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도큐멘테이션 은하계의 탄생

 

  작물이 자랄 대지의 여건을 살피지 않고 씨를 뿌리는 농부만큼 어리석은 자도 없다. 비평이 임사에 이르렀다 해도 세포의 분열은 지속된다. 당대의 지적인 유행에 부합하는 세련된 텍스트는 그치지 않고 당도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상황을 바꾸진 못할 것이다. 안일한 자기 복제, 낡은 독해, 무해한 의사표명이 혼재된 문자들의 탁류 속에서 도전적이고 참신한 비평을 골라내는 것이 수상 제도의 역할이라고 혼동하긴 쉬우나, 2017년 세마평론상의 심사위원 심상용이 심사평에서 제기한 "과연 한국 미술에 ‘비평의 장이 존재하는가"[1]라는 진단에 걸맞은 처방 없이는 치유를 상상할 수 없다. 어찌 보면 상황은 분명하다. 오늘날 비평이라는 실천 자체의 회복을 목적으로 삼는 수상 제도는 내용이 번쩍이는 비평을 도출할 수 있는 인물의 모색이 아니라, 광야에서 방황 중인 비평의 걸음을 멈추고, 가나안으로 인도할 자를 지목하길 요구받고 있다.

 

  그리고 지금. 웹 도큐멘테이션이라 명명할 일련의 조류가 저변에서 순환하고 있었음을 증언하려 한다. 접속의 용이함으로 인해 표층으로 상상하기 쉬운 웹의 연안은 제도 안에서 긴요한 실천으로 다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외려 심층에 속한다. 작가들의 포트폴리오, 전시 홍보, 간소화된 아카이브 일체는 오직 편리함의 측면에서 선호될 뿐, 웹진의 형식적 잠재력이나 그 성과는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지면과 잡지의 텍스트를 픽셀 환경에 옮겨 심은 정도에 그쳤고, 지면의 소비를 촉진할 애피타이저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0년대로 접어들며 스마트 폰이 대중화되고 SNS 사용이 일상화됨에 따라 상황은 급변했다. 2010년대의 웹진이 신생공간과 유사한 징후를 보였다고 간주하는 것은 오판일까? 요사이의 문제적인 텍스트 대부분이 웹진을 통해 방사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지나친 비약일까?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셈해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비평웹진과 신생공간의 접경

 

  후술하겠지만, 그간 웹진은 적지 않은 비판에 시달려 왔다. 그중 역할의 폄하는 제도로 도약하기 위한 쇼룸 내지는 비제도적 등용문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이와 같은 혐의는 동일한 시기에 약진했던 신생공간 담론 또한 맞닥뜨렸던 주장이라는 점에서 공범의 몽타주처럼 보인다. 우연으로 치부하고 넘겨버리기엔 알리바이가 예사롭지 않다. 안대웅은 「신세대 담론의 작은 역사: 2013-2016」[3]라는 글에서 신생공간의 실천이 결국 《서울 바벨》(서울시립미술관, 2016)로 귀착되었으며, 이 결산적인 전시에 의해 신생공간 담론이 붕괴되는 동안 소수의 예술가만이 수혜를 입고 제도로 편입되었다고 자조한다. 이는 신생공간이 기존 미술계완 독립된 레이어로 기능한다고 규정한 강정석과 달리 기성이 가진 제도-기금의 정례적 수혜를 누리지 못한 장외집단이 벌인, 담론을 가장한 인정투쟁의 맨살을 일부 들여다봤기 때문이다.

 

  웹진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13년 홍태림이 창간한 웹진 ⟨크리틱-칼⟩은 글의 주제와 필자의 투고 자격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통해 운영되었고, 이 시기에 새로운 필자들이 놀라우리만치 한꺼번에 출몰했다. 신생공간의 생존방식을 순수하게 긍정했던 이들이 소수였던 것과 같이 고료와 제도적 인정이 부재하는 웹진 생태계에 끈질기게 내기를 거는 이들도 소수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진정성의 여부와 별개로 웹진은 등단 또는 학연을 통해 지면을 얻는 관행을 일부 허무는 대항-제도로써의 포문을 개방하는 동시에 많은 이들이 제도의 눈에 들어 편입될 수 있도록 인큐베이팅하는 기능 또한 수행했다.

