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질성과 시차

  자본주의적 시간은 폐허와 재건, 번영의 과정을 함축하는 땅의 시간이다. 이것은 하비의 자본순환 도식에서 건조환경 조성을 위한 구 건축물 및 지리환경의 파괴·재개발에 관한 언술이다.[1] 또한 자본이 토지 자연물을 사회체의 정박지로 재구축하는 시간에 대한 언술이다. 건조환경은 인간 생활자가 구조에 가깝게 인식하는 건축물의 총체다. 구조에 가까이 인식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건조환경은 생활자 개인이 경험하기 이전부터 이미 마련되어 있으므로 자연처럼 인지된다. 여기엔 건조환경이 그의 땅과 숨 쉰 긴 시간, 혹은 지역의 의미값이 건조환경으로 치환되는 현상이 포함된다. 인간 생활은 건축물로부터 탈주할 수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건조환경은 사용된다기보다 생활자를 제어한다. 건조환경은 유리된 시간선을 달리는 자본 구조다. 한 생활자가 넋 놓은 채 서 있고 주변인이 바쁘게 움직이며 세상/풍경이 바뀌는 연출적인 장면을 배치한다. 인간 생활자가 비로소 건조환경을 핍진하게 경험하는 시점은 그것이 공사장/폐허일 때, 재건될 때뿐이다. 건설 노동자는 그 유리된 시간선 속에 있다. 생성하는 쪽과 누리는 쪽 사이의 시차는 우리가 네트워크라 부르는 것의 성질이다. A가 a를 생성한 시간의 폭을 B가 누리는 것이 만남의 구도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시간은 폭을 단면으로 함축해 지층처럼 쌓아버리는 것이다.

 

  잉여가치는 이렇게 누리게 되는 요소 중 하나다. 자급 시스템에서 분업 사업장으로의 변화 이후, 자본은 생산과정을 함축하고 생산물에 덧바른다. 봉건제의 땅은 이 자본의 시차 만들기가 벌어지는 초기 공간이다. 지주의 토지는 수확물로써 소작의 생산과정을 함축한다. 소작 과정의 토지 개량 성과는 지대 책정 시점으로 이전·함축된다. 이어서 근대 국민국가의 땅은 다음 두 양식을 갖는다. 토지를 사유물로 전환시키는 근대의 장면이 있다. 자연물을 국토화하면서 발생하는 영토적 주권의 장면이 있다. 땅을 점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해가 드러나는 두 장면이다. 여기서 봉건적 토지와 다른 양상의 시차를 목격한다. 국토의 시차는 지역 각각에 흐르는 상이한 시간이 차등적 공간을 구성하는 과정으로 표현된다. 갈라진 땅에 흐르는 용암의 이미지를 상상한다. 국민국가의 자본은 지역 간 차등을 누빈다.

 

  공간의 시차는 정리한 바처럼 둘로 이해된다. 내부적 생산은 경제적 시차로, 땅이 출고하는 물품에 관한 틀이다. 외부적 표현은 미적 시차로, 땅이 생산하는 경관에 관한 틀이다. 물품 역시 표현으로서 외부에서 바라보는 땅의 이미지를 만든다. 경관 역시 생산으로서 관광 상품과 같이 경제 관계에 귀속된다. 이는 공간의 다원적인 요소를 보여줌과 동시에 모든 것을 초과하는 자본의 틀을 상기시킨다.

 

  네트워크야말로 시장이다. 우리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만남을 상상하지만, 그는 결국 생성-수집·생산-소비의 구도 위에 있다. 시차 만들기는 직전까지의 과정을 일축하면서 수집 시점, 소비 시점만을 남기고 이 구도를 덮는다. 멀게 돌아 이 글은 지역성에 관한 이야기다. 건조환경의 선택적 건축은 자본이 집중되는 도시와 집중되지 않는 도시를 나눈다. 지역성은 이러한 차등 관계로 인해 상대화된 공간의 표현양식이다. 지역성은 서로 다른 시간의 축적이다. 자본이 가/감속하는 시간은 서로 다른 경관을 생산한다. 공간이 시간을 축적하는 동시에 시간이 공간을 구성하는 관계다. 으레 지역성에 관한 연구들은 지방사 연구로 수렴된다.[2] 지방사를 추적하면 사례들과 실재들의 종합인 지역성이 걸러 나온다. 그건 공간을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방식과 같다. 공간을 구성 요소들의 총체로 파악하는 것이다. 시간에 따른 공간은 공간에 따른 시간과는 다르다. 우리는 시간적임이 아니라 시차적임을 이해하면서 지역성을 달리 보게 된다. 가령 공간으로 제어된 경험이 구술로써 현재화될 때, 그것은 청자의 시간과 치열하게 충돌한다. 이건 인간을 상회하는 체계다.

