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완의 질문: 보도연맹 이후 서정시를 쓸 수 있는가?

 

“인간적 욕망은

‘긍정적’으로 주어진 실재적 객체가 아니라

다른 욕망을 지향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구별된다.

(...)이러한 본질적 차이를 무시해 버리면

인간적 욕망은 동물적 욕구와 유사하다.”

-A. 코제브(Alexandre Kojève)

 

  나치가 기획한 홀로코스트가 600만 명의 유대인 사망자를 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그 규모와 집행체계 면에서 인류의 경악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천인공노할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경악은 언제나 자연발생적인 것만은 아니다. 요컨대 거기에는 연합군의 승리라는 조건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독일의 유대계 좌파지식인이었던 아도르노는 적절한 때에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라 논평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고 해도 좋다.[1] 나치 집권과 전란 속에서도 그는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고, 끝내 나치는 패망했기 때문이다. 패배자의 치부는 역사 속에서 게워내어져 바싹 마를 때까지 건조될 수 있다. 그 덕에 우리는 당사자가 아님에도(최소한 유대인도 아니고 독일인도 아니지만) 덩달아 아우슈비츠의 참상과 비극에 동기화되고, 그것을 우리 인류의 문제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의 지식인들은 ‘보도연맹 이후 서정시를 쓸 수 있느냐’고 물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국민보도연맹은 제주, 경남, 경북, 전남, 전북, 충남, 충북, 경기, 강원 등 전국 좌파 성향 시민들을 관리하기 위해 1949년부터 이승만 정부가 조직한 반공 관제단체였다. 이승만 정부는 여기에 좌익 이념 동조자 약 30만 명을 가입시켰고, 한국전쟁 직후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비롯, 그 일가족과 측근들을 죽였다. 그리하여 ‘보도연맹 사건’이란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이 기획한, 최소 20만 명에서 최대 40만 명의 시민들에 대한 체계적인 살해를 가리킨다. 그것은 규모와 집행체계 면에서 경악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지만, 인류사적 문제로 성립하기엔 결정적인 조건이 부족했다. 한국의 지식인들에겐 망명할 기회도 없었고, 한국의 우파들은 줄곧 승리해왔기 때문이다. 승자의 치부는 역사에서 게워내어지긴커녕 합리성이 된다. 그래서 일찍이 김수영은 “본인은 해방 후 남로당과 문맹[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였으나 본의 아님을 깨닫고 탈당하는 동시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할 것을 자에 성명함”[2]이라고 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한국전쟁 발발 8개월 전의 이야기니, 한국전쟁 이후의 분위기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 보도연맹과 같은 것은 서정시의 조건과 관계없는 것인 양, 어떤 담론적 지표도 되지 않는 것처럼 다뤄져야 했다.

 

  물론 ‘보도연맹’의 자리에 ‘여순 사건’을 넣어도 좋고, ‘4.3사건’을 넣어도 무방하며,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나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사건’을 넣을 수도 있고, ‘부역혐의자 학살’을 넣어도 관계없다. 더불어 ‘미군의 민간인 폭격’도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각각의 사태는 대한민국의 군대와 경찰, 검찰이 우익 토벌대 및 미군과 합작하여 남한 일대에서만 수백만 명의 시민을 죽인 연쇄적 사건의 한 계기이다. 그러나 이들은 ‘홀로코스트’와 같은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채, 산발적이고 우연한 사태의 파편들로서 인식된다. ‘홀로코스트’가 유대인을 향한 각이한 인종청소의 제 실천들을 담론화하는 대문자 기표인 데 반해, 우리는 한국전쟁 전후로 벌어진 이 같은 연쇄적 사건을 담론화하는 하나의 이름을 갖지 못했다.[3] ‘민간인 학살’, ‘양민학살’, ‘반공주의적 학살’, ‘반공주의적 테러’, 그 어떤 표현도 당시 한국 정부의 무참한 야만의 종별성을 증언할 무게를 갖지 못한다. 이는 담론화의 처절한 실패를 예증한다.[4]

 