 

  공간적으론 대항-제도적 변방이지만, 시간적으론 전-제도적 발달기라는 모순된 성격을 담지한 매체로서의 신생공간과 웹진은 SNS 의존성에 의해 동질적 의혹을 배가한다. 2015년에 발표된, 신생공간의 성격을 특정 짓는 강정석의 「서울의 인스턴스 던전들」[4]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실려 있다. “사실 대부분의 신생공간은 SNS와 지도 앱을 기반으로 한 공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한술 더 떠, 대부분의 웹진 활동은 오로지 SNS를 통해서만 보증되었다. 신생공간의 관람객이 지도 앱을 통해서 경로를 식별했듯, 웹진의 독자들은 SNS 게시물의 하이퍼링크를 경로 삼아 접속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인식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Social Network Service’라는 명칭에 걸맞게 새롭게 창안된 사회와 네트워크는 젊은 미술가들에게 별말 없이 수용되었으며, 그중에서도 페이스북의 인터페이스는 웹진이 만개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충족시켰다.

 

  구독. 페이스북에선 구독이란 개념이 허용된다. 특정인을 팔로우하고 그들의 게시글을 트래킹하는 것이 일상화되었으며, 매체 형식은 이용자로 하여금 광범한 독서를 요구했다. 페이스북 게시글은 텍스트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이미지는 하단에 배치된다. ‘공유하기’를 통해 특정 아티클을 자기 계정의 타임라인으로 긁어와 이런저런 코멘트를 덧붙일 수 있고, 하이퍼링크 기능을 통해 원문으로 점프해 전문을 읽을 수도 있다. 이때 발생하는 것은 해석이다. 타인의 타임라인 상 코멘트만을 목도하고 지나치는 게 아니라, 원문까지 함께 읽고 독서의 차이를 발생시킬 때 해석의 가능성은 스스로를 내보인다. 텍스트를 공유하는 통에 이뤄지는 ‘확산’은 말들의 위력을 배가하는 주요한 방법론으로 통했으며, 공유를 통한 텍스트의 산발적인 팽창과 축소를 통해서 공감각 할 수 있는 모종의 미학적 지형도가 그려지기도 했다.

 

  반면 이미지 기반의 인스타그램으로 세계가 재편되면서 세상은 해석될 필요도, 개별적인 반응를 표출하고 뒤섞을 이유도 없는 즉자적 시각장 내부로 침몰하기 시작한다. 여기선 구독이 아닌 관음이 전체를 지배한다. 페이스북에서 텍스트가 상단에, 이미지가 하단에 위치했다면 인스타그램은 이미지가 전면에, 텍스트가 후면에 위치한다. 인스타그램 썸네일 텍스트의 분량은 페이스북에 비해 대폭 줄어든다. 페이스북에선 유효했던 호흡의 글을 인스타그램에서 쓴다면 별종이 된다. 정방형의 이미지로 포화된 시공에서 내용과 의미라는 건 하품 나오는 구식이다. 해시태그는 텍스트가 아닌 스티커이며, 이를 통한 검색은 폐쇄적 시리즈를 탐닉하는 열쇠구멍에 가깝다. #. 이미지 우위의 환경이 조성되면서 담화는 제거되고 권력은 감각만을 게걸스럽게 탐닉한다. 신생공간이 《서울 바벨》을 통해 정점에 오르고 이내 산화되었다면, 웹진의 황금기는 주류 SNS가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으로 재규정되는 느슨한 교체기를 지나며 점차 바래갔다.

 

  매체의 종차와 별개로, SNS의 보급으로 인해 비평이 원치 않는 성형수술을 당했음을 선뜻 부인하긴 어렵다. ‘좋아요’와 ‘하트 표시’로 인한 비평적 호오의 계량화는 인맥에 기초한 클릭과 혼음되며 그 자체로 하나의 영향력 있는 지표가 되었고, 시시각각 ‘투명한’ 결과인 듯 확인되는 지표들에 의해 가장 시끌벅적한 비평이 곧 ‘좋은 비평’이라는 오인을 배양하기도 쉬워졌다.[5] 비평이 전시와 작품에 대한 가치 판단의 정수에서 화려한 수사들로 치장된 액세서리처럼 취급되는 경향도 관찰되었다. 이는 SNS를 주축으로 했던 신생공간과도 정확히 일치한단 점에서 2010년대를 회고할 대상이 신생공간만이 아님을 암시한다. 게다가 신생공간이 기존 제도가 포괄할 수 없는 잔여들의 분출이었다는 점을 특기한다면. 대항-제도이자 전-제도, SNS 의존성과 환원적 변형, 젊은 미술가들에 의해 생겨나는 인스턴스 공간이라는 접경들이 끝내 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웹진에 대한 동시대적 징후로서의 자격과 승인이다.

