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비평으로 돌아가자!

  베르톨트 브레히트(아직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좋으련만!)는 <서푼짜리 오페라>의 후속 작이자 확대판인 <서푼짜리 소설 Threepenny Novel>을 쓰면서 자신이 마주친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 쓸모가 크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마주친 어려움은 또한 우리가 지금 맞닥뜨린 어려움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서푼짜리 소설>에서 그는 저 유명한 시카고의 선물(先物, futures) 시장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려 하였다. 선물이란 특정한 상품(밀, 석유, 돼지고기 등)의 미래의 가격 변동에 내기를 거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언뜻 보면 도박처럼 보이지만 우여곡절 끝에 어엿한 금융 활동 가운데 하나로 인정도 받고 자리를 굳혔다. 밀 선물 시장을 예로 들자면 뭐 이런 식일 것이다. 선물거래인은 대충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보아하니 올해엔 날씨가 궂어질 듯하고, 그러면 작황이 나쁠 것이다. 그럼 당연히 밀값은 뛰어오를 것이니 특정한 가격에 미래의 밀을 미리 사두는 게 좋을 것이다. 다행히 짐작대로 되어 밀 값이 뛰어오르면 나는 당연히 내가 지금 계약한 가격에 밀을 인수할 것이고, 그걸 훨씬 비싼 시장 가격에 판다면 큰돈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 등등.

 

  그런데 이것이 뭐 대수란 말인가. 물론 브레히트에게 이것은 대수였다. 우리에겐? 더욱 결정적이며 치명적이다. 얼마 전 적나라해졌듯, 미래의 가치에 대한 청구권을 의미하는 오늘날의 모든 금융상품은 선물에 기반한 것이다. 즉 2008년의 금융위기를 초래한 주범은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로 더 잘 알려진)의 붕괴였다. 그것은 월가(Wall Streets)의 전문가들이 초정밀 수학을 통해 만들어낸 추상적인 상품, 업계 용어로는 구조화 증권(줄여서 파생상품(derivatives)이라고 불린다)이지만, 실은 그것의 바탕은 선물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미래 소득에 대한 청구권이자 보다 구체적으로는 노동자의 미래 임금 소득에 대한 청구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불완전한 고용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그리하여 신용등급이 낮을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은 선심 쓰듯 안겨준 대출로 집을 샀고 결국 이자를 갚지 못해 집을 내놓아야만 했다. 신용등급이 낮으면 낮을수록 리스크가 높고 당연히 이자도 높은 만큼 투자자들은 단지 수익률만 보고 너나 할 것 없이 그 증권에 투자했을 것이다. 물론 거품은 꺼지기 마련이고 월가를 주름잡던 금융기관들은 파산하거나 구제금융을 통해 기사회생하였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브레히트에게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자본주의를 어떻게 재현하나? 물론 우리는 자본주의란 것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밝혀내기 위해 여러 입구를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무엇보다 노동의 착취를 통해 작동하는 것인 만큼 노동자의 인생살이를 재현하면 되지 않을까. 자본주의는 이름부터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를 가리키는 만큼 자본가의 사무실과 그의 금고와 계좌를 통해 자본주의의 비밀을 밝힐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 모두는 자본주의를 오인한 탓에 비롯된 착상이다. 브레히트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르크스가 제안했던 자본에 대한 가장 유명한 공식을 마음속에 새겼을 것이다. 자본은 사물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라는 것, 무엇보다 운동하는 가치로서 끝없이 자신을 증식해야만 하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운동하는 가치는 자신의 가치를 증대하는 화폐의 자기운동이란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 역시 잊지 않았을 것이다. 선물시장은 바로 그러한 돈의 미치광이 같은 자기 증식의 운동이 펼쳐지는 착란적인 무대였다. 시카고 선물시장은 세계 최대의 선물시장이었고, 브레히트가 바로 이 현장을 놓쳤을 리 없다.

 

  그렇다면 브레히트는 선물시장의 비밀을 밝히는 데 성공했을까. 안타깝지만 브레히트는 시간 낭비만 한 채 아무런 변변한 정보도 얻지 못한다. 그는 미국에서 다시 오스트리아로 이곳저곳 여행을 하며 평생 선물시장에 관여했던 이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지만 누구에게서도 선물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뾰족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누군가 브레히트와 똑같은 낭패를 겪은 인물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미국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 Michael Moore이다. 그는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한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영화의 막바지에 이를 즈음 월스트리트를 찾는다. 그리곤 다짜고짜 ‘파생상품(derivatives)’이란 게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지나가는 금융기관 직원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파생상품은 선물시장의 원리에서 비롯된 가공할 만한 금융상품이다. 아무튼 지나가는 이들이 다들 손사래를 치며 달아나지만, 어찌어찌 금융위기로 인해 파산한 월가의 최대 은행 중의 하나였던 베어스턴스 출신의 전직 직원을 만난다. 그러나 무어 역시 결국 아연실색할 뿐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는 복잡한 수학적 확률의 원리를 말해줄 뿐 금융 자본이 통제하는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눈곱만큼의 지식도 전해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물시장을 대신하여 소설 속에 등장하는 것은 더욱 우리의 눈길을 잡아챈다. 그것은 마치 오늘의 대형 수퍼마켓 체인이나 아마존 Amazon이나 쿠팡 Coupang같은 것을 닮은 할인 판매 소매점 체인의 제국과 그를 경영하는 자본가와 그 주변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겹겹이 자신을 추상화하는 자본의 세계에 맞닥뜨리는 것이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브레히트가 소설을 쓸 즈음인 1930년대와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우리는 거의 마법과도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 글로벌 공급사슬이라는 미심쩍은 이름(이는 제국주의적 국제 노동 분업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다)으로 진행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연결망은 더 이상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은 감춰져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처음부터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을 소유한 이들은 한 번도 자신이 투자하거나 소유한 공장에 방문하지 않을 것이다. 재계에 인기가 많고 정계 인사들과 인맥이 두툼한 전문경영진을 앉혀놓고 그들은 배당금을 셈하고 자신의 주식을 처분할 때를 점치고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그저 공장 관리자나 작업반장의 낯을 볼 수 있을 뿐일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과 노동의 극적인 대결이 이뤄질 일은 거의 없다. 금융화된 다국적기업 자본주의에서 자본은 더욱 유령과도 같은 모습을 띤다. 이러한 추상적인 가치의 자기 증식의 능력에 대한 물신주의적 믿음은 노동자 역시 휘어잡는다. ‘영끌’ 투자자이자 ‘빚투’ 투자자인 이들은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채권과 채무의 관계로 둔갑시킨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노동의 결실이 지불하게 될 이자보다 자신이 투자한 아파트와 주식, 암호화폐가 가져다줄 수익이 더 클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그 수익이 훗날 노동자의 임금에서 공제된 것이라는 점은 까맣게 잊는다.

