드러나며, 따라서 힘은 시공간성을 통해서 표현된다. 시공간성은 곧 힘과 흐름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지반화와 탈지반화, 내재화와 외재화가 동시에 이뤄지는 역학의 무대다. 게다가 '실재는 외재성과 연결되어 있으며, 외재성은 형식적으로만 정신의 내재성과 분리되어 있지 질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셸링의 이해를 단서로 삼으며 다른 사변적 철학들에 대한 비판을 전개한다. 

 

  우다드가 보기에 상관주의를 비판하며 객체를 복권시키고자 하는 사변적・실재론적・유물론적 현대철학들(그의 표현에 따르면 생각하는 '나'에서 생각하는 '그것'으로의 전환을 꾀하는 철학)이 처한 문제는 "덜 현실적이거나 덜 물질적인 것들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18] 그리고 그런 모호한 태도로 인해 "상하좌우, 심지어 내부와 외부라는 공간성 자체가 인간 중심적인 유령을 품고" 있게 되는 빈틈을 보여, 인간중심적 이항구도를 해체하려고 하지만 다시금 뒷문으로 인간중심주의를 들여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그런 철학이 야기시키는 문제는 각각 객체의 문제, 시공간성의 문제, 매혹의 문제 그리고 생성과 변화의 문제라는 4가지 주제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객체의 문제는 기존 신유물론 혹은 신실재론에서 제시하는 객체가 시간과 공간의 절대적인(혹은 평면적인) 구조를 전제한다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객체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관계적 능력과 관계성의 역사가 모호해지면서 객체에 내재한 생명의 어두움, 즉 기묘함이 증대되어 드러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우다드는 이러한 객체의 기묘함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교란적 존재 양상을 '외계-유물alien-relic'로 제시한다. 외계인, 외계 아티팩트, 유물 등 이러한 존재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 이상한 객체다. 기본적으로 모든 객체는 그 존재만으로도 "문자 그대로 수평적 방식으로 공간적 방해"를 일으키지만 외계 아티팩트와 같은 "매혹과 감응에 절여진 객체"에는 "수직적 깊이도 존재"한다. 기이한 유물은 불가능한 구조나 과도한 연대측정으로 인해 연대기적 미스터리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시간적으로 기묘하다. 그리고 이상한 시간성은 객체가 있던 위치나 그것을 다루는 작동법도 또한 불확실하게 만들어 우리에게 오파츠(Out-Of-Place-Artifacts)의 미스터리를 만든다는 점에서 공간적으로도 기묘하다.[19] 그렇기에 유물은 시간과 공간을 모두를 초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왜곡하는 방식으로 시공간에 분명하게 묶여 있다. 

 

 

Alien relic digging, 2022, used Midjourney

 

  이러한 유물의 특징은 자연스럽게 시공간성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진다. 퀭텡 메이야수는 《유한성 이후》에서 원화석과 선조성을 통해 인류보다 아득히 앞서며 동시에 침묵하는 실재에 접근할 수 없는 존재물을 제시하며 인간 우선주의와 사유 우선주의의 상관주의 철학을 비판한다. 그러나 우다드가 보기에 선조성은 시간을 인간중심적 시간과 우주론적 시간으로 분리하는데, 메이야수에게 후자의 시간이 사유를 통해 파악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되며 선조적 영역이 "직관되기를 '기다리는' 저장소"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즉,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의 경험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 연구되거나 발굴될 때만 가치가 있다는 관점"이란 점에서 메이야수의 원화석도 동일한 시간의 함정에 빠지고 있다고 본다. 

 

  우다드는 메이야수뿐만 아니라 라투르의 파스퇴르화(네트워크화 되기 이전과 이후의 시간)도 포함해서 이러한 신실재론에서 나타나는 현상학적 시간관을 크로노스와 아이온으로 이해되는 들뢰즈적 시간관으로 묶어낸다. 