 

 

논쟁과 공론화의 매트릭스

 

  오늘날의 우주축이 되어버린 SNS가 양질의 비평 생산에 비협조적이라 해도 실시간 연동을 통한 정보의 개방성을 토대로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다. 합죽이처럼 회자되는 ‘비평의 위기’는 자체적인 담론의 불임, 텍스트의 효험 부족, 독자의 감소에 기인한다. 담론의 불임은 수입에 의존했던 기성세대 또한 시달렸던 풍토병이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두 문제는 극복 중일지도 모르겠다. 2010년대에 접어들며 〈두쪽〉(2015), 〈옐로우 펜 클럽〉(2015), 〈와우산 타이핑 클럽〉(2017), 〈집단오찬〉(2015), 〈크리틱-칼〉(2013) 등의 웹진들은 가속하는 세계에 맞물려 속도감 있는 비평들을 피드하기 시작했다. 과도기에 걸맞게 캐주얼한 비평과 관습적인 비평이 병존했으며, 매체 간의 반목과 협력이 거듭되었고, 전에 없이 강화된 텍스트의 범재성이 각종 논쟁과 공론화를 촉발하고 확산시켰다. 분량의 제한 상 논쟁에 관한 몇 가지의 사례만을 짚어보려 한다.

 

  2014년, 〈크리틱-칼〉의 운영자 홍태림은 「제4회 공장미술제의 심각한 문제점에 대하여」[6]라는 글을 웹진에 게재하며 전시행정(展示行政)에 학생들이 무더기로 동원되고 있으며, 이러한 형식을 통해서는 어떤 생산적 결과물도 도출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반박 섞인 주장은 지면들에서도 발견되었지만, 외려 웹진에서 보다 정교하고 긴 분량의 글들이 게재되며 논의를 심화시켰다. 이를테면 정강산은 〈집단오찬〉에 「‘예술가들이여, 예술을 그 자체로 옹호하라’」[7]라는 글을 게재해 예술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홍태림의 주장을 반박하였고, 곧이어 청년관으로 불거진 논쟁에서도 ‘청년’이란 세대적 구호가 가진 보편성의 결여와 그것 너머에서 작동하는 다층적 소외를 밝히는 글과,[8] 임대수익모델에 의해 착취당하는 빈곤한 구조가 특정 세대에게 집중되고 있기에 청년이라는 포커싱을 긍정한다는 상반된 주장이[9] 연이어 게재되는 등 미술계의 현안에 대한 비평적 형식의 개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웹진의 주장들은 곧잘 지면에 인용되며 반박되었는데, 이때 핵심은 논쟁을 주고받을 공간이 확장되었다는 데 있다. 웹진-웹진 간에도, 웹진-지면 간에도 부여된 언표의 등가성은 미술계 안에서 발화가 민주화되기 시작했음을 예증하는 한 사례다.

 

  시간이 흐르고, 이제 논쟁은 오롯이 웹진의 몫이 된다. 2018년 5월 합정지구에서 열린 《미러의 미러의 미러》전은 특정 페미니즘 담론의 성미를 건드리는 작업들이 포진되어 있었고, 그 결과 트위터의 도마에 올라 무시하기 힘든 사이버 불링에 시달렸다. 트위터의 파편적인 비판이 종합되지 못하던 것과 달리, 〈집단오찬〉에 반성착취운동가 박혜정은 전시를 비롯해 한솔 작가의 〈메루메루빔〉을 명시적으로 비판한다.[10] 원고는 지금은 고인이 된 트위터 닉네임 ‘메루메루’가 스스로를 정체화한 ‘성 노동자’ 개념에 내재된 성 착취의 은폐성을 대질하고, 그녀의 사망을 다룬 작업이 ‘노래방 영상’ 포맷으로 제작된 것에 대한 비윤리성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크리틱-칼〉엔 예술은 한 사회의 금기와 경계를 시각화하기 위해 표면적으론 윤리에 반할 수도 있으나 이러한 경계를 드러내는 것이 곧 예술의 윤리임을 강변하는 엄제현의 텍스트가 게재되며 박혜정의 글이 반박되었고,[11] 다시금 홍양무현의 「예술과 윤리를 나누는 이분법은 누구에게 유리한가?」[12]라는 제목의 글이 〈집단오찬〉에 게재되며 예술과 윤리 개념의 갱신을 요구하는 등 확장된 전선을 통해 무제한적 참전의 시공이 형성된다.