 

  많은 문학평론가들은 19세기 후반 절정에 이른 리얼리즘 소설의 장르였던 성장소설과 가족소설은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하는데 적절하지 않게 되고야 말았다고 말한다. 기업가적 자본주의가 종말을 고하고 독점자본주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경영하는 자본주의적 기업의 세계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혹은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본의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발자크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우리는 부르주아의 가족과 그의 사교 생활을 통해, 그의 실내 풍경과 옷차림, 파티에서의 행동거지를 통해 부르주아를 그려낼 수 있고,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의인화하는 표본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는 아직 ‘휴먼 스케일(human scale)’의 세계였던 셈이다. 그러나 독점자본주의 이후,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구체적인 감각적 대상으로 접할 수 없다. 마르크스의 「자본」을 영화화하겠다는 놀라운 계획을 품었던 에이젠슈테인은 자본을 재현한다는 것은 결코 이야기화(anecdotalization) 될 수도 극화될 수도 있는 게 아님을 거듭 강조했다. 이는 브레히트의 긴밀한 협업자였던 엘리자베스 하우푸트만 Elizabeth Hauptman이 토로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녀는 전통적인 연극의 형식은 바로 이 세계(독점자본주의의 세계)에 적합지 않다고 했다. “만약 그 세계를 ‘시학화(poeticize)’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노동자이든 누구든 자신의 세계가 극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즐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술적 실천의 세계에 있는 이들은 오늘의 세계를 재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포스트인터넷 아트같은 알리바이 뒤에 숨어 세계가 어떻게 자신에게 감각적으로 현상하는지 중언부언 감상적인 서사를 쏟아내는 작업들에 대해, ‘언캐니’이거나 ‘숭고’이거나 ‘대양감(oceanic feeling)’이거나 하는 감성적 충격을 가리키는 미학적 범주들을 남용하며 세계의 불가해함 아니 어쩌면 불가사의함을 줄기차게 읊어대는 작업들에 대해, 자본주의의 가공할 추상화에 대해서는 딴전을 피우면서 디지털 가상세계의 추상에 의해 제거되거나 억압된 감각적 물질성과 그것에 대한 감각 경험을 지루하게 늘어놓고선 마치 대단한 부정(否定)을 행한 양어깨를 으쓱하는 작업들에 대해,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이런 현상학적이면서도 미학적인 전환, 즉 진실을 인식하려는 충동을 박탈한 감각 경험의 숭배, 경험이 사라진 세계에서 엉뚱하기 짝이 없는 경험의 예찬, 세계의 리얼한 재현을 감각적 리얼과 바꿔치기하는 협잡 등은 차고 넘친다. 그렇다고 이러한 동시대 미술의 실천들을 간단히 재단하고 힐난하는 일은 전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브레히트의 말을 빌자면 우리는 이러한 노선을 추구해야 한다. “사회적 인과관계의 기반에까지 도달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형식 요인들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 반대로 사회적 인과관계의 기반에까지 도달하는 데에 도움 되는 형식요인들은 모두 동원되어야 한다.”** 짐작과 달리 우리 주변의 예술적 실천은 너무나 형식 빈곤에 갇혀있다. 우리는 너무나 빈약한 형식 속에, 너무나 초라하고 무력한 형식 속에 머물러 있다. 예술적 실천은 우리가 놓인 세계를 재현할, 감각적인 인상 속에 처리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인과관계를 감각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형식을 발굴하고 창안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이 저절로 가능할 리 없다. 그러므로 비평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평은 감각적 재현에서 현실의 진실이 드러나는 방식에 대하여 묻고 따져야 한다. 모든 종류의 작업들을 역사화하되 그것을 정체성 운운의 사회학적이거나 개인의 전기적 배경에서 연역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추상적으로 연결된 세계와 그것에 내장된 모순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후벼 파고 타성화하는지, 전면적으로 물신화된 세계에서 변변찮은 의식적인 반성을 하며 살아가는 것의 비참함과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무의식적인 혹은 불가역적인 유토피아적 충동이 어떻게 찰나에 번쩍이는지, 그리고 그 빛이 어디에 출현하는지 위치를 찾아야 한다. 이것은 비평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비평으로 돌아가자! <퐁>이 그러한 비평의 요새가 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퐁>의 창간을 축하한다. 퐁, 퐁, 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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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데빈 포어가 쓴 ‘자본의 시간 Time of Capital’이란 글에서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Devin Fore, Realism after Modernism: The Rehumanization of Art and Literature, Cambridge, Mass. : MIT Press,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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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 표현주의 논쟁, 「브레히트의 리얼리즘론」, 서경하 옮김, 남녘, 1989, 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