 

  들뢰즈적 시간은 존재론적 시간 체제 내에서 크로노스와 아이온이란 두 시간을 가로지르는 반면, 기이한 객체의 시간은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두 개의 측정경험", 즉 심원한 시간the deep time과 범용한 시간the quotidian time을 가로지르는 것이라 설명한다.[20] 외계 고고학Xenoarchaeology에서 외계 유물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비인간적 지능과 존재의 가능성과 문명의 종말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듯이, 심원한 시간은 침묵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범용한 시간을 연루시킨다. 

 

  그렇다면 우다드에게 객체에 있어 매혹의 문제란 무엇일까. 우선 매혹allure이란 하먼이 물러나 있는 실재 객체를 경험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개념이다. 매혹은 "실재객체와 접근 가능한 표면 성질과의 융합"이면서 "사물의 통일성과 (특이한 성질의) 다수성 사이의 친밀한 결속이 다소 부분적으로 해체되는 특별하고 간헐적인 경험이다."[21] 즉 감각성질에서 '융합'과 '해체'를 함께 경험함으로써 실재객체에 접근하는 것이 '매혹'인 것이다. 이러한 매혹의 성질을 통해 객체에 대한 경험은 엄밀한 사고적 논증이 아니라 인식과 감각에 대한 미학적 논의의 성질을 띠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융합과 해체는 누구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일까. 적어도 실재객체가 실재성질과 감각성질을 포용한다는 하먼의 주장을 따른다면 실재객체 스스로에 의해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다드가 보기엔 실재객체는 그저 물러나고 포용하기만 하지 않는다. 외계-유물이 가지는 '깊이'에는 실재객체와 마찬가지로 그 본질은 물러나며 우리가 접근할 수 없고 또한 봉인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내재성을 가지고 바깥면에 구멍을 낸다."[22] 유물은 스스로 개방한 구멍을 통해서 에너지, 객체, 흐름을 내부로 끌어들이거나 외부로 누출시키고, 그렇게 경험되는 것은 객체에 대해 우리가 사로잡히는 '매혹'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능동적 객체가 우리를 사로잡는 '현혹(fascination)'이기도 하다. 

 

  이렇게 현혹하는 존재물, 외계 아티팩트의 대표적 예시를 우다드는 SF와 호러 작품들의 이미지에서 끌어온다. 라투르의 블랙박스 그리고 하먼의 검은 수정의 이미지를 재치있게 비틀어 제시하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속 모노리스와 영화 《헬레이저》와 그 원작에서 묘사되는 검정 큐브(비탄의 배열장치)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현혹하는 객체다. 작품 속 모노리스는 지적 종족의 진화를 촉진시키기 위한 전(全)우주적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의 진행을 위해 모노리스는 인류에게 쉽게 발견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을 왜곡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게 인류와 무사히 접촉하면 인류의 종적 도약을 일으킨다. 이 종적 도약은 일종의 종적 '자멸'을 야기한다고 말할 수 있다. 모노리스는 선조적 존재들이 지속적 초월(=멸종)을 기획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어두운 시간(선조적 시간)과 현재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어두운 미래시간을 포함해서 그 간극을 극복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시간적 왜곡을 나타낸다.[23]

 

Monolithe, 2022, used Midjourney

 

  모노리스가 우리에게 초월을 야기시키는─에너지를 주입한다고 볼 수 있는 점에서 외부지향적이라고 한다면 《헬레이저》에서 퍼즐을 맞춘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는 큐브 상자는 내부지향적인 객체라고 할 수 있다. 검은 큐브는 모노리스와 달리 철저하게 이기적이며 내면의 진실성을 가지고서 우리에게 공격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사도마조히즘적 공간 안에서 공격성은 쾌락과 구분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얻고자 스스로 현혹되기도 한다. 또한 검은 큐브가 현실 세계와 지옥 사이의 틈새를 여는 게이트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지옥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완전히 무시된다는 점에서 시공간적 왜곡을 나타낸다. 