 

  위와 같은 논쟁의 방식은 웹진 문화 안에서 완전히 정착된 듯하다. 2022년 3월 관훈갤러리와 사가에서 동시 운영된 《귀귀 개인전》을 두고 일어난 논쟁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웹진 〈퐁〉에는 안준형의 「지금 여전히 귀귀의 만화를 본다는 것은」[13]이 게재되어 ‘엽기’에서 ‘병맛’ 코드로 이행한 인터넷 공간에서 엽기 웹툰을 제작하던 작가의 회화전이 갖는 시의성을 비평하고, 〈아트렉처〉에선 보다 전시에 집중하길 요구하며 웹툰과 회화의 변증법적 구조와 나폴리탄 괴담의 형식이 전시를 어떻게 견인하는지 비평하는 글이 게재된다.[14] 한편, 김준혁은 귀귀 작가의 과거 웹툰에서의 특정 묘사를 문제로 인식하고 그의 소유인 Archivist_kr[15]에서 홍보 요청을 거절한 이유를 담은 글을 웹진 〈MACO〉에 게재한다.[16] 이에 대한 반박은 웹진 〈콜리그〉에 게재되었는데, 김준혁이 웹툰-작가-작품의 분별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논의엔 작품이 없고 작가와 웹툰만이 문제시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이용준의 비평이 그것이었다.[17] 각 비평들의 내용과 무관하게 몇 가지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하나, 웹진 문화 안에서 논쟁이 잠정적이고 일상적인 관습이 되었다는 것. 둘, 의견을 주고받는 웹진들 간의 장벽이 두텁지 않고 상호삼투적이라는 것. 해당 논쟁을 실제 따라갔던 독자들에겐 셋. 비평을 크롤링[18]하는 SNS 테크놀러지의 색인술에 의해 매체의 종별성과 무관하게 텍스트들의 상관성을 수월히 인식했다는 것. 이는 표면적으론 무정부적이지만 실제론 중앙집권적이다.

 

  마지막 증좌는 2018년의 프로그램 ⟨신생공간 이후 플랫폼을 가설하기 위해선 무엇을/어떻게 해야 될까?⟩의 텍스트다. “동시대 미술비평은 이미 단일한 화두, 주제, 초점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계기로부터 비롯한 개별적인 타임라인을 전개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우연찮게 합선된 타임라인들은 어떤 플랫폼을 형성하고, 이는 일련의 필자들에게 글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동력과 그 결과들을 유통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을 마련한다.”[19] 해당 주장이 웹진 〈옐로우 펜 클럽〉, 〈와우산 타이핑 클럽〉, 〈집단오찬〉을 한데 모은 기획에서 나타났다는 점이 눈에 띈다. 본문의 어휘 ‘타임라인’은 페이스북의 피드 포맷과 동음이며, 그간의 논쟁에 비춰볼 때 ‘우연찮은 합선’은 별도의 기획이나 친분만이 아니라 논쟁과 발화를 통한 동질감/적대감의 형성을 포괄한다. 이 합선을 위해 웹진들은 본성처럼 SNS 계정을 개설하고 자기홍보를 위한 미디엄으로 활용했으며, 양자의 근친관계 속에서 논쟁은 탄력을 받았다.

 

  열거한 사례들에 비추어 다음을 주장하는 것이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2010년대는 SNS를 통해 논쟁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고, 제한 없이 참석할 수 있는 민주적 바탕을 형성했으며, 하이퍼링크를 통해 각 주장들이 시리즈처럼 연결되며 담화의 사슬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도 하이퍼링크의 효력은 자못 중요한데, 논쟁의 타임라인을 식별하는 요긴함은 물론 누구나 새로운 논쟁의 가지를 파생시킬 수 있도록 기능함에 따라 논쟁의 형식 자체를 동시적이고 산발적인 것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이제 논쟁은 사각의 링 위에서 벌어지는 핑퐁 랠리가 아니다. 불가시적인 수의 독자가 전황을 지켜보다 부지불식간에 개입해 난전으로 이끄는 무중력의 격전지처럼 상상되어야 한다. 번외로 다음과 같은 의구심이 들만도 하다. ‘그렇다면 웹진의 쓸모는 실시간 논쟁에 한정되는가?’ 아니.

