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ffiti In Pusan 부산 그래피티 20년, 로컬의 이야기

 

 

GIP를 만든 지알원 작가의 초기작, 부대 똥다리(온천천)에 처음 남긴 그림. 2000.

 

 

1.시작과 만남 

 

  Pc통신 시절 극소수의 매니아들에 의해 형성된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는 2000년대에 접어들며 인터넷의 발전과 보급의 확대로 동호회 등의 형태로 급속도로 확장된다. 당시 수많은 취미 모임이 생겨난 것과 함께 써브컬처와  언더그라운드 커뮤니티를 갈망하던 매니아들이 온라인 카페 활동을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존재가 드러난다.  2000년 부산의 한 고등학생(지알원)이 이런 흐름에 가세하여 하나의 카페를 만들게 된다. 이름하야 Graffiti In Pusan, 줄여서 GIP라고 불렸던 이 카페를 통해, 더 일찍부터 활동하고 있었지만 교류의 부재로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이들, 관심은 있지만 시도하지 못한 이들이 모이기 시작하며 부산의 그래피티 씬이 생겨나게 되었다.

 

 

GIP 정기모임 기념 촬영. 2000.

 

2.부대 똥다리(부산대역 아래 온천천일대) 

 

  GIP를 매개로 모인, 당시 10대, 20대 그래피티 롸이터들은 매주 함께 그림을 그리며 그래피티 문화에 대한 정보와 각자의 작업적 노하우를 공유하며 이 문화를 즐겼다. 이러한 교류를 위해 여럿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벽면이 있는 공간이 필수적이었는데 때마침 발견하게 된 '부대 똥다리'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장소였다. 하천을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진 벽들은 이 들을 매혹시켰다. 2000년 어느 날, 부산의 그래피티인들이 이곳에 모이기 시작하며 '똥다리'는 부산 그래피티의 상징이 되었다.  

 

  허락받지 않은 공간이지만 인적이 드물었던 이유로 작업의 첫 시도는 비교적 쉬웠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 둘 그림이 늘어날수록 주민과 상인들의 민원으로 경찰이 올 경우 하던 작업을 내팽개치고 도망치듯 자리를 뜨는 등, 그래피티하면 떠올릴 수 있는 도망 에피소드도 꽤 빈번하게 생겨났다. 심지어 관할 구청에 의해 그동안 수백 미터에 빼곡히 채워졌던 그림들이 한순간에 지워지기도 했다. 비록 허락받은 공간은 아니었지만 관용적이지 못한 지역사회에 화가 난 그래피티 롸이터들은 거기에 굴하지 않고 다시 그림을 이어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수백 미터, 나아가 수 키로 미터까지 그림이 채워지게 된다. 이 과정에 이들의 실력 또한 함께 성장하며 주변을 지나치는 행인들이 보기에도 낙서이상의 그럴싸한 작품으로 여겨지며 '똥다리' 하천변을 구경하러 오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거기에 더해 부산대 일대 상인들도 인식이 바뀌며 대학가 특유의 문화적 분위기로 긍정적인 여론이 형성되며 허락받지 않은 공간에서 그래피티가 당연한 곳으로 자리잡게 된다. 제도적으로 허가받지 않았지만 문화적으로 인정받는 예외적인 자유로운 표현의 공간이 생겨났던 것이다.

 

  부대 똥다리는 국내외 여러 그래피티 롸이트들에게 알려지며 자연스럽게 지역을 초월한 교류의 장으로써 역할도 하게 된다. 다양한 지역의 아티스트들이 부산의 그래피티 롸이터와 만나 이곳에 그림을 남기는 작업을 진행했다. 모든 것이 서울에만 몰려 있는 한국에서 언더그라운드 문화 또한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래피티라고 하며 꼭 가봐야 할 곳이 부산에 있다는 것이 당시에도 꽤나 이례적이고 흥미로운 사례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처럼 수많은 그림과 다양한 문화적 에너지를 만들며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던 부대 똥다리는 2010년 가을, 부산시의 하천정비 공사로 인해  10여 년의 시간을 끝으로 벽면 인조 장식물로 덮이며 사라지게 되었다.

 

 

긴벽에 이어서 그리는 협업문화를 보여주는 초기 그래피티 롸이터들의 작업물. 2001.

 

부대 똥다리 풍경. 2001.

 

 

3. 쓸쓸한 로컬 

 