 

  외계 유물은 그것이 빚어내는 시간적 매혹, 즉 "비인간적이고 포스트휴먼적인 시간 척도 내에서 객체에 대한 비인간적인 현혹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하면 다른 신실재론이나 신유물론이 논하는 객체의 매혹은 너무 인간적인 언어로만 구성되어 있거나 또는 너무 인간적인 시간대를 상정하는 한계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달리 말해 우다드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 즉 객체에게 내재하는 생명력을 인간적 사유로 제약한다는 문제에 다름 아니다. 정리하자면 매혹의 문제는 객체의 생명력이 갖는 힘에 이끌리고 영향을 받고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일어나는 문제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객체가 가진 생명력 그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와 관계맺기에서도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생명력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는 생명에서의 생성과 변화의 문제로 이어진다. 앞서 존재자를 "힘의 일시적 정지 혹은 둔화"로 파악했듯이 우다드에게 생성과 변화는 곧 시간성과 이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라투르의 사물은 다양한 행위로 연결되어 시간을 역전시키고 있으며, 하먼의 객체는 진공 봉인되어 시간이 사물의 표면적 성질만을 조작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객체로부터 나타나는 "생성에 대한 문제를 회피"한다고 본다. 그렇다고 생성하는 힘에 대해서 다루는 철학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우다드는 자신과 비슷하게 생기론을 방법론으로 삼는 제인 베넷의 신유물론에 매우 비판적이다. 

 

  베넷의 생기론적 유물론에서 "생기를 불어넣는, 어떠한 행위를 하는, 극적이고 미묘한 효과를 생산해 내는, 활기 없는 사물들의 기이한 능력"으로서 제시되는 물질적 생기, 사물 권력은 얼핏 보기에 우다드의 생명 혹은 자연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우다드가 보기에 베넷의 물질성도 또한 인간을 특권적 지위로 위치 짓고 있다는 혐의가 있다.[24]

 

  생기론적 유물론에서 "인간은 자연이 아닌 인간이라는 범주에 속한다는 점에서 자연의 외-부에 있지만 그 범주에 머무르지 않고 자연이라는 범주로 나아가기에 자연의 외-부가 아닌" 것으로 파악한다.[25] 우다드에게는 인간이건 물질이건 모두 자연에 발생하는 것이기에─"외재성은 형식적으로만 정신의 내재성과 분리"되기 때문에─이는 불필요한 분리를 통해 양가성을 부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변적 철학 중 신들뢰즈주의가 잠재성에 기대면서 사유를 자연으로부터 분리하는 경향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모호하"며 "시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없거나 객체를 파악하는 것처럼 '생성' 자체도 파악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26]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과정적 사변철학들이 회색지대에 머무르고자 하는 이유는 "형식화, 영속성, (과정, 흐름, 힘 등과) 상충하는 다른 발생을 설명하지 않고 생기, 역동성, 생성을 다룰 수 있"는 편의성이 있기 때문이다. 

 

 

An iron mine and miners working, J. Heath, 1813, Etching.

 

  이를 대표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베넷의 '광물화' 개념이다. 인체의 뼈는 살을 구성하는 생기의 일부가 '광물화'하면서 만들어진 것인데, 이런 살과 다른 물질적 개체화가 결과적으로 정신을 가진 고도의 유기체 인간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도는 인간과 물질의 구분을 남겨두면서 생기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지닌 창조적이면서도 완전히 인간만은 아닌 힘"[27]으로 파악하여 횡단을 모색하지만, 우다드가 보기에 물질과 정신을 각자의 생명(력)으로 몰아넣어 대비시키는 것은 생명의 자기변별적 성질의 측면임을 무시하는 것이다. 즉, "생각하는 뇌의 능력은 광물화 과정과 존재론적으로 다를 수 없다."[28] 세계에서 존재가 계층화되어 드러나는 것은 잠재성의 내재화 혹은 외재화하는 성질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생기를 초월성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고 본 셸링의 자연-긍정철학이 드러내는 무한한 무지반성은 "구조적으로 관념적인 들뢰즈의 잠재성에서 발견되는 무한한 가능성과 동일시될 수 없고 동일시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29] 