 

 

웹 도큐멘테이션 은하계로 출항하라

 

  마셜 맥루한은 그의 저서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활자 인쇄 문화 이후로 인류가 어떤 질곡을 겪어왔는지 몇 가지 대비를 통해 제시한다. 구어-청각 문화와 문자-시각 문화, 필사 문화와 인쇄 문화, 다시 인쇄 문화와 전기 문화가 분별되는 동안 그는 특정 문화의 우생학적 심판을 엄격히 지양하고 해당 문화가 지각에 끼친 영향, 나아가 그 지각이 다시금 문화로 순환하는 경향에 대해 고찰했다. 가령 구어-청각적 공동체는 개인적 사고가 인정될 가능성의 희미하나 비약적 기억력의 보고이자 섬세한 지각의 어머니고,[20] 문자-시각의 보편화는 오감으로부터 시각만을 추출해 외화하는 형식으로 인해 원근법, 기보법 등을 낳아 시각을 특권화하도록 견인하나,[21] 인간 존재 양식의 세속화 과정에 참여하며 탈성화를 촉진하기도 한다.[22] 상이한 문화 간의 전쟁을 다루면서도 그가 놓치지 않는 것은 경험, 지각, 표현 방식의 변화된 방식을 추적하는 학자의 긍지다.

 

  마찬가지로, 비평의 조건에 대해 SNS가 덧붙인 독소조항은 우리가 누렸던 목가적 속도감에 비추어 경악하고 힐난하기만 할 순 없다. 다음은 2021년 세마평론상의 심사위원장 문혜진의 심사평 일부이다. “아마 지난 30년간 한국미술계에 지금처럼 글이 많아진 때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의 증가가 비평 환경의 질적 향상과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동시대 미술비평의 아이러니다. 소화해야 할 전시의 물리량이 폭증하고 현장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비판적 거리감과 성찰이 필요한 긴 호흡의 글쓰기는 역설적으로 어려워졌다. (...)등이 자신의 비평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젊은 비평가가 맞닥뜨리는 현실이다.”[23] 이는 기존의 비평 생태계를 지지하는 입장에선 타당한 비판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SNS가 지각에 미친 영향만이 아니라 변화된 비평 모델을 공중이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이 배속되고 있는지를 두루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순서상 문혜진의 문제의식을 먼저 들여다보는 편이 자연스럽겠다. 기금제도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증식한 전시 풀에서 긴 호흡의 글쓰기가 어려웠다는 것은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예술의 시간은 제도적 지원을 담보하는 행정의 시간에 복속되었고, 애뉴얼(Annual)한 시간관의 제약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규범화되었다. 연초의 기금선정, 연중의 전시준비, 연말의 전시 오픈과 청탁이 하나의 주기를 형성함에 따라 비평 또한 결과 보고에 포함되기 위한 촉박한 일정에 맞춰 제작된다. 1년을 한 주기로 삼는 시간관에선 수십 년의 고민을 집대성한 작품도, 장구한 고민과 퇴고를 거듭한 비평도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월간지에서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반면 웹진은 그러한 생태계와 종별적인 삶의 모델을 제안한다. 각 웹진 플랫폼들에선 작가와 비평가 간의 인격적인 미팅이 생략됨에 따라 사감이 개입할 여지가 줄어들고, 분량의 자유도로 인해 제도 안에선 찾아보기 힘든 분량의 글들이 주를 이룬다. 흡족할 때까지 반복된 퇴고를 통한 원고들이 비평가가 채택한 시점에 투고되며, 루머, 가십, 비판, 야유, 공유, 댓글, 좋아요에 따라 다면적인 부침을 겪으며 텍스트로서의 기능을 실현한다. 제도를 통해 생산된 대부분의 글들이 무미건조하게 제작되어 행정의 데이터베이스에 순차적으로 입고되고 영면하는 것과 달리, 제도에 상응하는 물질적 보상을 약속받지 못하는 빈곤한 픽셀의 대지에서 은총이 발견된다.

 

  생산의 토대와 더불어 웹 테크놀러지에 의한 변화도 가늠할 수 있다. 롤랑 바르트는 『S/Z』에서 이상적인 텍스트성에 관해 다음처럼 기술한 바 있다. “그런 이상적 텍스트에서 망들은 다양하며 그것들끼리 유희를 하지만, 어떠한 망도 다른 망들을 지배하지 않는다. 이 텍스트는 기의(signified)들의 구조가 아니라 기표(signified)들의 은하계이다. 그것은 시작이 없다. 그것은 가역적이다. 그것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들은 다양하며,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주요하다고 확실하게 선언될 수 없다.”[24] 웹 환경에서의 하이퍼텍스트성과 완벽히 일치하는 이 기묘막측한 텍스트는 텍스트적 권위의 소멸, 비평이 약조하던 풍요로운 상징과 기의의 축조에 대한 배반, 서책이 약속하는 보편적인 읽기-구조에 대한 거부가 한꺼번에 담겨 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서적이나 잡지에서 발견되는 글은 독일 관념론적 전통을 연상시키는 엄격한 내적 완결성을 지닌다. 토픽의 독립성, 논리의 일관성이 전제된 규범적인 비평의 스타일이 상식으로 군림한다. 그러나 단일한 논조 역시 인쇄술이 개발되고 2세기가 지나서야 등장한 역사적 개념이다.[25] 인쇄 문화가 일궈낸 이 최면적인 모델은 하이퍼링크에 의해 점차 분쇄된다. 알파와 오메가는 지남력을 상실하고, 하나가 전체가 되는 순간적 신의 지평이 개방된다. 정보의 크기가 무한으로 투사될 수 있는 거울이 탄생함으로써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모든 지식은 항시 소지된 한 장의 종이에 새겨질 수 있게 되었다. 하이퍼링크의 비순차적 읽기는 좌에서 우로, 상단에서 하단으로 이어지는 인습적 읽기와 함께 저자성을 반파하고 지식을 이루는 전체 한가운데에 새로이 정립된 헌법으로서의 자기를 선언한다.