  'GIP', '부대 똥다리'로 시작되었던 부산의 그래피티 씬은 뜨거웠던 출발 이후 다양한 갈래로 변화를 겪게 된다. 처음의 호기심과 달리 흥미가 떨어지거나 실력을 키우지 못한 이들이 작업을 중단하며 자연스레 작업을 진지하게 대하는 이들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친목 이상의 보다 전문적인 정보교류를 통해 서로의 실력을 키우고 작업활동을 확장해 가며 그래피티 롸이터 또는 스트릿 아티스트로서 정체성을 구체화시켰다. 대중을 이해시키고  활동영역을 넓히기 위해 거리 작업과 더불어 스스로 그래피티 페스티발과 전시를 기획하는 등 예술적 확장을 시도했다. 그러나 여느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예술의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들 작업에 대해 당시 지역예술계의 시선은 기존 예술과 다른 치기어린 기행 정도로 바라보는 듯했고 대중에게는 여전히 힙합공연의 무대배경 정도의 편협한 이미지에 머무르며, 인테리어나 이벤트 무대 디자인 등 장식적인 역할의 작업으로만 소비되었다. 그런 과정에서도 몇몇 아티스트는 각자의 역량에 따라 공공미술로써 확장을 시도하며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루었지만 적지 않은 그래피티 롸이터들이 지역의 한계와 각자의 사적인 사정들로 작업을 그만두거나 더 많은 기회를 위해 서울로 떠나며 부산의 그래피티는 '씬'이란 말이 무색하게 위축된다. 초창기(2000년) 모여서 그림을 그릴 때면 20~30명씩 되었던 인원이 2005년 전후로 5~6명으로, 2010년 이후로는 1~2명 정도로 줄어들며 씬을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2010년 부대 똥다리가 사라질 때에도 더 이상 예전처럼 다시 덮어 그릴 사람이 없다 보니, 일방적으로 덮이는 똥다리 벽을 지켜볼 수밖에 없기도 했다. 또한 씬의 규모적인 위축은 극소수로 남은 아티스트의 작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부산에서 그래피티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뻔하다 보니 익명성을 전제한 과감한 거리작업은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했던 것이다.

 

  씬은 초라해졌지만 과거의 명성은 남아있어 아직도 다른 지역 다른 국가에서 부산을 찾는 그래피티 롸이터들이 종종 있다. 몇 안 남은 부산 그래피티 롸이터들은 그들과 어울림(연대 및 교류)을 위해, 그리고 이름 모를 새로운 그래피티 롸이터들이 생겨나길 바라는 마음에 제2의 '똥다리'를 시도한다. 서면의 어느 굴다리, 광안리의 오래된 공사장 패널 벽, 그들 지인의 공장 담벼락, 송도 방파제 건너 옹벽. 그러나 그림이 채워지고 분위기가 그럴싸해질 때쯤, 주변의 아파트 신축, 공공시설 재정비등으로 인해 또다시 그래피티 스팟을 만드는 일은 좌절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새로운 벽을 물색하고 그래피티를 담을 수 있는 기획을 구상하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다.  2018년, 씬의 위축된 분위기와 별개로 부산에 전국유일의 그래피티 샵(버닝그래피티Bunrnning Graffiti)이 생겨난다. 초라해진 로컬 씬을 생각하면 엉뚱한 시도로 보일 법 하지만 활동을 중단했던 부산의 1세대 그래피티 롸이터 2인이 다시 작업을 재개하며 새롭게 작업실 겸한 샵으로 공간을 구성하며 반가운 공간이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남은 이들은 여전히 묵묵하게 로컬을 지키며 소소하게나마 씬을 되살릴 시도를 하고 있었다.   

 

 

부대 똥다리 풍경. 2007.

 

⟪Blockbuster⟫(경성대학교 미술관, 기획: 구헌주) 2007.

 

⟪Urban Connection⟫(독립문화공간 아지트, 기획: 구헌주) 2010.

 

⟪Urban Connection⟫(독립문화공간 아지트, 기획: 구헌주) 2010.

 

4. 다시 스트릿 

 

  같은 해(2018년) 부터 못 보던 이미지가 부산 여기저기에 보이기 시작했다. 다소 어설픈 이미지가 시간이 지날수록 완성도를 갖추어 간다. 그 이후 또 다른 이들의 글귀가 경성대와 서면을 중심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우연하게도 비슷한 시기 곳곳에서 새로이 시작하는 이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부산 그래피티 태동기처럼 각자 따로 시도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저기서 각자의 글귀와 이미지가 생겨난다는 것은 '부대 똥다리'라는 특정 공간에서만 그려지던 이전보다  어쩌면 더 그래피티스러운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20년 전보다 훨씬 발달한 웹과 모바일 환경이지만 'GIP'와 같은 그러한 커뮤니티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SNS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짧은 인사들은 건내는 상황이지만 웹 환경 속에서 적극적인 교류는 이루어지지 않는 듯 보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앞서 언급한 그래피티 샵 Burnning Graffiti가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이미 존재했던 그래피티 샵을 보면 단순히 재료를 판매하는 기능을  넘어 아티스트 간 커뮤니티공간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선례와 같이 이곳에서도 교차로 대면이 이루어지며 서로를 알아가고 또 함께 할 무언가를 구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부산에서 그래피티로 활동하는 인원은 대략 10여 명 내외로 파악된다. 수년간 한둘 남은 롸이터들이 활동을 이어오던  외로운 시절을 생각하면 새로운 이들이 생겨난 것만으로 무척 반가운 일이다. 20년 전과 출발점이 다른 새로운 롸이터들을 마주 하며 그래피티 문화가 이 지역에서 어떤 식으로 존재하며 이어져야 할지 고민도 해보지만 지역소멸 이슈처럼 씬의 소멸 직전까지 목격한 바, 존재하는 것 자체가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창 열의로 시작하는 이들이 그 재미를 잃지 않고 나아가 더 진지하게 작업을 대하며 먼저부터 활동해오던 이들과 자극을 주고받으며 재밌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다. 아슬아슬하게 이어온 23년간의 시간을 다시 톺아보며 더 오랫동안 부산 그래피티 씬이 지속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고민도 해보지만,  적어도 현재로선 '부대 똥다리'같이 즐겁게 놀 수 있는 ‘안전한 놀이터’ 하나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사진제공: 김울프, 이니그마, 지알원 

 

 

그래피티 샵 Burnning Graffiti (현 Enigma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