 

  우다드는 정신과 물질이 분리된 것처럼 여기는 접근이 사실은 유기적인 것이 무기적인 것으로부터 특권적 위치를 점하고자 존재론적 격리 시도라고 파악한다. 이런 경향을 공유하는 베넷을 비롯한 다른 실재론자들에 대해 '들뢰즈의 암묵적 동맹'이라 비판한다.[30] 또한 들뢰즈주의의 지적 흐름에서 사물 혹은 존재에 내재한 생명에 순수한 내재성(미셸 앙리), 기쁨(들뢰즈, 스피노자), 의지와 힘(니체, 쇼펜하우어)과 같은 초월성을 주입함으로써 생명에 추가적인 자격을 부여하고 그렇게 될 때 능동적-친화적 생명으로 고정시키는 고치화cocooning의 작업은 생명의 우연성, 창조력, 파괴력을 제한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끔찍한 지구와 함께 죽어가기 혹은 죽은 행성의 시체와 함께 머물기 

 

  지금까지 우다드의 암흑 생기론이 전개하는 철학과 비판 전부를 다루지 못했지만 거칠게 살펴보았다. 물론 암흑 생기론도 전개된 이후 다른 사변적 실재론자들에게 다양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안톤 잔코프스키의 글 <점액질의 존재론적 전회 The ontological revolution of slime>에서는 우다드가 보여주는 사변성-공포와 현혹은 자신이 비판하는 인간중심적 정동에 강하게 붙들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거나, 크리스토퍼 비탈의 글 <지반 없는 진액에 관하여 On an Ungrounded Ooze>에서는 우다드가 택한 신셸링주의적 접근이 결국 자신이 비판적인 들뢰즈의 잠재성 철학과 크게 구분되지 않으며 나아가 신스피노자주의의 영역 안에서 함께 묶일 수 있다는 비판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여기서는 자세히 따져볼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우다드의 암흑 생기론이 우리에게 흥미로운 지점은 곧 어둠을 진정으로 끌어안으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 정도의 온건한 공격성을 철학적 백신으로 소모하는 작업들이나 공격성을 거세한 객체들과 성급하게 낙관적 공동체 정치를 구성하고자 하는 작업들에 대해서 우다드의 어둠과 반미학은 제 역할을 해낸다. 

 

  도나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놀라울 정도로 우다드와 반대항을 이룬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부정적인 것the negative(지젝)에 머물기tarrying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러일으키다'란 어원에서 출발하는 '트러블'과 함께staying하고자 한다. 그녀에게 불가피한 죽음은 인간을 비생명과 죽음을 향해가는 점액질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품어낼 수 있는 거름homus으로 이해되고, 땅(지반)은 흔들리고 무너지고 없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이종들과 그것들의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형태의 삶을 가꿔온 터전이기도 하다. 비인간적 크리처(Cthulhu)는 기괴한 존재와의 불가피한 조우라는 공-멸의 윤리가 아니라 쑬루세(Chthulucene)[31]를 함께 만들어가는 공-산의 윤리로 이뤄진 시간이다. 

 