  요컨대 나치 독일의 국가 관료체계 아래서 묵묵히 과업을 수행하는 선한 가장이었던 아이히만을 두고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 해당하는 담론적 등가물을, 한국 사회는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는 당시 이승만 정부 하의 학살 부역자를 향해 던져진 ‘존재물음’이라 할 법한 것을 가지고 있는가? 당시 한국에서 상연된 ‘악’은 제 표정을 알려주기도 전에 모든 공적, 사적 담화에서 달아나버렸다. 기세등등한 승자들의 행렬 속에서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자는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온전한 의미의 대상(object)이 되지 못한 채 소박한 미적 재현의 윤리를 물을 수조차 없는, 침묵되어야만 했던, 비체(abject)라 할법한 외설적인 덩어리에 가까웠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우슈비츠로 재현의 윤리를 논하는 데에는 익숙하면서도, 보도연맹으로 재현의 윤리를 논하는 일은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의 제목, ‘보도연맹 이후 서정시를 쓸 수 있는가’는 엄밀한 의미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질문 자체가 너무 늦게 도착한 탓이다. 그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기로 되어있었던, 당시의 시간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미 죽은 지 오래다. 기실 우리는 그 같은 사건이 있었는지조차 몰랐기에 별문제 없이 서정시를 써왔던 것이다.

 

  1950년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이뤄졌던, 경북 일대의 보도연맹원들과 대구·부산 형무소 수감자 3,500여 명에 대해 대한민국 군경이 벌인 학살은 이 같은 맥락 속에 자리한다. 이름 모를 수 천구의 유해들이 지표로서 남아있을 뿐, 어떤 말도 당대의 실재를 온전히 붙잡지 못한 채 흘러내린다. 제때 담론화되지 못해 공적 의식의 차원으로 기입/승격되지 못한 사건들은 억압된 기억으로서 역사의 무의식에 자리잡는다. 그리하여 언표를 통해 분절되지 못한 사건들은 덩어리진 채 전치와 환유 속에서 구천을 떠돈다. 코발트광산 속 3,500여 명에 대한 이름, 기억, 생명의 말소. 그것은 우리의 공적 의식에 곧바로 나타나기에 너무나 외상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인간은 빼앗기면 화를 내고, 맞으면 맞서 싸운다. 그것은 인간 리비도가 운동하는 자연스러운 경로이다. 내게 가해진 상실, 세계의 잘못(fault)을 처리하는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상실된 것을 애도함과 동시에 담론화할 수 있다. 이 작업을 거쳐야만 우리는 과거의 시간에 유폐되지 않은 채 회복을 이뤄내고, 온전한 기억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경북 일대의 인민들은 반공 이념으로 무장한 검찰, 군대, 경찰 등과 같은 억압적 국가장치 아래서 그와 같은 리비도의 순항을 관철할 순간을 박탈당했다. 기회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피학살자 유족들은 1950년의 학살 이후 10년간의 침묵 끝에 1960년 4.19 혁명으로 열린 정치적 공간에서 ‘경산군 피학살자실태조사회’를 만들고 연이어 경산유족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는 전국적인 흐름으로서, 보도연맹 유족들은 각 지역별 실태조사회와 더불어 전국단위의 유족회를 건설했다. 그 열기는 어마어마하여 국회에서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배상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할 정도였다.

 

  그러나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는 취약한 정통성을 지탱하고 미국의 승인을 얻고자 반공을 국시로 내걸었고, 유족회의 유골 발굴 작업을 이적 행위이자 반국가 행위로 규정하여 해산하고 처벌했다. 전국 유족회 핵심 인물 28명은 무기징역과 십수 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로써 남겨진 자들은 다시 40년간의 오랜 침묵을 강요받았고, 경산유족회의 경우 2000년에야 재결성되었다. 그 침묵의 40여 년간 피학살자들의 가족과 친지들에 연좌제가 적용되어 지속적인 감시와 핍박이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당시의 학살은 대한민국 군대와 경찰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 자체를 적시하는 일조차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2009년의 진실규명결정서를 발표할 때까지 유예되었다.

 

  상실과 잘못을 처리할 애도와 담론의 절멸. 이 과정을 거쳐 진보의 요람이었던 경북은 콘크리트 보수층의 텃밭으로 변모했다. 생존을 위협하는 억압이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지속될 때, 억압과 동화되는 것은 삶을 이어가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증오 대신 오히려 애착과 같은 감정들을 느끼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기전과 같다.

 

  또한 이 과정 속에서 억압된 리비도는 꿈 작업을 경유하여 해소되지 못한 스스로의 존재를 상연한다. 꿈은 말할 수 없었던 것, 억압된 것이 그 모습을 달리하여 나타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개별 인간을 넘어 사회 자체가 꾸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안경공장 학살사건’과 같은 것은 경북의 억압된 리비도가 괴담의 형식을 빌어 나타난 꿈이라고 해도 좋다. 경산 코발트광산 인근의 안경공장에서 사장이 미쳐 직원들을 불태워 죽인 후 자신도 자살했다는 서사, 그 귀신들이 폐공장에 들어선 이들에게 빙의한다는 서사는 명백한 거짓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꿈으로서 진실이다. 여기서 ‘사장의 정신병리적 폭발’은 당대 반공주의의 맹목을, ‘공장에 지른 불’은 터전을 공유하는 동료 시민에 대한 무참한 살해를, ‘원혼의 빙의’는 말해질 수 없었던 화, 분노, 억울함과 같은 정동을 알레고리적으로 지시한다.