 

  국토를 균질화하자는 운동은 공간의 시차를 감소시키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주변부의 균형발전을 통한 탈중심을 도모하는 국토의 균질화는 바로 그 목표에서 지역성과 대립한다. 동일성과 차이는 국가화되어 있다. 봉건 군주와 국가 단위의 생명정치는 각각 다음 흐름을 보인다. 영주의 영지 관리하에 국지적인 노동자는 군주의 집합적 권능으로 응집된다. 그들은 동일성으로 노동한다. 근대국가의 생명 관리는 국가 기반물을 생산하는 노동자로서의 개인을 호출한다. 근대가 평등을 수단으로 개인을 균질화하면, 국가가 상대하는 추상적 개인은 스스로를 탈구시켜 경계 짓기 위해 모종의 정체성에 자신을 의탁하게 된다. 이는 국지적 거주 자연의 GDP로 추산되는 생산자적 정체성으로 귀결된다. 막연한 총체가 된 개인을 분류하는 주요한 체계가 경제적이기 때문이며, 이때 노동은 차이의 생산 자체다. 국가가 스스로를 비실체적인 총합으로 축소하며 행정상 자유를 배분하고, 노동 행위는 상상 차원과 현실에 걸친 자기(재)생산적 욕망으로 환원된다. 국가는 차이를 독려하고 차이를 종합한다.[3] 차이가 할당되므로 보편치로 누리는 인프라의 쾌적성이 소거되는 것이고, 즉 균질화는 끝내 자본의 체계에 정교하게 묶여 있다. 지역성의 대두는 국가의 상상적 통치 권능을 가시화한다.

 

  사센의 세계도시[4]는 차이를 포화시켜 그 자체로 초시차적이다. 생산성을 포화시키는 가속력은 지구적 단위의 균질화가 쌍을 이뤄 진행된 탓에 땅에 귀착한다. 사센이 도시 내 양극화를 지적하듯 유사한 문제계가 행위자 단위와 공간 단위에 모두 적용된다.

 

  디지털 네트워크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로써 동시간대·실시간을 요청한다. 공간의 살을 삭제하면 시간이 균질해진다. 즉 자본의 시차 만들기는 상상의 차원을 겸하면서도 육체를 매개로 작동한다. 사례와 다른 사례가 각각 놓인 디지털 네트워크의 시간적임은 지역성을 지우며 균질화를 최대로 표현한다. 그러나 육체가 정박해 있는 탓에 삶의 경험은 균질성과 시차 사이에서 아른거리고 있다.

 

  최근의 디지털 네트워크는 지역 선거구 기반의 정치를 해체하고 커뮤니티 담론의 대변자들을 산출한다. 그러나 선거구라는 제도적 제어와 심리적 지역주의로 정당의 지지 기반에는 지역의 영향이 단단히 남아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의 정치는 정당보다 개인의 담론적 자산을 쥐고 발화와 언론 내 표명으로 이루어진다. 제도 내에서 제도를 생산하기에 비하면 지반이 없어 휘발적이다. 정치 영역에서 지역성은 정박한 육체의 실례다. 지역 주민끼리의 준거 의식은 지역 출신 후보에 대한 표심으로 연계된다. 정치 연구에서 소선거구제를 대체하는 중선거구제가 열린 지역 단위를 개발한다고 논증한 것을 보아,[5] 지역성은 탈중앙과 다양성의 의제다. 이는 앞서 말했듯 대립항인 균질화에 모든 것을 중앙으로 포획하는 경향이 있음을 내포한다. 으레 중앙이 지방으로부터 기대하며 수취하는 다양함은 시간에 따른 공간이다. 지역의 원주민이 오랜 기간 공유해 온 감각, 전수된 감각이 시간에 따른 다양성을 구성한다. 이 시간이 예컨대 문화적 경관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이 집중도를 선별하면서 공간을 재구축할 때 지역성은 배타적 시차다. 시차는 시간에 따른 다양성을 잘 정제하여 중앙의 구심적인 동력으로 만든다. 지역성이 매개하는 항은 정치와 인간이 아니라 정치와 땅이다. 자본 안에서의 지역성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아른거리는 정치적 공간을 핍진히 땅에 묶어버린다.