  해러웨이는 세 가지 생태학을 참조한 듯, 인간세와 자본세의 사유만으로는 우리가 현재 마주한 전지구적 위기를 다루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쑬루세의 사유-행동을 통해서만 헤쳐나갈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인류의 흔적은 끊임없을 멸종을 암시하는 유물이 아니라 함께 세상을 만들어나가며 이어질 종을 초월한 친척(과 그 후손-친척)이다. 물론 해러웨이의 실천을 강조하며 그 실천을 가능케 하기 위한 사유적 밑그림은 충분히 의미가 있는 바이다. 그러나 우다드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중충한 현실을 뒷켠으로 밀어놓고 지나치게 희망적인 이야기만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다드가 사로잡힌 멜랑콜리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단순한 냉소주의가 아니다. 그의 철학은 "어떤 유토피아주의에 무거운 정동적 무게"를 얹는 반미학적 시도이며, 비관주의가 제공하는 "특정한 형태의 유용한 명확성"을 통해 '일종의 실용주의'를 달성하고자 한다. 그는 반드시 세상이 나쁜 방향으로 간다는 걸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우리가 공허를 향해가고 있음은 분명하고 그 와중에 우리는 더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문제는 생명 그 자체가 빚어내는 불균형과 착취의 시스템을 외면하거나 우회하는 이해로는 잘못된 실천과 수행의 방법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세계에서 생명은 "경쟁하는 소모자consumer들끼리의 게임이며, 이 경쟁은 인간의 기술 조작 능력에 의해 우리에게 유리하게 고정되어 있다."[32]

 

 

Planet destruction, 2022, used Midjourney.

 

  그렇기에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생명의 어둠을 통해 가속주의를 기획하는 우다드에게 자본주의는 전제이자 시작점이다. 이미 인간은 '자본주의에 흠뻑 젖은 존재'란 사실, 자본세란 용어가 상기하듯이 지구 또한 자본주의의 기반grund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얽힌 관계들에서 단지 하나의 플레이어'[33]로 치부하기 어렵다. "현대 자본주의에 물든 존재를 대체할 적절한 비인간적 주체"를 제시하는 해결책은 "친환경적 사고와 윤리에 대한 순진한 시도와 점점 더 구별하기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지구를 평범한 근원arche으로 제시하고 자본주의 에너지의 경이로운 가역성"을 재생산하는 데 복역한다.[34] 그런 점에서 해러웨이의 친족과 공-산이란 개념은 지나치게 생명의 밝은 부분만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자본주의적 생명(또는 자본주의란 생명의 양상)에 대응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우다드에게는 성립하지 않는다. 

 

  우다드가 요청하는 것은 "희망적인 붕대로 지구를 장식"하기보다 지구 혹은 생명이 가지는 근본적인 끔찍함을 직시하고 그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암울한 생태-정치적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지구에 관해 우리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즉 지구가 우리를 위해 얼마나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가"[35]

 


[1] 에른스트 마이어, 《이것이 생물학이다》, 고인석 역, 바다출판사(2016), p.31 

 

[2] [소개] 독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 현재 베를린 문화탐구연구소(ICI) 소속 연구원이며 멜버른 대륙철학대학에서 생명과학사, 철학, 정치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다. 비평, 자연철학, 생명과학철학, 역사학, 탈식민지 생물학을 전공했다. 

 

[3] Ben Woodard, SD, p.6 

 

[4] "어떤 경험의 특징이 경험자에게 그것의 본성에 관한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인 이해를 부여하지 않을 경우, 그러한 경험의 특징을 '어둡다'고 부르자… 암흑 현상학은 그러므로 직관-초월적이다…따라서 어두운 측면을 향한 우리의 접근은 이론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인간이 관찰할 수 없는 우주를 향한 우리의 접근만큼 '매개'된 것이다." (데이비드 로덴 《암흑 현상학》, 스티븐 샤비로, 《탈인지》 중 재인용, 안호성 역, 갈무리(2022), p.296) 

 

[5] Yuk Hui, Recursivity and Contingency, Rowman & Littlefield(2019), p.68 

 

[6] Ben Woodard, UE, p.28 

 

[7] 이광모, <관념론적 자유의 한계와 '다 밝혀질 수 없는 잔여'>, 《칸트연구 제31집》(2013), 한국칸트학회, p.61 

 

[8] Ben Woodard, UE, p.94 

 