 

  이 같은 괴담은 73년 전 코발트광산 일대에서 벌어진 학살이 동시대에 담지할 수 있는 일말의 리얼리티를 증언하는 동시에, 그 한계 또한 예증한다. 억압되지 않은 것, 달리 말해 충족되고 해소된 리비도는 꿈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괴담과 같은 사회적 꿈은 억압의 현존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코발트광산에서의 학살이 공적 담화 내에서 충분히 발화되고, 그리하여 우리의 공적 의식에 확고하게 자리 잡을 때, 꿈은 해소된다. 그제서야 코발트광산은 괴담에 이끌려 담력을 시험하는 치기 어린 학생들과 공포 컨텐츠 생산을 위한 흉가 체험 유튜버들을 빨아들이는 무지성의 블랙홀이길 멈추고, 유효한 사회적 기념비로서 성립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를 공적 기억으로 만들 수 있는 조건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앞서 적시했듯 한국의 우파들은 줄곧 승리해왔을뿐더러, 변혁 운동 세력마저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소비주의의 안락함에 대대적으로 타협했던 90년대 이후로 역사를 감지하고 그에 개입할 주체는 소멸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배적인 인간상은 자기 현전의 감각을 희구하며 상품이 제공하는 온갖 감각 지각적 자극에 몰두하는 ‘동물’에 가깝다.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적절히 지적했듯, 즉자적인 욕구들이 곧바로 만족되어 객체로서의 자연 혹은 사회에 대한 투쟁을 중단하게 되었을 때, 인간은 주체라기보다는 동물로 전락한다. 인간에 종별적인 시간으로서의 역사는 그로써 자취를 감춘다. 이런 조건에서 한갓된 신체로서의 ‘나’의 시간은 범람하지만, 공동의 시간은 부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알빠노’와 ‘누칼협’이 지배적인 정동으로 자리하는 동시대 한국에서, 1950년 경산 코발트광산 일대에서 벌어진 일을 경북 도민의 문제로, 경북 도민의 문제를 보도연맹이라는 국가 차원의 기획으로, 국가 차원의 기획을 4.3 사건, 여순사건, 전후 부역혐의자 학살을 관통하는 하나의 연속성으로 감지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20세기 초 제국주의 경쟁의 한복판에 놓인 한반도와, 러시아에서 쏘아 올려진 사회주의적 실험의 파고와 더불어, 해방과 냉전에 잇단 분단 상황을 직시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개인의 기분이나 정서를 초극하며 잔인하리만치 육중하게 운동하는 ‘전체’였다. 이처럼 즉자적 신체를 넘어 ‘우리’ 모두의 운명이 연루된 시간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개개의 파편화된 육신으로서 다만 괴담을 탐닉할 수 있을 따름이다.

 

  결국 역사는 ‘나’의 기억을 초과하는 공동의 시간인 바, 우리는 이 같은 시간에 접속할 주체를 기다리며, 우리 자신이 그와 같은 주체가 되도록 자신의 감관을 신체 바깥의 저 거대한 실재를 향해 부단히 정향시킬 도리밖에는 없다. 언젠가 우리에게 ‘죽음의 골짜기’ 이후 서정시를 쓸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할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1] 테어도어 W. 아도르노, “문화비평과 사회,” 『프리즘』, 홍승용 역, 문학동네, 2004. 29p.

 

[2] 『서울신문』, 1949년 11월 19일 자, 2면.

 

[3] 본래 일반적인 대량 학살을 지칭했던 이 개념이 나치의 유대인 말살 정책 일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굳어진 것은 지속적인 담론화 작업이 수행되었던 1960년대 이후의 일이다.

 

[4] 그러나 담론화의 계기는 미약하게나마 주어져 있다. 사람들의 입을 통해 죽음에 대한 은유로서 전해져 온 표현이 당대의 실재를 암묵적으로 가리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골로 간다’는 표현이 바로 그것인데, 이에 기대어 우리는 공산주의자를 가려낸다는 명분하에 자행된 이승만 정부 하의 대대적인 학살 일체를 가리켜 ‘죽음의 골짜기(Death Valley)’라는 개념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