 

  침전물이 쌓이는 하구의 이미지를 여기에 둔다. 낙수효과는 흐름으로 시차를 구성하는 자본의 회로 자체를 상징한다. 흡사 코어와 유리된 시간선을 하청하는 것이다. 우린 도입에서 건설 노동자의 시간선을 인지한 바 있다. 지역의 역사적 출몰 시기와 상관없이, 우리에겐 함축된 시간에 따라 국가의 토대 위에 구획적으로 출몰한 지역이 주어진다. 균질한 것들의 네트워크인 동시에 땅을 촉매로 차이를 추동해야 하는 국가 형태의 모순성 때문이다. 생산을 공급시키고 지역을 수취하는 역학의 유사함, 하청에 대한 반작용으로 커먼즈가 출현하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발제하는 도시 모델은 얼핏 폐쇄된 생태계, 자생 가능한 테라리움을 현상한다. 이것이 국가 내의 탈국가[6]임을 상기하며, 우리는 유리 온실을 땅으로부터 추출해낼 수 있나?

 

  국지적인 사건을 역사로 영구화하기. 변혁을 밀어붙이는 전술의 한 계열이다. 그러나 영구화는 정박•균질화 등 거시적인 권력 작용과 동일선상에서 추궁된다. 사건으로서의 장소를 시간선에 투여하는 것은 강렬한 물질적 준거점을 바탕으로 전개되고, 이 동력은 물질 조건이 국가에 얽힌 현재 굴절의 여지를 갖는 것이다. 네트워크에 관해 이야기했듯이 접합부에서 유연한 실천을 기대하지만, 접합부야말로 체계를 흡수한다. 그렇다면 더 노골적인 이야기가 있다. 포획된 네트워크가 아닌 거점 위에 정초하는 배타성을 역이용하기. 예컨대 지역과 건물이 공유시키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의해 고립적인 집단들이 출현한다. 이들은 경우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며 지반 위에서 국가-상태를 자극하고 또 긴장시키고 있다.

 


[1] David Harvey, 최병두 옮김, 『자본의 한계』, 한울, 1997

 

[2] “지역성 연구는 대체로 도시보다는 농촌 마을이었고 도시도 일제시기 만들어진 식민 도시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 연구대상에 있어서 해체와 단절보다는 지속성을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지속성의 기반은 반촌들의 높은 지명도, 활용할 과거의 자원 그리고 문헌 자료다(윤택림. 2017. 「신도시의 지역성을 찾아서: 동탄 신도시 사례 연구」. 『구술사연구』, 8(1), 11-57 : 16.).” 윤택림은 해당 문제의식을 연장하며 다소 단절적인 신도시 지역성 연구를 진행한다. 지역은 역사적 맥락의 연속성을 통해 일궈지는 동시에 공간 분류적 단절을 중추로 구성된다. 전자는 연속선상의 시간-문화적 준거다. 후자는 토지 거래가나 국가적 개발사업 등 물질적 조건과 연계된다.

 

[3] 가령 소진광(2018)이 「공간정의 관점에서의 지역격차와 지역균형발전」(『한국지역개발학회지』, 30(4), 1-26.)에서 제시한 지역균형발전은, 지역별로 상이한 공간적 특성(역량)을 고려한 지역정책, 이것이 국가 발전 총량으로 종합되며 다시 지역 재정지원으로 돌아가는 자본의 루프로 이해할 수 있다.

 

[4] Saskia Sassen, 남기범·이원호·유환종·홍인옥 옮김, 『세계경제와 도시』, 푸른길, 2016

 

[5] 정용하. 2010. 「선거제도와 지역성 ―중선거구제를 통한 지역성의 발견」. 『한국민족문화』, 37, 3-38.

 

[6] “지역간 재정력 격차를 둔 채 지방분권화를 추진하면, 그 재정력 격차로 인해 지역간 불평등이 심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Tennwald, 1990 : 3 ; Mackey, 1998 : 21). …… 경제적 격차가 극심한 국가에서는 지방분권이 바람직하지 않은 인구이동을 초래할 수도 있다(홍준현. 2005. 「지방분권화와 수도권-비수도권간 및 영호남간 지역격차」. 『국가정책연구』, 19(1), 165-195 : 169.).” 분권 과정을 아우르는 조율 기구로서의 국가가 요청되고 있으며, 이는 지역성이 국가라는 한계상황 내적으로 발현됨을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