[9] 물론 지젝이 유물론자 셸링을 이야기할 때의 '유물론'은 그 자신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해당한다. 관념론적 유산을 포함하고자 하는 이 독자적 유물론에 대해 신유물론 진영에서는 물질 없는 유물론 혹은 유물론의 탈을 쓴 관념론이란 비판한다. 그런 점에서 셸링의 철학을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사라지는 매개'로 파악하는 만큼 지젝의 유물론에 대한 지적 작업의 출발점에는 셸링이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문규민, 《신유물론 입문》, 두번째테제(2022), p.72-73 참조) 

 

[10] 이광모, <셸링의 '긍정철학'의 원리와 그 가능성>, 《헤겔연구》(2012), 한국헤겔학회, p.205 

 

[11] Ben Woodard, UE, p.3 

 

[12] 새커의 지구에 대한 우주적 관점은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 방식으로 이뤄진다. '세계'로 대표되는 인간이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에-대한-세계world-for-us', '지구'로 대표되는 앞서 인간 중심적 타자화에 저항하고 역으로 반격하는 '세계-자체world-in-itself', 마지막으로 '행성'으로 대표되는 우리가 경험할 수는 없지만 반격하는 세계를 통해 상상할 수는 있는 '우리-없는-세계world-without-us'다. (유진 새커,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 김태한 역, 필로소픽(2022), p.14) 

 

[13] "그러나 지반은 종종 불안정하고 갑자기 이동한다. (…) 그래서 모든 지반에는 그에 상응하는 지반 없음의 상태, 더 나은 표현으로는 무지반unground 상태가 존재한다." (같은 책, p.202) 

 

[14] "이 책은 어떤 의미로는 사유는 인간적이지 않다는 관념을 탐구한다. (…) 나는 공포를 인간적 세계에서의 인간적 두려움에 대해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에 관한 것으로 이해해 보자고 제안한다. (…) 이 책의 주장은 '공포'는 우리-없는-세계를 철학적으로 사유하려는 비철학적 시도라는 것이다." (같은 책, p.16-18) 

 

[15] Ben Woodard, UE, p.87 

 

[16] Ben Woodard, UE, p.92 

 

[17] "이런 점에서 《지반 없는 지구》는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반미학을 창조하려고 시도했다. 공포와 비인간적인 것과의 관계에 대한 저의 현혹은 존재론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 존재하는 인식론적, 미학적 간극을 강조하기 위한 미학적 선택이다. (…) 지나치게 어두운 미학은 단독으로 존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빠른 비해결책을 덮고 있는 미학적-철학적 모델을 깨뜨리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Ben Woodard, "Response by Ben Woodard, Terrestrial Melancholy and the Infinite Sadness", Society+Space, accessed 1/28/2014. 번역 및 강조는 인용자) 

 

[18] Ben Woodard, "Post-Deleuze? or New Materialisms, Post-Humanism, and Speculative Realism", Naughtthought, 2011.12.4. 

https://naughtthought.wordpress.com/2011/12/04/post-deleuze-or-new-materialisms-post-humanism-and-speculative-realism/ 

 

[19] "공간적으로 이상한 물체는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지만, 그 물체를 향해 움직이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그 물체를 알아보거나 그 물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외계 유물의 공간성이 기이하다는 것은 공간 자체를 끊임없이 파열하거나 구부리거나 뒤틀거나 관통하는, 공간에 대한 무례함이다", Ben Woodard, UE, p.51 

 

[20] Ben Woodard, UE, p.54 

 

[21] 그레이엄 하먼, 《쿼드러플 오브젝트》, 주대중 옮김, 현실문화(2019), p.186 

 

[22] Ben Woodard, UE, p.53 

 

[23] "The monoliths are objects that not only connect the now to abyssal time scales, but were also designed to address the disjunction between lived time and a realist sense of deep time, or, more precisely, future time.", Ben Woodard, UE, p.56 

 

[24] 이는 이언 보고스트가 제인 베넷에 대해 사물에 대한 이해가 '의인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수사적 측면에서 '너무나 인간중심적'이라는 비판과는 다른 맥락에서 인간중심적이라는 비판이다. (Ian Bogost, "IAN BOGOST: THE INTERBIEW", PHILOSOPHY IN A TIME OF ERROR, 2010.4.26. 번역: https://nanomat.tistory.com/1467