 

  이에 따라 도큐멘테이션의 지평도 확장된다. 도큐멘테이션. 그것은 단순한 기록 행위에 머물지 않는다. 필립 오스랜드에 따르면 이브 클랭의 〈뛰어들기〉는 퍼포먼스의 도큐멘테이션을 기록하기 위해 별도로 여러 번 수행된 바 있는데, 이 경우 도큐멘테이션은 기록적이기보단 연출적인 것이다.[26] 웹진에 게재되는 비평들은 여전히 작품을 독해하고, 평가하고, 기록한다. 때때로 그것만으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텍스트들이 게재된다. 앞서 기록한 논쟁들이 준거하듯, 비평가의 특정한 정치적 관점을 소통이 전제된 무대에 올려놓는 연극적인 상황이 더해진다. 이러한 연극은 웹 환경이 조성하고 자극하는 동시성의 요청에 부응한 것이며, 비평가를 여전히 뚜렷한 입장을 가진 플레이어 또는 훌리건의 단위로써 유지시킨다. 그리고 이 개입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하나의 장(場)이 윤곽을 그리기 시작한다. 책장의 라벨에 의해 분할되고, 대중에 의해 고립된 구루들의 텍스트가 처한 위기와 달리, 웹에서의 도큐멘테이션은 SNS와 검색 엔진에 설치된 트랩이 되어 시시각각 타인을 웹진으로 끌어들이고 관람케 한다. 이를테면, 도큐멘테이션이 하나의 사건으로 전화될 단초를 구축하는 것이다.

 

  현 상황을 일축한다면 ‘도큐버스(docuverse)의 도래’[27]라고 부름직하다. 기표의 은하들이 디지털리티(digitality)라는, 시대적 정언명령과도 같은 중심의 거대한 중력에 의해, 그에 대한 의식적/무의식적 관계를 통해 공전하며 별들의 집락을 이룬다. 여기서 웹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데이터베이스 쿼리[28]이자 무차별한 웹에 수립된 분과적 색인이며, 방황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마련된 우물, 보르헤스의 알레프(Aleph)[29]다. 손가락 하나로 전지구적 유통망과 접속하는 광범위한 시장 네트워크는 그것의 본성상 여전히 교환가치의 장벽을 두르는 반면 웹진 문화는 무상으로 배포되어 시간, 공간, 비용으로부터 면제된 향유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숨 가쁜 현대 독자의 시간 사이에 끼어들길 주저하지 않는다. 레퍼런스의 효용이 이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하는데, 인쇄 지면이 각주, 미주를 통해 오로지 문자열만 사용할 수 있었던 반면, 웹에선 전시장의 시공간 제약으로 충분히 관람할 수 없었던 영상작업을 통째로 본문에 병치하거나 작가 아카이브 내지는 타인의 아티클 전문을 하이퍼링크로 연결하는 등, 무한-파생하는 굴들이 온/오프해 다공성의 공간감을 부여한다. 이 다공성 우주의 특질은 초시간적이고, 범신론적이며, 유연하고, 비선형적이며, 다재다능하고, 잡아채는 것이다.

