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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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왕은 누가 쓰러뜨렸을까?: 비디오 게임에서의 플레이어와 루두스 장치 의 한 전투는 이렇게 진행된다. 주인공 ‘용사’는 6개의 오브를 모아 용사의 검을 부활시킨다. 이때 그들의 뒤를 추격해온 마왕 우르노가의 부하 호메로스가 용사 일행을 습격한다. 이어지는 전투 시퀀스에서 호메로스는 ‘어둠의 오라’를 두르고 무적 상태가 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호메로스를 결코 쓰러뜨릴 수 없다. 이러한 게임 문법에 익숙한 플레이어 대부분은 그냥 패배를 하나의 서사로 받아들이고 전개를 즐기기 시작한다. 이때 플레이어들은 이 상황을 자신의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결과가 규정된, 결코 뒤집을 수 없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는 비디오게임의 성격으로 거론되는 ‘일체화의 신화’와 위배되는 성질이다. 많은 이들이 비디오게임의 참여적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비디오게임에서의 일체적 경험에 대해 말..
<오징어 게임>: 게임의 수용소에 갇힌 시민들과 밈적 이미지의 존재론에 대하여 을 부정적으로 보는 평자들은 보통 작품의 선정적 수위, 빈곤층에 대한 묘사, 그 외에도 개별적인 배역에 대한 묘사의 적절성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한 지적들은 모두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드라마의 더 본질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밖에 없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앞서 언급한 평자들의 비판에 대해 지금까지 제출된 반론들을 떠올려보도록 하자. 의 묘사와 선정성에 대한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드라마가 그저 게임 같은 드라마일 뿐이니 진지하게 굴 필요가 없다는 식의 논조를 취한다. 이들의 진지하지 못한 태도가 문제적이라고 생각되는가?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진지하지 못한 이들에게 지금부터라도 억지로 진지해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가로서의 게임, 노동으로서의 게임, 상품으로서의 게임: 게임 읽기의 혼란과 비판적 개입 게이머들 사이에서 노가다 게임이라는 비난의 표현은 이제는 상투적일 뿐이다. 하지만 게임에 관한 진정으로 상투적인 인식을 상기해보자면 이는 다소 어색하게 들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게임을 즐기는 일은 흔히 취미 혹은 여가 활동으로 여겨지고 이는 특히 무엇보다도 노동과는 전혀 상반되는 활동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당연하게도 노동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과도한 노동, 속된 말로 노가다를 요구한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게이머들의 경험과 비판적 통찰에 맞장구라도 치듯 흔히 인지자본주의론자들로 분류되는 특정한 경향의 지식인들은 동시대 자본주의에 관한 비판적 스케치를 그리며 노동(력)이 되어버린 게임에 관해 분석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게임 플레이는 실제로 노동이자 노동력일..