 

[25] 문규민, 《신유물론 입문》, 두번째테제, p.173-174 

 

[26]  Ben Woodard, "The twilight of becoming and process", Naughtthought, 2011.8.17. 

https://naughtthought.wordpress.com/2011/08/17/the-twilight-of-becoming-and-process/ 

 

[27]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현실문화, p.286 

 

[28] Ben Woodard, UE, p.63 

 

[29] Ben Woodard, UE, p.76 

 

[30] Ben Woodard, Against Deleuze's Joy, 《The Nonhuman Turn at the Century for 21st Century Studies》, University of Wisconsin-Milwakee, 2012.5. 

 

[31] 지하세地下世로도 번역되는 쑬루세가 "크툴루에서 철자와 발음이 달라진 것은 미국의 호러 작가 러브크래프트가 창조한 크툴루 신화와 구분하기 위해서인데, 해저 괴물 크툴루를 중심으로 하는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 여성 혐오와 인종 차별주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최유미 옮김, 마농지, p.8 각주 및 p.174 참조) 

 

[32] Ben Woodard, "Response by Ben Woodard, Terrestrial Melancholy and the Infinite Sadness", Society+Space, 2014.1.28

https://www.societyandspace.org/articles/on-an-ungrounded-earth-by-ben-woodard-5 

 

[33] 도나 해러웨이, 같은 책, p.88 

 

[34] Ben Woodard, 같은 곳. 

 

[35] Ben Woodard, 같은 곳.

 

 

참고문헌

 

Ben Woodard (2014) "Response by Ben Woodard, Terrestrial Melancholy and the Infinite Sadness", Society+Space 

── (2013), On An Ungrounded Earth, punctum books 

── (2012), Slime Dynamics, zero books 

── (2012), Against Deleuze's Joy: Vitalism beyond Affectionate Immanence 

── (2011) "The twilight of becoming and process", Naughtthought 

── (2011) "Post-Deleuze? or New Materialisms, Post-Humanism, and Speculative Realism", Naughtthought 

Yuk Hui (2019), Recursivity and Contingency, Rowman & Littlefield 

Christopher Vitale (2015), "On an Ungrounded Ooze: Dark Vitalism, Deleuze, and BenWoodard"s Philosophy of Radical Disgust, Decay, and Dissolution", Networkologies 

Ian Bogost (2010), "IAN BOGOST: THE INTERBIEW", PHILOSOPHY IN A TIME OF ERROR 

스티븐 샤비로 (2022), 탈인지: SF로 철학하기 그리고 아무도 아니지 않은 자로 있기, 안호성 옮김, 갈무리 

유진 새커 (2022),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 김태한 옮김, 필로소픽 

문규민 (2022), 신유물론 입문: 새로운 물질성과 횡단성, 두번째테제 

도나 해러웨이 (2021), 트러블과 함께하기, 최유미 옮김, 마농지 

제인 베넷 (2020), 생동하는 물질, 문성재 옮김, 현실문화 

그레이엄 하먼 (2019), 쿼드러플 오브젝트: 새로운 유물론과 사변적 실재론, 주대중 옮김, 현실문화 

에른스트 마이어 (2016), 이것이 생물학이다, 고인석 옮김, 바다출판사 

슬라예보 지젝 (2010), 나눌 수 없는 잔여, 이재환 옮김, 도서출판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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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준 (2021), 객체지향의 철학: 초객체와 네트워크 그리고 공생, 인문논총 제55집 

── (2021), 기후변화와 생태 위기 시대 인간의 존재역량, 인간연구 제44호 

이광모 (2013), 관념론적 자유의 한계와 '다 밝혀질 수 없는 잔여', 칸트연구 제31집 

── (2012), '긍정철학의 원리와 그 가능성, 헤겔연구 제32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