 

  부작용이 없진 않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한 우위에 서지 못함에 따라, 기존의 비평이 특권적으로 담보해 온 개별적 관점이 이 안에선 무색해진다. 오직 관점들의 공민권만 약속될 뿐이다. 이전까지 특출난 비평가의 시선은 분열된 세계를 직시하고 텍스트의 완결된 구조 안에서 사태를 봉합하는 기능을 수행해 왔다. 그때 비평가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될 수 있었다. 이제는 거장-이론 모델에 의해 사태가 유하게 해소될 수 없다. 동일하게 마주한 딜레마를 놓고 영화가 별점과 평문이라는 양극단으로 찢어진 것과 달리 미술은 시장과 비평으로 양분되었다. 작품의 가치를 판별하는 수단으로써의 가격은 물론 속임수다. 비평 역시 현란한 수사와 담론으로 무장된, 그럴듯한 눈속임이다. 가격의 속임수는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면서도 작동하나 기존 비평의 트릭이 객석에서도 간파 가능해짐에 따라 양자는 극단적으로 위계화되었다. 어쩌면 이일 이후 국내의 어떤 비평적 거장도 약동하지 못한 국소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웅적 특질을 지닌 인격의 생몰과 별개로 우주가 재구성되었다. 파훼된 큐브를 매만지길 멈추고 선택지 앞에 서야 한다.

 

  ‘새로운 논리력으로 미술과 세계의 변화를 꿰뚫는 비평다움’을 지닌 비평가를 찾는 공모전에서, 비평의 위계는 해체되었으며 그러한 역할은 비인격적 행위자인 웹진으로 이관되었음을 표상하는 원고가 투고되는 상황은 꽤나 아이러니하다. 풍차가 돈키호테에게 달려드는 격이고, 플라톤에게 털 뽑은 닭을 들이밀던 디오게네스마냥 순수한 악의로 들어찬 침입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아도르노가 이르듯 ‘변증법적 이성이 지배적 이성에 대항하는 비이성이며, 변증법적 이성이 지배적 이성을 걸고넘어져 지양시킬 때 그것이 비로소 이성적으로 되는 것’[30]이라면 본고의 제스쳐가 마냥 무용한 건 아닐 것이다. 긴장은 언제나 이런 불일치의 간극에서, 수용과 배제의 문턱에서, 아이러니의 임계에서 발발한다. 비평은 해석의 풍요로움, 역사적 궤적에 대한 탐조, 이를 종합한 가치판단과 산적한 문제의 시급성과 결부되지만, 이에 못지않게 요청되는 태도가 있다면 관성적 운동을 적시하고 중단시키려는 마찰력이 아닐까 한다.

 


[1] 덧붙여 심상용 교수는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밝힌다. “몇 안 되는 지면들은 민감하거나 논쟁적인 주제는 아예 취급조차 하지 않아 온 공화국의 관례에 여전히 충실하다. 이 점은 많지 않은 이론 출판물과 학술논문, 전시 큐레이팅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확인된다.” 본문과 해당 텍스트는 괄호 안의 링크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심상용. “2017 SeMA-하나 평론상” 서울시립미술관, 2017년 11월 12일, https://sema.seoul.go.kr/kr/knowledge_research/publish_detail?museumDataNo=388224, 2022년 08월 10일 접속.)

 

[2] 웹진에 대한 무심함은 비평 공모에서도 엿볼 수 있다. 202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시각예술 비평지원 공모에 선정된 10개의 프로젝트에서 웹진은 0건, 2022년은 9건 중 1건, 2021년은 8건 중 2건, 2020년은 10건 중 1건, 2019년은 9건 중 2건, 2018년은 12건 중 2건, 2017년 13건 중 1건, 2016년 10건 중 2건으로, 여전히 출판물 또는 출판서적의 기획이 선정에 있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플랫폼의 운영에 대한 지원은 미미하다.

 

[3] 안대웅. “신세대 담론의 작은 역사: 2013-2016” ARTCENE, 2019년 02월 12일, https://www.artscene.co.kr/1680#footnote_1680_4, 2019년 2월 15일, 2023년 8월 10일 접속.

 

[4] 강정석. “서울의 인스턴스 던전들 ” 반지하 텀블러, 2015년 5월 28일, https://www.tumblr.com/vanziha/120061798362/%EC%84%9C%EC%9A%B8%EC%9D%98-%EC%9D%B8%EC%8A%A4%ED%84%B4%EC%8A%A4-%EB%8D%98%EC%A0%84%EB%93%A4-instance-dungeons-of-seoul-%EA%B0%95%EC%A0%95%EC%84%9D, 2018년 3월 20일, 2023년 8월 10일 접속.

 

[5] 함연선. “데굴데굴 패스연습(8)” 마테리알, 2023년 8월 22일, https://ma-te-ri-al.online/archive/710/, 2023년 8월 23일 접속

 

[6] 홍태림. “제4회 공장미술제의 심각한 문제점에 대하여” 크리틱-칼, 2014년 1월 14일, http://www.critic-al.org/?p=4135, 2018년 6월 10일, 2023년 8월 10일 접속.

 

[7] 정강산. “‘예술가들이여, 예술을 그 자체로 옹호하라’ - 예술과 노동의 관계에 대하여” 집단오찬, 2015년 3월 29일, https://jipdanochan.tistory.com/44, 2017년 5월 7일, 2023년 8월 10일 접속.

 

[8] 정강산. “예술가들이여, 추상에서 규정으로 전화하라 - 핌피현상으로서의 청년관을 비판하며” 집단오찬, 2015년 4월 16일, https://jipdanochan.tistory.com/49, 2017년 5월 18일, 2023년 8월 10일 접속.

 

[9] 권시우. “<“청년관을 위한 예술행동”을 지지하며 - ‘세대’라는 변곡점>” 집단오찬, 2015년 4월 16일, https://jipdanochan.tistory.com/50, 2017년 5월 18일, 2023년 8월 10일 접속.

 

[10] 박혜정. “여성에 대한 폭력 지우기, 예술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나” 집단오찬, 2018년 7월 30일, https://jipdanochan.tistory.com/96, 2018년 7월 30일, 2023년 8월 10일 접속.

 

[11] 엄제현. “예술과 윤리, 그 불행한 동거” 크리틱-칼, 2018년 8월 5일, http://www.critic-al.org/?p=4505, 2018년 8월 5일, 2023년 8월 10일 접속.

 

[12] 홍양무현. “예술과 윤리를 나누는 이분법은 누구에게 유리한가?” 집단오찬, 2018년 8월 18일, https://jipdanochan.tistory.com/97, 2018년 8월 18일, 2023년 8월 10일 접속.

 

[13] 안준형. “지금 여전히 귀귀의 만화를 본다는 것은” 퐁, 2022년 3월 15일, https://pong0view.tistory.com/41, 2022년 3월 15일, 2023년 8월 11일 접속.

 

[14] 쇼코는왜. “웹툰 작가가 각 잡고 그림 그리면 생기는 일” ARTRECTURE, 2022년 3월 18일, https://artlecture.com/article/2691, 2022년 3월 19일, 2023년 8월 11일 접속.

 

[15] https://archivist.kr/

 

[16] 김준혁. “귀귀의 개인전 홍보 요청을 거절하며” MACO, 2022년 4월 13일. https://maco.page/i1_detail.php?idx=54, 2022년 4월 13일, 2023년 8월 11일 접속.

 

[17] 이용준. “도덕 논쟁이라는 진부함, 헐떡이는 세계에 대한 울화” 콜리그, 2022년 7월 22일, https://www.colleague.co.kr/forum/view/697774, 2022년 7월 23일, 2023년 8월 11일 접속.

 

[18] 여러 컴퓨터에 분산된 데이터를 수집해 검색 색인으로 포함시키는 기술을 이르며, 본문에서는 분포된 비평을 경로화하는 방식의 은유로 쓰였다.

 

[19] 권시우. “[90APT] ⟨Hovering⟩ 프로그램 일정” Inter-Viewer, 2019년 12월 13일, https://inter-view-er.tistory.com/28, 2023년 8월 11일 접속.

 

[20] 『구텐베르크 은하계』, 마셜 맥루한, 임상원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주), 2001, 57p.

 

[21] Ibid., 91p.

 

[22] Ibid., 140p.

 

[23] 문혜진. “2021 SeMA-하나 평론상 및 한국 현대미술비평 집담회 자료집” 서울시립미술관, 2021년 12월 31일, https://sema.seoul.go.kr/kr/knowledge_research/publish_detail?museumDataNo=1156258, 2023년 8월 15일 접속.

 

[24] 『S/Z』, 롤랑 바르트, 김웅권 옮김, 연암서가, 2015, 78p.

 

[25] 『구텐베르크 은하계』, 마셜 맥루한, 269p.

 

[26] 필립 오스랜더.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의 수행성” 호랑이의 도약, 2019년 2월 9일, http://tigersprung.org/?p=392, 2021년 3월 16일, 2023년 8월 15일 접속.

 

[27] 문서(document)와 우주(universe)의 합성어. 테오도어 넬슨이 최초로 주장했다.

 

[28] 데이터베이스에 정보를 요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로 특정 주제어나 어귀를 찾기 위해 사용된다.

 

[29]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알레프』에서 나오는 3cm의 구슬로, 세계의 모든 사물과 시간이 이 안에 담겨 있다.

 

[30] 『미니마 모랄리아』, 테어도어 아도르노, 김유동 옮김, 도서출판 길, 2005, 10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